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Sandakasuttaṃ
6. 산다까 경
22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코삼비의 고시타 동산에 머무르셨다. 그때 유행자 산다카는 오백 명쯤 되는 유행자 무리와 함께 필락카 동굴에 머물고 있었다.
Evaṃ me sutaṃ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ekaṃ samayaṃ bhagavā kosambiyaṃ viharati ghositārāme.
한때 세존께서 꼬삼비의 고시따 원림에 머무셨다.
Tena kho pana samayena sandako paribbājako pilakkhaguhāyaṃ paṭivasati mahatiyā paribbājakaparisāya saddhiṃ pañcamattehi paribbājakasatehi.
그때 산다까 유행자가 삘락카 동굴에, 오백 명쯤 되는 유행자들의 큰 무리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그날 저녁 무렵 존자 아난다는 홀로 고요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 비구들을 불렀다. "벗들이여, 데바카타 연못으로 갑시다. 그 동굴을 보러 갑시다." 비구들은 "좋습니다, 벗이여" 하고 대답했다. 존자 아난다는 많은 비구와 함께 데바카타 연못으로 갔다.
Atha kho āyasmā ānando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bhikkhū āmantesi –
그때 아난다 존자가 해 질 무렵 홀로 머물다 일어나 비구들을 불렀다 —
‘‘āyāmāvuso, yena devakatasobbho tenupasaṅkamissāma guhādassanāyā’’ti.
“벗들이여, 갑시다. 데와까따솝바가 있는 곳으로, 동굴을 보러 가겠습니다.”
‘‘Evamāvuso’’ti kho te bhikkhū āyasmato ānandassa paccassosuṃ.
“예, 벗이여” 하고 그 비구들이 아난다 존자께 대답했다.
Atha kho āyasmā ānando sambahulehi bhikkhūhi saddhiṃ yena devakatasobbho tenupasaṅkami.
그때 아난다 존자가 여러 비구와 함께 데와까따솝바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유행자 산다카는 큰 무리와 함께 앉아 있었다. 무리는 시끌벅적하게 높고 큰 소리로 온갖 부질없는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임금 이야기, 도둑 이야기, 대신 이야기, 군대 이야기, 무서운 일 이야기, 전쟁 이야기가 오갔다. 먹을 것, 마실 것, 옷, 잠자리, 꽃다발, 향 이야기도 있었다. 친척, 탈것, 마을, 읍, 도시, 지방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여자 이야기, 영웅 이야기, 골목 이야기, 우물가 이야기, 죽은 이들 이야기도 나왔다. 끝으로 가지가지 잡다한 이야기, 세상 이야기, 바다 이야기, 이러니저러니 있다 없다 하는 이야기 따위였다.
Tena kho pana samayena sandako paribbājako mahatiyā paribbājakaparisāya saddhiṃ nisinno hoti unnādiniyā uccāsaddamahāsaddāya anekavihitaṃ tiracchānakathaṃ kathentiyā, seyyathidaṃ –
그때 산다까 유행자는 유행자들의 큰 무리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 무리는 왁자지껄 높은 소리로 크게 떠들며 갖가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곧 이런 것들이다 —
rājakathaṃ corakathaṃ mahāmattakathaṃ senākathaṃ bhayakathaṃ yuddhakathaṃ annakathaṃ pānakathaṃ vatthakathaṃ sayanakathaṃ mālākathaṃ gandhakathaṃ ñātikathaṃ yānakathaṃ gāmakathaṃ nigamakathaṃ nagarakathaṃ janapadakathaṃ itthikathaṃ sūrakathaṃ visikhākathaṃ kumbhaṭṭhānakathaṃ pubbapetakathaṃ nānattakathaṃ lokakkhāyikaṃ samuddakkhāyikaṃ itibhavābhavakathaṃ iti vā.
왕 이야기, 도둑 이야기, 대신 이야기, 군대 이야기, 두려움 이야기, 전쟁 이야기, 음식 이야기, 마실 것 이야기, 옷 이야기, 잠자리 이야기, 화환 이야기, 향 이야기, 친척 이야기, 수레 이야기, 마을 이야기, 읍내 이야기, 도시 이야기, 지방 이야기, 여자 이야기, 영웅 이야기, 거리 이야기, 우물가 이야기, 죽은 이들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이렇게 되니 저렇게 되니 하는 있음과 없음 이야기, 이런 것들이다.
산다카는 존자 아난다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기 무리를 조용히 시켰다. "여러분, 조용히 하시오.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사문 고타마의 제자인 사문 아난다가 오고 있소. 코삼비에 머무는 사문 고타마의 제자들 가운데 이분도 한 사람이오. 그분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오. 조용하도록 길든 분들이고, 조용함을 찬탄하는 분들이오. 우리가 조용한 무리임을 알면 어쩌면 가까이 다가와 줄지도 모르오." 그러자 유행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Addasā kho sandako paribbājako āyasmantaṃ ānandaṃ dūratova āgacchantaṃ.
산다까 유행자는 아난다 존자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았다.
Disvāna sakaṃ parisaṃ saṇṭhāpesi –
보고서 자기 무리를 조용히 시켰다 —
‘‘appasaddā bhonto hontu, mā bhonto saddamakattha;
“존자들이여, 조용히 하십시오. 존자들이여,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ayaṃ samaṇassa gotamassa sāvako āgacchati samaṇo ānando.
사문 고따마의 제자인 사문 아난다가 오고 있습니다.
Yāvatā kho pana samaṇassa gotamassa sāvakā kosambiyaṃ paṭivasanti, ayaṃ tesaṃ aññataro samaṇo ānando.
꼬삼비에 머무는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 가운데, 이 사문 아난다가 바로 그들 중 한 분입니다.
Appasaddakāmā kho pana te āyasmanto appasaddavinītā appasaddassa vaṇṇavādino;
그 존자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조용하도록 길들여졌으며, 조용함을 칭찬합니다.
appeva nāma appasaddaṃ parisaṃ viditvā upasaṅkamitabbaṃ maññeyyā’’ti.
무리가 조용한 것을 알면 다가올 만하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Atha kho te paribbājakā tuṇhī ahesuṃ.
그러자 그 유행자들은 조용해졌다.
224
존자 아난다는 유행자 산다카에게 다가갔다. 산다카가 말했다. "아난다 존자님,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존자님께서 이곳까지 걸음을 해 주신 것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앉으십시오, 아난다 존자님. 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존자 아난다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산다카도 낮은 자리 하나를 가져다 한쪽에 앉았다.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sandako paribbājako tenupasaṅkami.
그때 아난다 존자가 산다까 유행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Atha kho sandako paribbājako āyasmantaṃ ānandaṃ etadavoca –
그러자 산다까 유행자가 아난다 존자께 이렇게 말했다 —
‘‘etu kho bhavaṃ ānando, svāgataṃ bhoto ānandassa.
“아난다 존자께서는 오십시오. 아난다 존자를 환영합니다.
Cirassaṃ kho bhavaṃ ānando imaṃ pariyāyamakāsi yadidaṃ idhāgamanāya.
아난다 존자께서 오랜만에 이렇게 걸음을 내셨습니다. 곧 이리로 오시는 일 말입니다.
Nisīdatu bhavaṃ ānando, idamāsanaṃ paññatta’’nti.
아난다 존자께서는 앉으십시오. 이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Nisīdi kho āyasmā ānando paññatte āsane.
아난다 존자께서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Sandakopi kho paribbājako aññataraṃ nīcaṃ āsanaṃ gahetvā ekamantaṃ nisīdi.
