(一一〇九)
(1109)
주 한문 제목은 번호(一一〇九)뿐이고 팔리는 경 이름(Subhāsitajayasuttaṃ)을 단다 — 그래서 일부(partial)다. 편자 교감주가 같은 곳에 「S. 11. 1. 5」와 경 이름·「No. 100(38)」을 단다. 이 주는 증언이 아니라 편자의 대조 표시다. 다카쿠스 각주가 가리킨 「11. 1. 5」는 상윳따 11·제1품·제5경이고, 팔리 sn11.5의 경 이름과 맞는다. 본 후보 sn11.5 한 경으로 읽는다. 보조로 준 sn11.1(Suvīra)은 이름도 내용(게송·논쟁)도 이 경과 달라 대응 좌표로 잡지 않는다. 수 표기는 숫자로 옮겼다.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0.3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주 팔리 sn11.5는 「Sāvatthinidānaṃ」 한 마디로 서두 전체를 접어 둔다. 한문의 개경 정형구(如是我聞)가 이 한 마디 안에 접혀 있으므로 같음(equivalent)을 세우지 않고 일부(partial)로 둔다. 한 문장씩 맞는 팔리 좌표는 이 본 후보에 없다. 如是: 앵커 「비유·가정」이지만 정형구 「이와 같이」로 옮겼다.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1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머무르셨다.
주 舍衛(사위)는 정착어다. 慧琳 『一切經音義』 0367c24는 舍衛를 「聞者城」·「聞物國」으로 풀고 『善見律』을 인용해 사람 이름 舍衛에서 나온 나라 이름이라고도 전한다(음의, 인용만 하고 판정하지 않는다). 祇樹給孤獨園은 한국 불교계 정착형 「기수급고독원」을 썼다. 祇樹는 祇陀(승 勝) 태자가 숲을 바친 데서 온 말이고(慧琳 0368a03), 給孤獨은 장자 아나빈저(無親屬·孤獨을 돌보겠다는 서원, 慧琳 0368a05)의 의역 호칭이다. 전거표: 祇樹給孤獨園 ↔ Jetavana, Anāthapiṇḍika(⚠다른 부 DA의 대역). 한 경 안에서 표기를 통일한다. [불확실:고유명·표기_유형] 정착형을 택했으나 給孤獨은 의역 이름이므로 정도평 확인 요청. 佛은 확정역 「부처님」(구속). 一時: 사전 一時 ① 잡아함 1345회, 「한때」.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1
爾時,世尊告諸比丘:「過去世時,天、阿修羅對陣欲戰,釋提桓因語毘摩質多羅阿修羅王:『莫得各各共相殺害,但當論議,理屈者伏。』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셨다. 「지난 세상 때에 하늘과 아수라가 진을 마주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석제환인이 비마질다라 아수라왕에게 말했다. 『각기 서로 죽이고 해치지 말라. 다만 논의하라. 이치가 굽는 이가 굴복한다.』
주 ①화자 갈림. 팔리에서는 비마질다라(Vepacitti)가 「게송이 아니라 잘 말함으로 이기자」를 먼저 제안하고(251.3~4) 석제환인이 받아들이는데(251.5), 한문에서는 석제환인이 먼저 「서로 죽이지 말고 논의하자」고 말한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것을 말하므로 divergent다. 「莫得各各共相殺害」는 팔리에 대응이 없다(싸움을 말로 바꾸는 제안의 내용). ②음역: 毘摩質多羅(비마질다라)·阿修羅(아수라)는 음역, 한자 독음. 판별 근거는 팔리형 Vepacitti·Asura와의 음 대응(전거표)이며, 慧琳 0435a08은 毘摩=絲/遍空, 質多羅=種種으로 소리 풀이를 단다. 毘摩質多羅阿修羅王은 이름+칭호(阿修羅王)로 끊는다. 釋提桓因(석제환인)은 慧琳 0482c21이 釋迦提婆因達羅로 풀어 음역으로 읽었다. 전거표: 팔리 Sakka devānam inda 계열 / 근대 Śākradevānāmiṁdra(편자 비정). 두 계통이 서고 서로 다르므로 갈림: 음역계통이며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3분할표가 갈림(의역/혼합)으로 분류했으므로 [불확실:고유명·표기_유형]을 남긴다. ③世尊(확정역 세존)이 여기서 말을 열고 b07에서는 같은 정형구가 佛로 선다 — 한역이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다(世尊/佛). 