산다까 유행자도 어떤 낮은 자리를 잡아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산다카에게 존자 아난다가 물었다. "산다카여, 그대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모여 앉아 있었는가? 하다가 만 이야기는 무엇인가?" 산다카가 대답했다. "아난다 존자님, 저희가 모여 앉아 하던 이야기는 접어 두십시오. 그 이야기는 존자님께서 나중에라도 들으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보다 존자님의 스승께서 가르치신 법을 들려주십시오. 그러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산다카여, 잘 듣고 마음에 새겨 두라.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존자님." 산다카는 존자 아난다에게 대답했다. 존자 아난다가 말했다.
Ekamantaṃ nisinnaṃ kho sandakaṃ paribbājakaṃ āyasmā ānando etadavoca –
한쪽에 앉은 산다까 유행자에게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말했다 —
‘‘kāyanuttha, sandaka, etarahi kathāya sannisinnā, kā ca pana vo antarākathā vippakatā’’ti?
“산다까여, 그대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로 여기 모여 앉아 있었는가? 또 그대들이 하다 만 이야기는 무엇인가?”
‘‘Tiṭṭhatesā, bho ānanda, kathā yāya mayaṃ etarahi kathāya sannisinnā.
“아난다 존자시여, 저희가 지금 모여 앉아 나누던 그 이야기는 그대로 두십시오.
Nesā bhoto ānandassa kathā dullabhā bhavissati pacchāpi savanāya.
그 이야기는 아난다 존자께서 나중에라도 들으시기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Sādhu vata bhavantaṃyeva ānandaṃ paṭibhātu sake ācariyake dhammīkathā’’ti.
부디 바로 아난다 존자께 자기 스승의 전통에 관한 법담이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Tena hi, sandaka, suṇāhi, sādhukaṃ manasi karohi, bhāsissāmī’’ti.
“그렇다면 산다까여, 잘 들어라, 마음을 잘 기울여라. 이제 말하리라.”
‘‘Evaṃ bho’’ti kho sandako paribbājako āyasmato ānandassa paccassosi.
“예, 존자시여” 하고 산다까 유행자가 아난다 존자께 대답했다.
Āyasmā ānando etadavoca –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말했다 —
"산다카여,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청정한 수행을 지킬 수 없는 삶이 네 가지 있다.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없는 청정한 수행도 네 가지 있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곳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난다 존자님, 알고 보시는 분이신 세존께서 말씀하신 그 네 가지 삶은 무엇입니까?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cattārome,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abrahmacariyavāsā akkhātā cattāri ca anassāsikāni brahmacariyāni akkhātāni,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산다까여,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이 네 가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을 밝히셨고, 또 네 가지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을 밝히셨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Katame pana te, bho ānand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o abrahmacariyavāsā akkhātā,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아난다 존자시여, 그러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그 네 가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란 무엇입니까?”
225
산다카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다. 선하고 악한 행위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아 직접 깨닫고 알려 주는 이는 없다. 바르게 나아가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도 세상에 없다. 이 사람은 네 가지 큰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죽으면 땅은 땅의 몸으로, 물은 물의 몸으로, 불은 불의 몸으로,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돌아간다. 감각기관들은 허공으로 옮겨 간다. 상여를 다섯째로 삼아 네 사람이 시신을 메고 간다.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발자국만 보일 뿐이다. 뼈는 잿빛 비둘기 색이 되고, 제물은 재가 되고 만다. 보시란 어리석은 자들이 내세운 것일 뿐이다. 사후의 삶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의 말은 모두 텅 비고 거짓된 헛소리다. 어리석은 이도 지혜로운 이도 몸이 무너지면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없다.’[불확실]
‘‘Idha, sandaka, ekacco satthā evaṃvādī hoti evaṃdiṭṭhi –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natthi dinnaṃ, natthi yiṭṭhaṃ, natthi hutaṃ, n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natthi ayaṃ loko, natthi paroloko, natthi mātā, natthi pitā,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ṃ parañ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i.
‘보시도 없고, 공양도 없고, 헌공도 없으며, 잘하고 잘못한 행위의 결실도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나아가고 바르게 실천하여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완전히 알고 실현하여 알려 주는 사문·바라문도 없다.
Cātumahābhūtiko ayaṃ puriso yadā kālaṅkaroti, pathavī pathavī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āpo āpo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tejo tejo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vāyo vāyo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ākāsaṃ indriyāni saṅkamanti.
이 사람은 네 가지 큰 요소로 이루어졌으니, 죽을 때 땅은 땅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고, 물은 물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고, 불은 불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고, 바람은 바람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며, 기능들은 허공으로 옮겨 간다.
Āsandipañcamā purisā mataṃ ādāya gacchanti, yāvāḷāhanā padāni paññāyanti.
상여를 다섯째로 삼은 사람들이 주검을 메고 가고,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발자국이 드러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Kāpotakāni aṭṭhīni bhavanti.
뼈는 잿빛 비둘기 색이 된다.
Bhassantā āhutiyo;
제물은 재로 끝난다.
dattupaññattaṃ yadidaṃ dānaṃ.
보시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지어낸 것이다.
Tesaṃ tucchā musā vilāpo ye keci atthikavādaṃ vadanti.
누구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말은 공허하고 거짓되고 헛소리다.
Bāle ca paṇḍite ca kāyassa bhedā ucchijjanti vinassanti na honti paraṃ maraṇā’ti.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몸이 무너지면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없다.’
산다카여, 이때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졌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다. 선하고 악한 행위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알아 직접 깨닫고 알려 주는 이는 없다. 바르게 나아가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도 세상에 없다. 이 사람은 네 가지 큰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죽으면 땅은 땅의 몸으로, 물은 물의 몸으로, 불은 불의 몸으로,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돌아간다. 감각기관들은 허공으로 옮겨 간다. 상여를 다섯째로 삼아 네 사람이 시신을 메고 간다.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발자국만 보일 뿐이다. 뼈는 잿빛 비둘기 색이 되고, 제물은 재가 되고 만다. 보시란 어리석은 자들이 내세운 것일 뿐이다. 사후의 삶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의 말은 모두 텅 비고 거짓된 헛소리다. 어리석은 이도 지혜로운 이도 몸이 무너지면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없다.’[불확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산다까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evaṃvādī evaṃdiṭṭhi –
‘이 존경하는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natthi dinnaṃ, natthi yiṭṭhaṃ, natthi hutaṃ, n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natthi ayaṃ loko, natthi paroloko, natthi mātā, natthi pitā,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ca lokaṃ parañca lok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i.
보시도 없고, 공양도 없고, 헌공도 없으며, 잘하고 잘못한 행위의 결실도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홀연히 태어나는 중생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나아가고 바르게 실천하여 이 세상과 저세상을 스스로 완전히 알고 실현하여 알려 주는 사문·바라문도 없다.
Cātumahābhūtiko ayaṃ puriso yadā kālaṅkaroti, pathavī pathavī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āpo āpo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tejo tejo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vāyo vāyokāyaṃ anupeti anupagacchati, ākāsaṃ indriyāni saṅkamanti.
이 사람은 네 가지 큰 요소로 이루어졌으니, 죽을 때 땅은 땅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고, 물은 물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고, 불은 불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고, 바람은 바람 무리로 돌아가 들어가며, 기능들은 허공으로 옮겨 간다.
Āsandipañcamā purisā mataṃ ādāya gacchanti, yāvāḷāhanā padāni paññāyanti.
상여를 다섯째로 삼은 사람들이 주검을 메고 가고,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발자국이 드러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Kāpotakāni aṭṭhīni bhavanti.
뼈는 잿빛 비둘기 색이 된다.
Bhassantā āhutiyo;
제물은 재로 끝난다.
dattupaññattaṃ yadidaṃ dānaṃ.
보시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지어낸 것이다.
Tesaṃ tucchā musā vilāpo ye keci atthikavādaṃ vadanti.
누구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말은 공허하고 거짓되고 헛소리다.
Bāle ca paṇḍite ca kāyassa bhedā ucchijjanti vinassanti na honti paraṃ maraṇā’ti.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몸이 무너지면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없다.’
만약 이 스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한 것이 된다. 수행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수행한 것이 된다. 우리 둘은 이 점에서 똑같이 사문의 목표에 이른 셈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둘 다 몸이 무너지면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스승에게는 벌거벗기, 삭발, 쪼그려 앉아 애쓰기,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을 뿐이다. 나는 아들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잠을 자고, 카시의 전단향을 쓴다. 꽃다발과 향과 향유로 몸을 꾸미고, 금과 은도 받는다. 그러면서도 이 스승과 똑같은 곳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세를 위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서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겠는가? ‘이것은 청정한 수행을 지킬 수 없는 삶이다.’ 이렇게 알고서 그는 그 수행에 염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 산다카여, 이것이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신 첫째 삶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거기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Sace imassa bhoto satthuno saccaṃ vacanaṃ, akatena me ettha kataṃ, avusitena me ettha vusitaṃ.
만일 이 존경하는 스승의 말이 참이라면, 나는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살지 않고도 산 것이 된다.
Ubhopi mayaṃ ettha samasamā sāmaññaṃ pattā, yo cāhaṃ na vadāmi ‘ubho kāyassa bhedā ucchijjissāma, vinassissāma, na bhavissāma paraṃ maraṇā’ti.
우리 둘 다 여기서 똑같이 사문됨에 이른 것이다. 나로 말하면 ‘둘 다 몸이 무너지면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Atirekaṃ kho panimassa bhoto satthuno naggiyaṃ muṇḍiyaṃ ukkuṭikappadhānaṃ kesamassulocanaṃ yohaṃ puttasambādhasayanaṃ ajjhāvasanto kāsikacandanaṃ paccanubhonto mālāgandhavilepanaṃ dhārento jātarūparajataṃ sādiyanto iminā bhotā satthārā samasamagatiko bhavissāmi.
그런데 이 존경하는 스승에게는 벌거벗음, 머리 깎음, 쭈그려 앉는 정진,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다. 자식들로 북적이는 집에 살고, 까시산 전단향을 누리고, 화환과 향과 바르는 향을 지니고, 금과 은을 받는 나조차 이 존경하는 스승과 똑같은 갈 곳에 이를 것이다.
Abhisamparāyaṃ sohaṃ kiṃ jānanto kiṃ passanto imasmiṃ satthari brahmacariyaṃ carissāmi?
다음 생을 두고,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는가?
‘So abrahmacariyavāso aya’nti –
‘이것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난다.
Ay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paṭhamo abrahmacariyavāso akkhāto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첫 번째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226
산다카여, 다시 또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다. ‘직접 하거나 시키거나, 베거나 베게 하거나, 지지거나 지지게 하거나 해도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슬프게 하거나 만들거나, 지치게 하거나 만들거나, 떨게 하거나 만들어도 역시 그렇다.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담을 허물고, 약탈하는 사람에게도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한 집을 통째로 털거나, 길목을 지키고 서 있거나, 남의 아내에게 가거나, 거짓말을 해도 그렇다. 날이 면도날 같은 바퀴로 땅의 생명들을 한 덩이 고기, 한 무더기 고기로 만든다 해도 악은 없다. 악이 닥치는 일도 없다. 갠지스 강 남쪽 기슭에서 죽이고 죽이게 하며, 베고 베게 하며, 지지고 지지게 해도 악은 없다. 악이 닥치는 일도 없다. 갠지스 강 북쪽 기슭에서 베풀고 베풀게 하며, 제사 지내고 제사 지내게 해도 공덕은 없다. 공덕이 닥치는 일도 없다. 베풂으로도, 자기 다스림으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은 없고 공덕이 닥치는 일도 없다.’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evaṃvādī hoti evaṃdiṭṭhi –
“산다까여, 또한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y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ṃ ādiyato sandhiṃ chindato nillopaṃ harato ekāgārikaṃ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ṃ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na karīyati pāpaṃ.
‘행하고 행하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지지고 지지게 하고, 슬프게 하고 슬프게 하게 하고, 지치게 하고 지치게 하게 하고, 떨게 하고 떨게 하게 하고, 산목숨을 죽이게 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담을 뚫고, 약탈해 가고, 외딴집을 털고, 길목에 서서 지키고, 남의 아내에게 가고, 거짓을 말하더라도,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ṃ maṃsakhalaṃ ekaṃ maṃsapuñjaṃ kareyya, natthi tatonidānaṃ pāpaṃ, natthi pāpassa āgamo.
면도날처럼 날 선 바퀴로 이 땅의 생명들을 하나의 고깃덩이, 하나의 고깃더미로 만든다 해도, 그로 말미암은 악은 없고, 악이 돌아옴도 없다.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ṃ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acāpento, natthi tatonidānaṃ pāpaṃ, natthi pāpassa āgamo.
갠지스 강 남쪽 기슭으로 가서 죽이고 죽이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지지고 지지게 한다 해도, 그로 말미암은 악은 없고, 악이 돌아옴도 없다.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ṃ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natthi tatonidānaṃ puññaṃ, natthi puññassa āgamo.
갠지스 강 북쪽 기슭으로 가서 보시하고 보시하게 하고, 제사 지내고 제사 지내게 한다 해도, 그로 말미암은 공덕은 없고, 공덕이 돌아옴도 없다.
Dānena damena saṃ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ṃ, natthi puññassa āgamo’ti.
보시로도, 길들임으로도, 절제로도, 진실을 말함으로도 공덕은 없고, 공덕이 돌아옴도 없다.’
산다카여, 이때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졌다. 직접 하거나 시키거나, 베거나 베게 하거나, 지지거나 지지게 하거나 해도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슬프게 하거나 만들거나, 지치게 하거나 만들거나, 떨게 하거나 만들어도 역시 그렇다.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담을 허물고, 약탈하는 사람에게도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 한 집을 통째로 털거나, 길목을 지키고 서 있거나, 남의 아내에게 가거나, 거짓말을 해도 그렇다. 날이 면도날 같은 바퀴로 땅의 생명들을 한 덩이 고기, 한 무더기 고기로 만든다 해도 악은 없다. 악이 닥치는 일도 없다. 갠지스 강 남쪽 기슭에서 죽이고 죽이게 하며, 베고 베게 하며, 지지고 지지게 해도 악은 없다. 악이 닥치는 일도 없다. 갠지스 강 북쪽 기슭에서 베풀고 베풀게 하며, 제사 지내고 제사 지내게 해도 공덕은 없다. 공덕이 닥치는 일도 없다. 베풂으로도, 자기 다스림으로도, 절제로도, 진실한 말로도 공덕은 없고 공덕이 닥치는 일도 없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산다까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evaṃvādī evaṃdiṭṭhi –
‘이 존경하는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karoto kārayato chindato chedāpayato pacato pācāpayato socato socāpayato kilamato kilamāpayato phandato phandāpayato pāṇamatipātayato adinnaṃ ādiyato sandhiṃ chindato nillopaṃ harato ekāgārikaṃ karoto paripanthe tiṭṭhato paradāraṃ gacchato musā bhaṇato karoto na karīyati pāpaṃ khurapariyantena cepi cakkena yo imissā pathaviyā pāṇe ekaṃ maṃsakhalaṃ ekaṃ maṃsapuñjaṃ kareyya, natthi tatonidānaṃ pāpaṃ, natthi pāpassa āgamo.