확정역대로 각각 「세존」·「부처님」으로 두었다. ④過去世時 「지난 세상 때에」, 對陣 「진을 마주하여」, 殺害 「죽이고 해치다」(사전 殺·害). 當(但當論議) 어미 「-라」가 지고, 但은 「다만」으로 세웠다(앞 금지에 대한 대립). 莫得 「-지 말라」, 者 「이」. 이문: 論議의 議가 宋·元·明·聖본에는 義(교감주).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2
니까야 대응 내용 다름 SN 11.5:251.3~251.5
毘摩質多羅阿修羅王言:『設共論議,誰當證知理之通塞?』
비마질다라 아수라왕이 말했다. 『가령 함께 논의한다면 누가 이치의 통함과 막힘을 증명하여 알겠는가?』
주 팔리는 「심판을 세운다」(pārisajje ṭhapesuṃ, 251.6)와 그들이 「잘 말한 것과 잘못 말한 것을 알아볼 것이다」(251.7)를 서술문으로 말하고, 한문은 비마질다라가 던지는 질문(누가 증명하여 아는가)으로 말한다. 심판의 필요라는 점은 같다. 設은 가정(「가령 …면」), 當은 의문 속에서 어미가 진다. 通塞 「통함과 막힘」, 證知 「증명하여 알다」(사전 證 ① 身作證, 知). 이문: 議/義(宋·元·明·聖).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6~251.7
天帝釋言:『諸天眾中自有智慧明記識者,阿修羅眾亦復自有明記識者。』
천제석이 말했다. 『여러 하늘 무리 가운데 지혜롭고 밝게 기억하여 아는 이가 있고, 아수라 무리에도 또한 지혜롭고 밝게 기억하여 아는 이가 있다.』
주 한역이 같은 개념(석제환인)에 다른 한자를 쓴다: 앞 좌표 釋提桓因, 여기서는 天帝釋, 뒤 좌표에 帝釋. 확정역이 없으므로 통일하지 않고 한자 독음대로 「석제환인」·「천제석」·「제석」으로 둔다. 팔리 251.6~7의 심판 세우기가 이 대답에 해당하나, 팔리는 「하늘과 아수라가 심판을 세웠다」고만 하고 「각자 자기 쪽에 지혜로운 이가 있다」는 말은 없다. 自有: 單純 재귀·본유라 「스스로」를 세우지 않고 흡수했다. 亦復은 병렬(하늘/아수라)의 뜻이 실려 「또한」을 남기고 復은 흡수. 諸天眾 「여러 하늘 무리」(사전 諸天 · 眾). 明記識은 明·記·識 셋을 한 낱말로 읽어 「밝게 기억하여 아는」으로 옮겼다. 지혜+明記識의 끊음은 [불확실:구두·분절].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6~251.7
毘摩質多羅阿修羅言:『可爾。』
비마질다라 아수라가 말했다. 『그리해도 좋다.』
주 팔리 251.5는 석제환인이 「그렇게 하자(Hotu)」고 받아들이는 말이다. 한문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비마질다라다 — 같은 자리(수락의 말)에서 화자가 바뀐다(앞 좌표의 화자 갈림과 한 줄). 可爾: 可는 허락 「좋다」, 爾는 「그러하다」로 풀어 「그리해도 좋다」. 존칭: 평서.
니까야 대응 내용 다름 SN 11.5:251.5
釋提桓因言:『汝等可先立論,然後我當隨後立論,則不為難。』
석제환인이 말했다. 『그대들이 먼저 논을 세우라. 그런 뒤에 내가 뒤를 따라 논을 세우겠으니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주 팔리 251.8~12는 비마질다라가 「그대가 먼저 게송을 말하라」고 하자 석제환인이 「그대들이 옛 하늘(pubbadevā)이니 그대가 먼저 말하라」고 하는 짧은 사양이다. 한문은 석제환인이 먼저 「그대들이 먼저 논을 세우라」고 하고 이유(뒤따르면 어렵지 않다)를 붙인다. 먼저 말하게 한다는 점이 같고, 이유가 다르다. 可先立論: 可는 권유/허락으로 읽어 명령형 「-라」. 我當隨後立論 當→「-겠다」. 則不為難 則는 귀결 어미에 흡수하고, 為는 「…이 되다」로 옮겼다. 이문: 然後(대정본) / 能復(聖) — 본문은 대정본을 따른다.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10~251.12
「時,毘摩質多羅阿修羅王即說偈立論言:
「그때 비마질다라 아수라왕이 곧 게송을 말하여 논을 세우며 말했다.