행하고 행하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지지고 지지게 하고, 슬퍼하고 슬프게 하고, 지치게 하고 지치게 하게 하고, 떨게 하고 떨게 하게 하고, 산목숨을 죽이게 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담을 뚫고, 약탈해 가고, 외딴집을 털고, 길목에 서서 지키고, 남의 아내에게 가고, 거짓을 말하더라도, 행하는 자에게 악은 지어지지 않으며, 면도날처럼 날 선 바퀴로 이 땅의 생명들을 하나의 고깃덩이, 하나의 고깃더미로 만든다 해도, 그로 말미암은 악은 없고, 악이 돌아옴도 없다.
Dakkhiṇañcepi gaṅgāya tīraṃ gaccheyya hananto ghātento chindanto chedāpento pacanto pacāpento, natthi tatonidānaṃ pāpaṃ, natthi pāpassa āgamo.
갠지스 강 남쪽 기슭으로 가서 죽이고 죽이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지지고 지지게 한다 해도, 그로 말미암은 악은 없고, 악이 돌아옴도 없다.
Uttarañcepi gaṅgāya tīraṃ gaccheyya dadanto dāpento yajanto yajāpento, natthi tatonidānaṃ puññaṃ, natthi puññassa āgamo.
갠지스 강 북쪽 기슭으로 가서 보시하고 보시하게 하고, 제사 지내고 제사 지내게 한다 해도, 그로 말미암은 공덕은 없고, 공덕이 돌아옴도 없다.
Dānena damena saṃyamena saccavajjena natthi puññaṃ, natthi puññassa āgamo’ti.
보시로도, 길들임으로도, 절제로도, 진실을 말함으로도 공덕은 없고, 공덕이 돌아옴도 없다.’
만약 이 스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한 것이 된다. 수행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수행한 것이 된다. 우리 둘은 이 점에서 똑같이 사문의 목표에 이른 셈이다. 그런데 나는 ‘일을 저지르는 두 사람에게도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스승에게는 벌거벗기, 삭발, 쪼그려 앉아 애쓰기,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을 뿐이다. 나는 아들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잠을 자고, 카시의 전단향을 쓴다. 꽃다발과 향과 향유로 몸을 꾸미고, 금과 은도 받는다. 그러면서도 이 스승과 똑같은 곳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세를 위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서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겠는가? ‘이것은 청정한 수행을 지킬 수 없는 삶이다.’ 이렇게 알고서 그는 그 수행에 염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 산다카여, 이것이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신 둘째 삶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거기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Sace imassa bhoto satthuno saccaṃ vacanaṃ, akatena me ettha kataṃ, avusitena me ettha vusitaṃ.
만일 이 존경하는 스승의 말이 참이라면, 나는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살지 않고도 산 것이 된다.
Ubhopi mayaṃ ettha samasamā sāmaññaṃ pattā, yo cāhaṃ na vadāmi ‘ubhinnaṃ kurutaṃ na karīyati pāpa’nti.
우리 둘 다 여기서 똑같이 사문됨에 이른 것이다. 나로 말하면 ‘둘이 행하더라도 악은 지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Atirekaṃ kho panimassa bhoto satthuno naggiyaṃ muṇḍiyaṃ ukkuṭikappadhānaṃ kesamassulocanaṃ yohaṃ puttasambādhasayanaṃ ajjhāvasanto kāsikacandanaṃ paccanubhonto mālāgandhavilepanaṃ dhārento jātarūparajataṃ sādiyanto iminā bhotā satthārā samasamagatiko bhavissāmi.
그런데 이 존경하는 스승에게는 벌거벗음, 머리 깎음, 쭈그려 앉는 정진,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다. 자식들로 북적이는 집에 살고, 까시산 전단향을 누리고, 화환과 향과 바르는 향을 지니고, 금과 은을 받는 나조차 이 존경하는 스승과 똑같은 갈 곳에 이를 것이다.
Abhisamparāyaṃ sohaṃ kiṃ jānanto kiṃ passanto imasmiṃ satthari brahmacariyaṃ carissāmi?
다음 생을 두고,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는가?
‘So abrahmacariyavāso aya’nti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것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라고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난다.
Ay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dutiyo abrahmacariyavāso akkhāto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두 번째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227
산다카여, 다시 또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다. ‘중생이 오염되는 데에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중생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 중생이 깨끗해지는 데에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다. 중생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깨끗해진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사람의 기력도 없고, 사람의 노력도 없다. 모든 중생,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고 힘이 없고 정진이 없다. 그래서 운명과 환경과 본성에 따라 바뀌면서, 여섯 부류의 태생 안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을 뿐이다.’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evaṃvādī hoti evaṃdiṭṭhi –
“산다까여, 또한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ṃ saṃkilesāya;
‘중생들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ahetū appaccayā sattā saṃkilissanti;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중생들은 오염된다.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ṃ visuddhiyā;
중생들이 깨끗해지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ahetū 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중생들은 깨끗해진다.
natthi balaṃ, natthi vīriyaṃ, natthi purisathāmo, natthi purisaparakkamo;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사람의 기력도 없고, 사람의 분발도 없다.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īriyā niyatisaṅgatibhāvapariṇatā chasvevābhijātīsu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entī’ti.
모든 중생, 모든 목숨붙이, 모든 존재, 모든 목숨은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힘도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우연과 본성에 따라 달라지면서 여섯 가지 태생 안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는다.’
산다카여, 이때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졌다. 중생이 오염되는 데에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중생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오염된다. 중생이 깨끗해지는 데에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다. 중생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깨끗해진다.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사람의 기력도 없고, 사람의 노력도 없다. 모든 중생, 모든 생명, 모든 존재, 모든 영혼은 자유가 없고 힘이 없고 정진이 없다. 그래서 운명과 환경과 본성에 따라 바뀌면서, 여섯 부류의 태생 안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을 뿐이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산다까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evaṃvādī evaṃdiṭṭhi –
‘이 존경하는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ṃ saṃkilesāya, ahetū appaccayā sattā saṃkilissanti.
중생들이 오염되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중생들은 오염된다.
Natthi hetu natthi paccayo sattānaṃ visuddhiyā, ahetū appaccayā sattā visujjhanti.
중생들이 깨끗해지는 데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중생들은 깨끗해진다.
Natthi balaṃ, natthi vīriyaṃ, natthi purisathāmo, natthi purisaparakkamo,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sabbe jīvā avasā abalā avīriyā niyatisaṅgatibhāvapariṇatā chasvevābhijātīsu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entī’ti.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사람의 기력도 없고, 사람의 분발도 없으며, 모든 중생, 모든 목숨붙이, 모든 존재, 모든 목숨은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힘도 없고 정진도 없이, 운명과 우연과 본성에 따라 달라지면서 여섯 가지 태생 안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는다.’
만약 이 스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한 것이 된다. 수행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수행한 것이 된다. 우리 둘은 이 점에서 똑같이 사문의 목표에 이른 셈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둘 다 원인 없이 조건 없이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 스승에게는 벌거벗기, 삭발, 쪼그려 앉아 애쓰기,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을 뿐이다. 나는 아들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잠을 자고, 카시의 전단향을 쓴다. 꽃다발과 향과 향유로 몸을 꾸미고, 금과 은도 받는다. 그러면서도 이 스승과 똑같은 곳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세를 위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서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겠는가? ‘이것은 청정한 수행을 지킬 수 없는 삶이다.’ 이렇게 알고서 그는 그 수행에 염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 산다카여, 이것이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신 셋째 삶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거기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Sace imassa bhoto satthuno saccaṃ vacanaṃ, akatena me ettha kataṃ, avusitena me ettha vusitaṃ.
만일 이 존경하는 스승의 말이 참이라면, 나는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살지 않고도 산 것이 된다.
Ubhopi mayaṃ ettha samasamā sāmaññaṃ pattā, yo cāhaṃ na vadāmi ‘ubho ahetū appaccayā visujjhissāmā’ti.
우리 둘 다 여기서 똑같이 사문됨에 이른 것이다. 나로 말하면 ‘둘 다 원인 없이 조건 없이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Atirekaṃ kho panimassa bhoto satthuno naggiyaṃ muṇḍiyaṃ ukkuṭikappadhānaṃ kesamassulocanaṃ yohaṃ puttasambādhasayanaṃ ajjhāvasanto kāsikacandanaṃ paccanubhonto mālāgandhavilepanaṃ dhārento jātarūparajataṃ sādiyanto iminā bhotā satthārā samasamagatiko bhavissāmi.
그런데 이 존경하는 스승에게는 벌거벗음, 머리 깎음, 쭈그려 앉는 정진,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다. 자식들로 북적이는 집에 살고, 까시산 전단향을 누리고, 화환과 향과 바르는 향을 지니고, 금과 은을 받는 나조차 이 존경하는 스승과 똑같은 갈 곳에 이를 것이다.
Abhisamparāyaṃ sohaṃ kiṃ jānanto kiṃ passanto imasmiṃ satthari brahmacariyaṃ carissāmi?
다음 생을 두고,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는가?
‘So abrahmacariyavāso aya’nti –
‘이것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난다.
Ay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tatiyo abrahmacariyavāso akkhāto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세 번째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228
산다카여, 다시 또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다.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진 방식도 없다. 창조되지 않았고, 창조하게 한 이도 없다.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산꼭대기처럼 우뚝하며, 성문의 기둥처럼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서로에게 즐거움이나 괴로움, 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줄 힘이 없다. 어떤 일곱인가? 땅의 무리, 물의 무리, 불의 무리, 바람의 무리, 그리고 즐거움, 괴로움, 일곱째로 생명이다.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진 방식도 없다. 창조되지 않았고, 창조하게 한 이도 없다.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산꼭대기처럼 우뚝하며, 성문의 기둥처럼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서로에게 즐거움이나 괴로움, 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줄 힘이 없다.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죽이게 하는 자도 없다. 듣는 자도 듣게 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알게 하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베는 이가 있어도 누구도 누구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칼은 그저 일곱 무리 사이의 틈새로 지나갈 뿐이다. 또한 주된 모태가 백사십만, 다시 육천, 다시 육백이 있다. 업은 오백 가지, 다섯 가지, 세 가지가 있고, 온전한 업과 반쪽 업이 있다. 예순두 가지 길, 예순두 개의 중간 겁, 여섯 부류의 태생, 여덟 가지 사람의 단계가 있다. 사천구백 가지 생계 수단, 사천구백 유행자, 사천구백 용의 거처가 있다. 이천 가지 기능, 삼천 지옥, 서른여섯 가지 먼지의 요소도 있다. 생각이 있는 태 일곱, 생각이 없는 태 일곱, 니간타의 태 일곱이 있다. 신 일곱, 사람 일곱, 귀신 일곱, 호수 일곱, 매듭 일곱이 있다. 절벽 일곱, 절벽 칠백, 꿈 일곱, 꿈 칠백이 있고, 팔백사십만 대겁이 있다. 어리석은 이든 지혜로운 이든 이 모든 것을 달리고 윤회한 끝에야 괴로움의 끝을 낼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나는 이 계행이나 서원이나 고행이나 청정한 수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히겠다. 이미 익은 업은 겪어 가며 없애겠다’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되로 잰 듯 정해져 있고, 윤회는 끝이 지어져 있다. 그래서 줄어듦도 늘어남도 없고, 더함도 덜함도 없다.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 나가면서 굴러간다. 어리석은 이든 지혜로운 이든 달리고 윤회한 끝에야 괴로움의 끝을 낼 것이다.’[불확실]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evaṃvādī hoti evaṃdiṭṭhi –
“산다까여, 또한 여기 어떤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sattime kāyā akaṭā akaṭavidhā animmitā animmātā vañjhā kūṭaṭṭhā esikaṭṭhāyiṭṭhitā, te na iñjanti na vipariṇamanti na aññamaññaṃ byābādhenti nālaṃ aññamaññassa sukhāya vā dukkhāya vā sukhadukkhāya vā.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게 되지도 않았고, 지어지지 않았고, 지은 이도 없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꿈쩍 않고, 기둥처럼 굳게 서 있다.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달라지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으며,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즐거움과 괴로움도 줄 만하지 않다.
Katame satta?
일곱은 무엇인가?
Pathavīkāyo āpokāyo tejokāyo vāyokāyo sukhe dukkhe jīve sattame –
땅 무리, 물 무리, 불 무리, 바람 무리,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째로 목숨 —
ime sattakāyā akaṭā akaṭavidhā animmitā animmātā vañjhā kūṭaṭṭhā esikaṭṭhāyiṭṭhitā.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게 되지도 않았고, 지어지지 않았고, 지은 이도 없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꿈쩍 않고, 기둥처럼 굳게 서 있다.
Te na iñjanti na vipariṇamanti na aññamaññaṃ byābādhenti.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달라지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Nālaṃ aññamaññassa sukhāya vā dukkhāya vā sukhadukkhāya vā.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즐거움과 괴로움도 줄 만하지 않다.
Tattha natthi hantā vā ghātetā vā sotā vā sāvetā vā viññātā vā viññāpetā vā.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죽이게 하는 자도, 듣는 자도, 듣게 하는 자도, 아는 자도, 알게 하는 자도 없다.
Yopi tiṇhena satthena sīsaṃ chindati, na koci kañci jīvitā voropeti.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르는 자가 있어도, 누구도 누구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Sattannaṃtveva kāyānamantarena satthaṃ vivaramanupatati.
다만 일곱 무리 사이의 틈으로 칼이 지나갈 뿐이다.
Cuddasa kho panimāni yonipamukhasatasahassāni saṭṭhi ca satāni cha ca satāni pañca ca kammuno satāni pañca ca kammāni tīṇi ca kammāni, kamme ca aḍḍhakamme ca, dvaṭṭhipaṭipadā, dvaṭṭhantarakappā, chaḷābhijātiyo, aṭṭha purisabhūmiyo, ekūnapaññāsa ājīvakasate, ekūnapaññāsa paribbājakasate, ekūnapaññāsa nāgāvāsasate, vīse indriyasate, tiṃse nirayasate, chattiṃsa rajodhātuyo, satta saññīgabbhā, satta asaññīgabbhā, satta nigaṇṭhigabbhā, satta devā, satta mānusā, satta pesācā, satta sarā, satta pavuṭā, satta papātā, satta papātasatāni, satta supinā, satta supinasatāni, cullāsīti mahākappino satasahassāni, yāni bāle ca paṇḍite ca sandhāvitvā saṃsaritvā dukkhassantaṃ karissanti.