주 이 게송 소개는 팔리에서 비마질다라의 두 번째 게송 앞 구절(251.25)에 해당한다. 한문은 비마질다라가 먼저 말하는 게송이 이것이다. 팔리의 첫 게송(251.14~15)은 한문에서 뒤(0292a19~22)에 온다. 한문 게송 둘의 차례가 팔리와 서로 바뀌어 있다(자리바뀜). 時 「그때」, 即 「곧」, 說偈立論言 「게송을 말하여 논을 세우며 말했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25
「『我若行忍者,於事則有闕,
「『내가 참음을 행하면 일에 모자람이 있다.
주 팔리 251.26 「이 참음에 허물이 있다고 나는 본다, 와사바여(Etadeva titikkhāya, vajjaṃ passāmi vāsava)」와 같은 취지다 — 한문 有闕(모자람)과 팔리 vajja(허물). 한문에는 호격(와사바)이 없다. 위치는 팔리 둘째 게송 자리인데 한문은 첫 게송이다. 若…者 「…면」(者는 가정 어미에 흡수), 行忍 「참음을 행하다」(사전 忍), 於事 조사로 흡수, 則有闕 「모자람이 있다」(則는 귀결로 흡수; 有는 존재 서술).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26
愚癡者當言,怖畏故行忍。』
어리석은 이는 말할 것이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참음을 행한다고.』
주 팔리 251.27 「어리석은 자가 여길 때 — 이 사람은 나를 두려워해서 참는다(bhayā myāyaṃ titikkhati)」에 맞는다. 한문은 愚癡者(어리석은 이)가 말한다고 하고, 팔리는 bālo(어리석은 자)가 「여긴다(maññati)」고 한다 — 말함/여김의 차이. 當言: 當은 어미 「-리라/-ㄹ 것이다」가 진다. 怖畏 「두려워하다」로 옮기고, 같은 개념이 a14에서는 恐怖로 서므로 그쪽에서 신고한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27
「釋提桓因說偈答言:
「석제환인이 게송을 말하여 답했다.
주 팔리 251.32 「석제환인이 이 게송들을 말했다」. 한문은 한 게송(a14~a17, 4행 2구)만 말하고, 팔리는 이어서 여섯 게송(251.33~44)을 말한다. 說偈答言 「게송을 말하여 답했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32
「『正使愚癡者,言恐怖故忍,
「『설령 어리석은 이가 두려움 때문에 참는다고 말하더라도,
주 팔리 251.33 「그가 그렇게 여기든 말든 — 이 사람은 나를 두려워해서 참는다(Kāmaṃ maññatu vā mā vā, bhayā myāyaṃ titikkhati)」와 맞는다. 恐怖(여기)와 怖畏(0292a12·0292a21)는 한역이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 것이다. 확정역이 없어 각각 「두려움」·「두려워하다」로 옮기고 통일하지 않았다. 正使 「설령」(사전 正使 ①: 발화 첫머리 5/21). 이문: 正/政(聖).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33
及其不言者,於理何所傷。
그리고 말하지 않는 이도 이치에 무엇이 상하겠는가.