또한 이 백사십만 가지 으뜸가는 태생과, 육천과 육백과, 오백 가지 업과 다섯 가지 업과 세 가지 업과, 온전한 업과 반쪽 업과, 예순두 가지 도닦음과, 예순두 중간겁과, 여섯 가지 태생 등급과, 여덟 가지 사람의 자리와, 사천구백 아지위까와, 사천구백 유행자와, 사천구백 용의 거처와, 이천 가지 기능과, 삼천 가지 지옥과, 서른여섯 가지 티끌 요소와, 일곱 가지 인식 있는 태와, 일곱 가지 인식 없는 태와, 일곱 가지 마디에서 나는 태와, 일곱 신과, 일곱 인간과, 일곱 도깨비와, 일곱 호수와, 일곱 매듭과, 일곱 벼랑과, 칠백 벼랑과, 일곱 꿈과, 칠백 꿈과, 팔백사십만 대겁이 있으니,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이것들을 줄달음쳐 돌고 돌아 괴로움의 끝을 볼 것이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Tattha natthi imināhaṃ sīlena vā vatena vā tapena vā brahmacariyena vā aparipakkaṃ vā kammaṃ paripācessāmi, paripakkaṃ vā kammaṃ phussa phussa byantiṃ karissāmīti.
거기에는 ‘나는 이 계로, 이 서원으로, 이 고행으로, 이 청정한 삶으로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겠다, 익은 업은 닿는 대로 없애 버리겠다’ 하는 것이 없다.
Hevaṃ natthi doṇamite sukhadukkhe pariyantakate saṃsāre, natthi hāyanavaḍḍhane, natthi ukkaṃsāvakaṃse.
그런 것은 없으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되질하듯 정해져 있고 윤회는 끝이 그어져 있어, 줄거나 느는 일도 없고, 나아지거나 못해지는 일도 없다.
Seyyathāpi nāma suttaguḷe khitte nibbeṭhiyamānameva paleti, evameva bāle ca paṇḍite ca sandhāvitvā saṃsaritvā dukkhassantaṃ karissantī’ti.
마치 실뭉치를 던지면 풀리면서 굴러가듯이, 꼭 그처럼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줄달음쳐 돌고 돌아 괴로움의 끝을 볼 것이다.’
산다카여, 이때 슬기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스승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견해를 가졌다.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진 방식도 없다. 창조되지 않았고, 창조하게 한 이도 없다.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산꼭대기처럼 우뚝하며, 성문의 기둥처럼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서로에게 즐거움이나 괴로움, 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줄 힘이 없다. 어떤 일곱인가? 땅의 무리, 물의 무리, 불의 무리, 바람의 무리, 그리고 즐거움, 괴로움, 일곱째로 생명이다.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진 방식도 없다. 창조되지 않았고, 창조하게 한 이도 없다. 아무것도 낳지 못하고, 산꼭대기처럼 우뚝하며, 성문의 기둥처럼 굳건히 서 있다.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서로에게 즐거움이나 괴로움, 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줄 힘이 없다.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죽이게 하는 자도 없다. 듣는 자도 듣게 하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알게 하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베는 이가 있어도 누구도 누구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칼은 그저 일곱 무리 사이의 틈새로 지나갈 뿐이다. 또한 주된 모태가 백사십만, 다시 육천, 다시 육백이 있다. 업은 오백 가지, 다섯 가지, 세 가지가 있고, 온전한 업과 반쪽 업이 있다. 예순두 가지 길, 예순두 개의 중간 겁, 여섯 부류의 태생, 여덟 가지 사람의 단계가 있다. 사천구백 가지 생계 수단, 사천구백 유행자, 사천구백 용의 거처가 있다. 이천 가지 기능, 삼천 지옥, 서른여섯 가지 먼지의 요소도 있다. 생각이 있는 태 일곱, 생각이 없는 태 일곱, 니간타의 태 일곱이 있다. 신 일곱, 사람 일곱, 귀신 일곱, 호수 일곱, 매듭 일곱이 있다. 절벽 일곱, 절벽 칠백, 꿈 일곱, 꿈 칠백이 있고, 팔백사십만 대겁이 있다. 어리석은 이든 지혜로운 이든 이 모든 것을 달리고 윤회한 끝에야 괴로움의 끝을 낼 것이다. 그러니 거기서 ‘나는 이 계행이나 서원이나 고행이나 청정한 수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히겠다. 이미 익은 업은 겪어 가며 없애겠다’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되로 잰 듯 정해져 있고, 윤회는 끝이 지어져 있다. 그래서 줄어듦도 늘어남도 없고, 더함도 덜함도 없다.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 나가면서 굴러간다. 어리석은 이든 지혜로운 이든 달리고 윤회한 끝에야 괴로움의 끝을 낼 것이다.’[불확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산다까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evaṃvādī evaṃdiṭṭhi –
‘이 존경하는 스승은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다 —
sattime kāyā akaṭā akaṭavidhā animmitā animmātā vañjhā kūṭaṭṭhā esikaṭṭhāyiṭṭhitā.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게 되지도 않았고, 지어지지 않았고, 지은 이도 없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꿈쩍 않고, 기둥처럼 굳게 서 있다.
Te na iñjanti na vipariṇamanti na aññamaññaṃ byābādhenti.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달라지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Nālaṃ aññamaññassa sukhāya vā dukkhāya vā sukhadukkhāya vā.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즐거움과 괴로움도 줄 만하지 않다.
Katame satta?
일곱은 무엇인가?
Pathavīkāyo āpokāyo tejokāyo vāyokāyo sukhe dukkhe jīve sattame –
땅 무리, 물 무리, 불 무리, 바람 무리,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째로 목숨 —
ime satta kāyā akaṭā akaṭavidhā animmitā animmātā vañjhā kūṭaṭṭhā esikaṭṭhāyiṭṭhitā.
이 일곱 무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만들어지게 되지도 않았고, 지어지지 않았고, 지은 이도 없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꿈쩍 않고, 기둥처럼 굳게 서 있다.
Te na iñjanti na vipariṇamanti na aññamaññaṃ byābādhenti.
그것들은 흔들리지 않고, 달라지지 않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Nālaṃ aññamaññassa sukhāya vā dukkhāya vā sukhadukkhāya vā.
서로에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즐거움과 괴로움도 줄 만하지 않다.
Tattha natthi hantā vā ghātetā vā sotā vā sāvetā vā viññātā vā viññāpetā vā.
거기에는 죽이는 자도, 죽이게 하는 자도, 듣는 자도, 듣게 하는 자도, 아는 자도, 알게 하는 자도 없다.
Yopi tiṇhena satthena sīsaṃ chindati, na koci kañci jīvitā voropeti.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르는 자가 있어도, 누구도 누구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Sattannaṃtveva kāyānamantarena satthaṃ vivaramanupatati.
다만 일곱 무리 사이의 틈으로 칼이 지나갈 뿐이다.
Cuddasa kho panimāni yonipamukhasatasahassāni saṭṭhi ca satāni cha ca satāni pañca ca kammuno satāni pañca ca kammāni tīṇi ca kammāni, kamme ca aḍḍhakamme ca, dvaṭṭhipaṭipadā, dvaṭṭhantarakappā, chaḷābhijātiyo, aṭṭha purisabhūmiyo, ekūnapaññāsa ājīvakasate, ekūnapaññāsa paribbājakasate, ekūnapaññāsa nāgāvāsasate, vīse indriyasate, tiṃse nirayasate, chattiṃsa rajodhātuyo, satta saññīgabbhā, satta asaññīgabbhā, satta nigaṇṭhigabbhā, satta devā, satta mānusā, satta pesācā, satta sarā, satta pavuṭā, satta papātā, satta papātasatāni, satta supinā, satta supinasatāni, cullāsīti mahākappino satasahassāni, yāni bāle ca paṇḍite ca sandhāvitvā saṃsaritvā dukkhassantaṃ karissanti.
또한 이 백사십만 가지 으뜸가는 태생과, 육천과 육백과, 오백 가지 업과 다섯 가지 업과 세 가지 업과, 온전한 업과 반쪽 업과, 예순두 가지 도닦음과, 예순두 중간겁과, 여섯 가지 태생 등급과, 여덟 가지 사람의 자리와, 사천구백 아지위까와, 사천구백 유행자와, 사천구백 용의 거처와, 이천 가지 기능과, 삼천 가지 지옥과, 서른여섯 가지 티끌 요소와, 일곱 가지 인식 있는 태와, 일곱 가지 인식 없는 태와, 일곱 가지 마디에서 나는 태와, 일곱 신과, 일곱 인간과, 일곱 도깨비와, 일곱 호수와, 일곱 매듭과, 일곱 벼랑과, 칠백 벼랑과, 일곱 꿈과, 칠백 꿈과, 팔백사십만 대겁이 있으니,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이것들을 줄달음쳐 돌고 돌아 괴로움의 끝을 볼 것이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Tattha natthi imināhaṃ sīlena vā vatena vā tapena vā brahmacariyena vā aparipakkaṃ vā kammaṃ paripācessāmi, paripakkaṃ vā kammaṃ phussa phussa byantiṃ karissāmīti, hevaṃ natthi doṇamite sukhadukkhe pariyantakate saṃsāre, natthi hāyanavaḍḍhane, natthi ukkaṃsāvakaṃse.
거기에는 ‘나는 이 계로, 이 서원으로, 이 고행으로, 이 청정한 삶으로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겠다, 익은 업은 닿는 대로 없애 버리겠다’ 하는 것이 없다. 그런 것은 없으니, 즐거움과 괴로움은 되질하듯 정해져 있고 윤회는 끝이 그어져 있어, 줄거나 느는 일도 없고, 나아지거나 못해지는 일도 없다.
Seyyathāpi nāma suttaguḷe khitte nibbeṭhiyamānameva paleti, evameva bāle ca paṇḍite ca sandhāvitvā saṃsaritvā dukkhassantaṃ karissantī’ti.
마치 실뭉치를 던지면 풀리면서 굴러가듯이, 꼭 그처럼 미련한 자든 슬기로운 자든 줄달음쳐 돌고 돌아 괴로움의 끝을 볼 것이다.’
만약 이 스승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한 것이 된다. 수행하지 않고도 이 점에서는 수행한 것이 된다. 우리 둘은 이 점에서 똑같이 사문의 목표에 이른 셈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 둘 다 달리고 윤회한 끝에 괴로움의 끝을 낼 것이다’라고 말이다. 게다가 이 스승에게는 벌거벗기, 삭발, 쪼그려 앉아 애쓰기,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을 뿐이다. 나는 아들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잠을 자고, 카시의 전단향을 쓴다. 꽃다발과 향과 향유로 몸을 꾸미고, 금과 은도 받는다. 그러면서도 이 스승과 똑같은 곳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세를 위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서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하겠는가? ‘이것은 청정한 수행을 지킬 수 없는 삶이다.’ 이렇게 알고서 그는 그 수행에 염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 산다카여, 이것이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신 넷째 삶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거기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Sace pana imassa bhoto satthuno saccaṃ vacanaṃ, akatena me ettha kataṃ, avusitena me ettha vusitaṃ.
그런데 만일 이 존경하는 스승의 말이 참이라면, 나는 여기서 하지 않고도 한 것이 되고, 살지 않고도 산 것이 된다.
Ubhopi mayaṃ ettha samasamā sāmaññaṃ pattā, yo cāhaṃ na vadāmi.
우리 둘 다 여기서 똑같이 사문됨에 이른 것이다. 나로 말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Ubho sandhāvitvā saṃsaritvā dukkhassantaṃ karissāmā’ti.
‘둘 다 줄달음쳐 돌고 돌아 괴로움의 끝을 볼 것이다’라고.
Atirekaṃ kho panimassa bhoto satthuno naggiyaṃ muṇḍiyaṃ ukkuṭikappadhānaṃ kesamassulocanaṃ yohaṃ puttasambādhasayanaṃ ajjhāvasanto kāsikacandanaṃ paccanubhonto mālāgandhavilepanaṃ dhārento jātarūparajataṃ sādiyanto iminā bhotā satthārā samasamagatiko bhavissāmi.
그런데 이 존경하는 스승에게는 벌거벗음, 머리 깎음, 쭈그려 앉는 정진, 머리털과 수염 뽑기가 더 있다. 자식들로 북적이는 집에 살고, 까시산 전단향을 누리고, 화환과 향과 바르는 향을 지니고, 금과 은을 받는 나조차 이 존경하는 스승과 똑같은 갈 곳에 이를 것이다.
Abhisamparāyaṃ sohaṃ kiṃ jānanto kiṃ passanto imasmiṃ satthari brahmacariyaṃ carissāmi?
다음 생을 두고,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아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는가?
‘So abrahmacariyavāso aya’nti –
‘이것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난다.
Ay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uttho abrahmacariyavāso akkhāto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네 번째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산다카여, 이것들이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삶이다.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거기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Ime kho te,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o abrahmacariyavāsā akkhātā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산다까여, 이것들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네 가지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다.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님. 희한한 일입니다, 아난다 존자님!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셨군요.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청정한 수행을 하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 네 가지는 실제로 청정한 수행을 지킬 수 없는 삶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군요. 그렇다면 아난다 존자님, 세존께서 말씀하신 위안 없는 청정한 수행 네 가지는 무엇입니까?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수행은 하며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바른 이치와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Acchariyaṃ, bho ānanda, abbhutaṃ, bho ānanda!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신기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Yāvañcidaṃ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o abrahmacariyavāsāva samānā ‘abrahmacariyavāsā’ti akkhātā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네 가지가 실로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인 것을 ‘청정한 삶이 아닌 삶’이라고 밝히셨으니, 거기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Katamāni pana tāni, bho ānand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i anassāsikāni brahmacariyāni akkhātāni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아난다 존자시여, 그러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신 그분 세존께서 밝히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살더라도 바른 이치인 유익한 법을 이루지 못할, 그 네 가지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229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이 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앎과 봄이 남김없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걷거나 서 있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앎과 봄이 언제나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 있다.’
‘‘Idha, sandaka, ekacco satthā sabbaññū sabbadassāvī aparisesaṃ ñāṇadassanaṃ paṭijānāti –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모든 것을 아는 자이고 모든 것을 보는 자여서 남김없는 앎과 봄을 자처한다 —
‘carato ca me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ñāṇadassanaṃ paccupaṭṭhita’nti.
‘걷거나 서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내게는 앎과 봄이 늘 한결같이 나타나 있다’고.
그런데 이 스승은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개에게 물리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나 사나운 말, 사나운 황소와 마주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의 이름과 성을 묻기도 하고, 마을과 읍의 이름과 길을 묻기도 한다.
So suññampi agāraṃ pavisati, piṇḍampi na labhati, kukkuropi ḍaṃsati, caṇḍenapi hatthinā samāgacchati, caṇḍenapi assena samāgacchati, caṇḍenapi goṇena samāgacchati, itthiyāpi purisassapi nāmampi gottampi pucchati, gāmassapi nigamassapi nāmampi maggampi pucchati.