주 言(말하다)과 不言(말하지 않다)이 짝이고, 팔리 maññatu vā mā vā (여기든 말든)에 맞는다 — 한문이 두 갈래를 짝으로 세운 구조가 팔리의 「vā mā vā」와 같다. 「이치에 무엇이 상하겠는가」는 팔리 251.34 「자기 이익이 으뜸인 이익이며 참음보다 더한 것은 없다」와 직접 맞지는 않는다. 한문이 「이치에 상함이 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팔리는 「참음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므로 같은 자리에서 다른 것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 줄의 끊음(及其不言者)은 [불확실:구두·분절] — 「및 그 말하지 않는 이」로 읽었으나 「그가 말하지 않음에 이르러서도」로 읽을 수도 있다. 於理何所傷: 於는 조사로 흡수하고 所는 「…하는 바」로 옮기지 않고 의문으로 풀었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33~251.34
但自觀其義,亦觀於他義,
다만 스스로 그 뜻을 보고 또한 남의 뜻도 보니,
주 팔리 251.41 「자기와 남 둘의 이익을 행한다(Ubhinnamatthaṃ carati, attano ca parassa ca)」와 맞는다. 自↔他가 실재한다(自觀其義 ↔ 觀於他義)여서 「스스로」·「남」을 세웠다. 但은 「다만」, 亦는 「또한」으로 뜻을 남겼다. 팔리와 달리 한문은 이 구절을 게송의 끝 가까이 둔다(팔리는 여섯 게송 가운데 다섯째). 이문: 이 행과 다음 행(〔但自…上〕 20자)이 宋·元본에 없다(교감주). 義 「뜻」(사전 義 ①).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41
彼我悉獲安,斯忍為最上。』
저와 나 모두 편안함을 얻으니 이 참음이 가장 높다.』
주 팔리 251.41~43은 자기와 남 둘을 치료하는 이를 말하고(Ubhinnaṃ tikicchantānaṃ, 251.43) 법에 어두운 이가 그를 어리석다 여긴다고 맺는다. 한문은 「저와 나가 다 편안함을 얻으니 이 참음이 가장 높다」고 맺는다 — 팔리 251.34 「참음보다 나은 이익이 없다」와 닿는 맺음이다. 彼我悉獲安 「저와 나 모두 편안함을 얻는다」(悉 「모두」, 獲 사전 ① 31회). 為最上 「…이다」. 斯 「이」.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41
「毘摩質多羅阿修羅復說偈言:
「비마질다라 아수라가 다시 게송을 말했다.
주 팔리에서 비마질다라의 첫 게송을 여는 말(251.13)이다. 앞서 한문 0292a09의 소개와 이 소개가 팔리 251.25·251.13에 엇갈려 닿는다(a09 주 참조). 復 「다시」는 둘째 게송이라는 뜻이 실려 남겼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13
「『若不制愚癡,愚癡則傷人,
「『만약 어리석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어리석음이 사람을 해친다.
주 팔리 251.14 「제어하는 자가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이 더 갈라져 나온다(Bhiyyo bālā pabhijjeyyuṃ, no cassa paṭisedhako)」. 한문은 愚癡(어리석음, 추상)가 사람을 해친다고 하고, 팔리는 bālā(어리석은 이들)가 흩어져 나온다고 한다. 한문 愚癡를 사람이 아닌 성질로 읽어 「어리석음」으로 옮겼으나 [불확실:다의어_판별] — 어리석은 이를 가리키는 환유일 수 있다(愚癡者 0292a12·0292a14는 者가 붙어 구별된다). 若不制…則 「…하지 않으면 …한다」에 흡수, 傷人 「사람을 해치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14
猶如兇惡牛,捨走逐觸人。
마치 흉악한 소가 내버려 달려 사람을 쫓아 들이받는 것과 같다.
주 팔리에 소 비유가 있다 — 251.28 「어리석은 자는 달아나는 이에게 더 달려든다, 소처럼(gova bhiyyo palāyinaṃ)」. 위치는 팔리가 석제환인의 반박 앞 비마질다라의 둘째 게송이고, 한문은 첫 게송 뒤쪽이다. 捨走는 [불확실:구두·분절] — 捨(놓아 버리다)와 走(달리다)를 이어 「내버려 달려」로 읽었다. 이문 走/之(聖)이면 「놓아 버려 …로」가 되어 읽음이 달라진다. 猶如 「마치 …같다」, 兇惡 「흉악한」.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28
執杖而強制,怖畏則調伏,
막대를 잡고 강하게 제어하면 두려워하여 곧 조복된다.
주 팔리 251.15 「그러므로 굳센 막대로 지혜로운 이는 어리석은 이를 막는다(bhusena daṇḍena)」. 막대(daṇḍa)가 대응한다. 執杖은 3분할표가 의역(Daṇḍapāṇi)으로 분류했으나 여기서는 이름이 아니라 「막대를 잡다」다. 調伏: 한국 불교계에서 쓰는 「조복」을 썼다 — 사전 調伏 ① 181회. 뜻을 풀어 「길들여 누른다」로도 옮길 수 있어 [불확실:술어·낱말_선택]. 而는 흡수, 則는 「-면」, 怖畏는 「두려워하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15
是故堅持杖,折伏彼愚夫。』
그러므로 막대를 굳게 쥐고 저 어리석은 사내를 꺾어 굴복시키라.』
주 팔리 251.15의 「그러므로(Tasmā)」·「굳센 막대로」·「어리석은 이를 막는다」와 한 줄씩 맞는다. 堅持杖의 堅은 bhusa(굳센)와 가깝다. 愚夫 「어리석은 사내」(사전 愚夫 ① 17회; 丁福保는 婆羅 Bāla를 愚夫로 풀지만 후대의 눈이라 인용만 한다). 折伏은 이 경에만 나오는 낱말(사전 折伏 1회), 慧琳 0325a01은 折=꺾다, 伏=엎드리게 하다로 푼다 — 「꺾어 굴복시키라」. 是故 「그러므로」.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15
「帝釋復說偈言:
「제석이 다시 게송을 말했다.
주 팔리 251.19 「석제환인이 이 게송을 말했다」(첫 게송을 여는 말). 한문은 석제환인의 첫 게송이 여기가 아니라 팔리 둘째 번이다. 한역이 같은 개념(석제환인)에 다른 한자를 쓴다: 釋提桓因 / 天帝釋 / 帝釋. 여기는 帝釋이며 「제석」으로 두고 통일하지 않는다. 이문: 帝 / 天帝(聖). 復 「다시」.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19
「『我常觀察彼,制彼愚夫者,
「『나는 늘 저를 관찰하니, 저 어리석은 사내를 제어하는 이는,
주 팔리 251.20 「이것이 어리석은 이를 막는 일이라고 나는 여긴다(Etadeva ahaṃ maññe, bālassa paṭisedhanaṃ)」에 맞는다. 한문 制彼愚夫者(저 어리석은 사내를 제어하는 이)가 bālassa paṭisedhanaṃ에 해당한다. 彼는 어리석은 이로 읽었고 [불확실:구두·분절] — 「나는 늘 저를 관찰한다. 저 어리석은 사내를 제어하는 이는,」으로 끊어 다음 행에 이어 읽었다. 觀察은 3분할표가 의역으로 분류해 「관찰」을 쓰지 않고 「살펴보다」로 옮겼으나 이 행은 관찰 대상을 가리키므로 「관찰하니」와 같은 뜻이다. 常 「늘」.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20
愚者瞋恚盛,智以靜默伏。
어리석은 이의 성냄이 성할 때, 지혜는 고요한 침묵으로 굴복시킨다.
주 팔리 251.21 「남이 성난 것을 알고 마음 챙겨 가라앉는 이(Paraṃ saṅkupitaṃ ñatvā, yo sato upasammatī)」에 맞는다. 瞋恚 「성냄」(의역, 3분할표 Byāpāda; 慧琳 0803c16 恚=憎으로 푼다). 智는 「지혜」 명사로 읽었다 — 愚者(사람)와 짝이 지혜(성질)여서 [불확실:다의어_판별](지혜로운 이일 수 있다). 以靜默 「고요한 침묵으로」, 伏 「굴복시킨다」.
니까야 대응 순서 다름 SN 11.5:251.21
不瞋亦不害,常與賢聖俱,
성내지 않고 또한 해치지도 않으며, 늘 현성과 함께한다.
주 팔리 251.40 「성난 이에게 맞서 성내지 않으면서(Kuddhaṃ appaṭikujjhanto)」와 不瞋이 닿는다. 不害 「해치지 않음」과 賢聖은 팔리에 대응이 없다 — 개별 대응은 거칠다. 사전 不害 ③ 용례 sa1100/0291b16.1 「不瞋亦不害,名住賢聖眾」. 賢聖은 정착형 「현성」으로 두었다(사전 賢聖 ① 90회). 亦 「또한」, 與…俱 「…와 함께하다」.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40
惡罪起瞋恚,堅住如石山。
악한 죄로 성냄이 일어나도 굳게 머물러 돌산 같다.
주 팔리 251.39 「성난 이에게 맞서 성내는 이는 그 때문에 더 나쁘다(Tasseva tena pāpiyo, yo kuddhaṃ paṭikujjhati)」에서 惡·瞋恚가 닿는다. 「돌산」 비유(石山)는 팔리에 없다. 惡罪起瞋恚: 惡罪가 瞋恚를 일으킨다로 읽을 수도 있고, 악한 죄 때문에 성냄이 일어난다로 읽을 수도 있다 — 후자로 옮겼다 [불확실:격·태·구문]. 堅住 「굳게 머물다」, 如石山 「돌산 같다」.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39
盛瞋恚能持,如制逸馬車,
성한 성냄을 붙들 수 있음은 내달리는 말의 수레를 제어함과 같으니,
주 수레 비유(마부)는 팔리 sn11.5(251.1~251.52)에 없다. 다른 잡아함에 같은 행이 있다(사전 能持 ③ 용례 sa1100/0291b18.1, sa1144/0307a04.1). 能持 「붙들 수 있다」(能 「-ㄹ 수 있다」), 逸馬 「내달리는 말」(慧琳 0611b15 逸=달아나다·내닫다). 전거표 馬車 ↔ 당대 범어 rtha. 如 「같다」.
니까야 대응 대응 없음 SN 11.5:251.52
我說善御士,非謂執繩者。』
나는 잘 모는 이를 말하며, 줄을 쥔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 앞 좌표와 같은 사안으로 팔리 sn11.5에 대응이 없다(absent). 善御士 「잘 모는 이」, 執繩者 「줄을 쥔 이」, 非謂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所 없음). 繩은 「줄」로 두고 고삐라고 풀지 않았다 — 풀면 한문에 없는 해석이 된다.
니까야 대응 대응 없음 SN 11.5:251.52
「爾時,天眾中有天智慧者,阿修羅眾中有阿修羅智慧者,於此偈思惟稱量觀察,作是念:『毘摩質多羅阿修羅所說偈,終竟長夜起於鬪訟戰諍,當知毘摩質多羅阿修羅王教人長夜鬪訟戰諍;釋提桓因所說偈,長夜終竟息於鬪訟戰諍,當知天帝釋長夜教人息於鬪訟戰諍,當知帝釋善論得勝。』」
「그때 하늘 무리 가운데 지혜가 있는 하늘과 아수라 무리 가운데 지혜가 있는 아수라가, 이 게송에 대해 생각하고 헤아리고 살펴보고서 이런 생각을 일으켰다. 『비마질다라 아수라가 말한 게송은 끝내 긴 밤 동안 싸움과 시비와 전쟁과 다툼을 일으킨다. 비마질다라 아수라왕이 사람들에게 긴 밤 동안 싸움과 시비와 전쟁과 다툼을 가르친다고 알아야 한다. 석제환인이 말한 게송은 긴 밤 동안 끝내 싸움과 시비와 전쟁과 다툼을 그치게 한다. 천제석이 긴 밤 동안 사람들에게 싸움과 시비와 전쟁과 다툼을 그치도록 가르친다고 알아야 한다. 제석이 잘 논하여 이겼다고 알아야 한다.』」
주 팔리 251.46~51은 심판들(pārisajjā)이 「비마질다라의 게송은 몽둥이와 칼을 쓰는 것이니 싸움·다툼·말다툼(bhaṇḍana, viggaha, kalaha)이다. 석제환인의 게송은 몽둥이도 칼도 쓰지 않으니 싸움·다툼·말다툼이 없다. 석제환인이 잘 말함으로 이겼다」고 한다. ①한문은 네 낱말(鬪訟戰諍)을, 팔리는 셋을 든다 — 戰(전쟁)이 한문에만 더 있고 몽둥이·칼(sadaṇḍa, sasattha)에 해당하는 말은 한문에 없다. ②한문은 판정하는 쪽이 「하늘 무리와 아수라 무리 가운데 지혜 있는 이」이고(앞 a05와 이어짐), 팔리는 pārisajjā다. ③長夜(긴 밤)·教人(사람들에게 가르친다)·當知(알아야 한다)는 한문에서 거듭된다 — 팔리에 없는 한역 문체이므로 번역기법으로 신고한다. ④한역이 같은 개념(석제환인)에 毘摩質多羅阿修羅 / 阿修羅王, 釋提桓因 / 天帝釋 / 帝釋을 섞어 쓴다 — 한자 흔들림. 教人: 「사람을 시키다」(사역)로도 읽을 수 있으나 「가르친다」로 옮겼다 [불확실:다의어_판별]. 鬪訟戰諍 네 글자는 鬪 「싸움」·訟 「시비」·戰 「전쟁」·諍 「다툼」으로 각각 옮겼다. 當知 ×3: 當은 어미 「-야 한다」가 진다. 於此偈: 於 「에 대해」. 作是念 「이런 생각을 일으키다」. 得勝 「이겼다」(得는 흡수). 이문 없음. 사전 長夜 ① 205회, 諍 ① 49회.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46~251.51
佛告諸比丘:「釋提桓因以善論議伏阿修羅。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셨다. 「석제환인은 잘 논의하여 아수라를 굴복시켰다.
주 팔리 251.52 「이처럼 비구들이여, 석제환인은 잘 말함으로 이겼다」. 앞(a01)에서 같은 정형구가 世尊告諸比丘이던 것이 여기서는 佛告諸比丘다 — 한역이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다(世尊/佛). 확정역 「세존」·「부처님」대로 옮겼다. 以善論議: 以는 수단 「…하여」로 흡수. 이문: 議/義(宋·元·明·聖).
니까야 대응 일부 SN 11.5:251.52
諸比丘!釋提桓因於三十三天為自在王,立於善論,讚歎善論。
비구들이여, 석제환인은 삼십삼천에서 자재왕이 되어 잘 논함에 서고 잘 논함을 찬탄한다.
주 석제환인이 삼십삼천의 자재왕이라는 서술과 「잘 논함을 찬탄한다」는 풀이는 팔리 sn11.5에 없다(251.1~251.52 전부 확인). 三十三天: 숫자를 뜻으로 옮긴 이름이어서 3분할표는 음역으로 분류했으나 의역으로 읽었다. 정착형 「삼십삼천」과 같은 글자이므로 처리에 영향이 없다. 自在王 「자재왕」(사전 自在王 ① 18회; 自는 단순 재귀가 아니라 「자재」의 일부여서 「스스로」를 세우지 않았다). 為 「…이 되다」, 立於善論 「잘 논함에 서다」, 讚歎 「찬탄」(정착). 諸比丘 호격 「비구들이여」.
니까야 대응 대응 없음 SN 11.5:251.52
汝等比丘亦應如是,正信非家,出家學道,亦當善論,讚歎善論,應當學!」
그대들 비구도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바른 믿음으로 집 아닌 곳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니, 또한 잘 논하고 잘 논함을 찬탄하며 배워야 한다!」
주 비구들에게 하는 권유는 팔리 sn11.5에 없다. 亦應如是의 亦은 석제환인 같이라는 비교가 실려 「또한」을 남겼다. 應·當은 어미 「-야 한다」가 진다. 正信非家,出家學道는 정형구로, 非家 「집 아닌 곳」(의역 형태)·出家 「집을 나와」(의역)이다. 出家를 「출가」로 두면 3분할표의 의역 지침과 어긋나 뜻으로 옮겼다. 사전 正信 ① 73회, 家 ①, 出家 ①, 學 ①. 이문: 等(宋·元·明·聖에 없음, 교감주).
니까야 대응 대응 없음 SN 11.5:251.52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
주 팔리 sn11.5에는 맺음 정형구가 없다(251.52가 끝). 佛說此經已…歡喜奉行은 이 잡아함 전권의 맺음 정형구(사전 佛說 ① 903회, 奉行 ① 863회)다. 說此經已 「이 경을 다 설하시자」(已는 완료 어미), 所說 「설하신 것」, 歡喜 「기뻐하며」, 奉行 「받들어 행하다」.
니까야 대응 대응 없음 SN 11.5:25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