그런데 그는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가 물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와 마주치기도 하고, 사나운 말과 마주치기도 하고, 사나운 소와 마주치기도 하고, 여자의 이름도 성도 남자의 이름도 성도 묻기도 하고, 마을의 이름도 길도 성읍의 이름도 길도 묻기도 한다.
그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한다. ‘빈집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소. 그래서 들어갔소.’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게 되어 있었소. 그래서 얻지 못했소.’ ‘개에게 물리게 되어 있었소. 그래서 물렸소.’ ‘사나운 코끼리와 마주치게 되어 있었소. 그래서 마주쳤소.’ ‘사나운 말과 마주치게 되어 있었소. 그래서 마주쳤소.’ ‘사나운 황소와 마주치게 되어 있었소. 그래서 마주쳤소.’ ‘여자와 남자의 이름과 성을 물어야 했소. 그래서 물었소.’ ‘마을과 읍의 이름과 길을 물어야 했소. 그래서 물었소.’
So ‘kimida’nti puṭṭho samāno ‘suññaṃ me agāraṃ pavisitabbaṃ ahosi’, tena pāvisiṃ;
그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받고서 ‘내가 빈집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들어갔다’,
‘piṇḍampi aladdhabbaṃ ahosi’, tena nālatthaṃ;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얻지 못했다’,
‘kukkurena ḍaṃsitabbaṃ ahosi’, tenamhi daṭṭho;
‘개에게 물릴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렸다’,
‘caṇḍena hatthinā samāgantabbaṃ ahosi’, tena samāgamiṃ;
‘사나운 코끼리와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다’,
‘caṇḍena assena samāgantabbaṃ ahosi’, tena samāgamiṃ;
‘사나운 말과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다’,
‘caṇḍena goṇena samāgantabbaṃ ahosi’, tena samāgamiṃ;
‘사나운 소와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다’,
‘itthiyāpi purisassapi nāmampi gottampi pucchitabbaṃ ahosi’, tena pucchiṃ;
‘여자의 이름도 성도 남자의 이름도 성도 물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gāmassapi nigamassapi nāmampi maggampi pucchitabbaṃ ahosi’, tena pucchinti.
‘마을의 이름도 길도 성읍의 이름도 길도 물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고 한다.
산다까여,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어른 스승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앎과 봄이 남김없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마을과 읍의 이름과 길을 물어야 했기에 물었다고 한다.’ ‘이 청정한 삶은 믿고 의지할 만하지 못하다.’ 이렇게 알고 나면 그는 그런 청정한 삶에 싫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불확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불확실]
불확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sabbaññū sabbadassāvī aparisesaṃ ñāṇadassanaṃ paṭijānāti…pe… ‘gāmassapi nigamassapi nāmampi maggampi pucchitabbaṃ ahosi, tena pucchi’nti.
‘이 스승은 모든 것을 아는 자이고 모든 것을 보는 자여서 남김없는 앎과 봄을 자처한다 — 「걷거나 서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내게는 앎과 봄이 늘 한결같이 나타나 있다」고. 그런데 그는 빈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하기도 하고, 개가 물기도 하고, 사나운 코끼리와 마주치기도 하고, 사나운 말과 마주치기도 하고, 사나운 소와 마주치기도 하고, 여자의 이름도 성도 남자의 이름도 성도 묻기도 하고, 마을의 이름도 길도 성읍의 이름도 길도 묻기도 한다. 그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받고서 「내가 빈집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들어갔다」, 「탁발 음식을 얻지 못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얻지 못했다」, 「개에게 물릴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렸다」, 「사나운 코끼리와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다」, 「사나운 말과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다」, 「사나운 소와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주쳤다」, 「여자의 이름도 성도 남자의 이름도 성도 물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마을의 이름도 길도 성읍의 이름도 길도 물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물었다」고 한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76:229.2 ~ PN:mn76/229.11에서 되살렸습니다.
So ‘anassāsikaṃ idaṃ brahmacariya’nti –
그는 ‘이 청정한 삶은 위안이 없다’고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나간다.
산다까여,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이렇게 밝히셨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온 힘을 다해 닦을 수 없는 청정한 삶이 있다. 닦는다 해도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없는 삶이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청정한 삶, 그 첫 번째가 이것이다.
Id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paṭhamaṃ anassāsikaṃ brahmacariyaṃ akkhātaṃ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다 —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230
산다까여, 또 여기 어떤 스승은 전해 들은 것을 따른다. 그는 전해 들은 것을 진리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렇다더라, 그렇다더라’ 하며 이어져 온 전승, 곧 경전 바구니의 전승에 힘입어 법을 가르친다.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anussaviko hoti anussavasacco.
“또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전승을 따르는 자이고 전승을 진리로 삼는 자이다.
So anussavena itihitihaparamparāya piṭakasampadāya dhammaṃ deseti.
그는 전승으로, ‘이렇다 이렇다’ 하는 이어짐으로, 성전의 전수로 법을 설한다.
산다까여, 전해 들은 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이런 스승에게는 잘 들은 것도 있고 잘못 들은 것도 있다.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과 다른 것도 있다.
Anussavikassa kho pana, sandaka, satthuno anussavasaccassa sussutampi hoti dussutampi hoti tathāpi hoti aññathāpi hoti.
그런데 산다까여, 전승을 따르고 전승을 진리로 삼는 스승에게는 잘 들은 것도 있고 잘못 들은 것도 있으며, 그러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산다까여,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어른 스승은 전해 들은 것을 따르고 그것을 진리라고 여긴다. 그는 그렇다더라 그렇다더라 하며 이어져 온 경전 바구니의 전승에 힘입어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스승에게는 잘 들은 것도 있고 잘못 들은 것도 있다.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과 다른 것도 있다.’ ‘이 청정한 삶은 믿고 의지할 만하지 못하다.’ 이렇게 알고 나면 그는 그런 청정한 삶에 싫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불확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불확실]
불확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anussaviko anussavasacco so anussavena itihitihaparamparāya piṭakasampadāya dhammaṃ deseti.
‘이 스승은 전승을 따르는 자이고 전승을 진리로 삼는 자이다. 그는 전승으로, 「이렇다 이렇다」 하는 이어짐으로, 성전의 전수로 법을 설한다.
Anussavikassa kho pana satthuno anussavasaccassa sussutampi hoti dussutampi hoti tathāpi hoti aññathāpi hoti’.
그런데 전승을 따르고 전승을 진리로 삼는 스승에게는 잘 들은 것도 있고 잘못 들은 것도 있으며, 그러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So ‘anassāsikaṃ idaṃ brahmacariya’nti –
그는 ‘이 청정한 삶은 위안이 없다’고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나간다.
산다까여,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이렇게 밝히셨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온 힘을 다해 닦을 수 없는 청정한 삶이 있다. 닦는다 해도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없는 삶이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청정한 삶, 그 두 번째가 이것이다.
Id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dutiyaṃ anassāsikaṃ brahmacariyaṃ akkhātaṃ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다 —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231
산다까여, 또 여기 어떤 스승은 따져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이리저리 살펴 헤아린다. 그렇게 따지고 헤아려 나온 자기 나름의 착상으로 법을 가르친다. 이런 스승에게는 잘 따진 것도 있고 잘못 따진 것도 있다.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과 다른 것도 있다.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takkī hoti vīmaṃsī.
“또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논변가이고 탐구자이다.
So takkapariyāhataṃ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paṭibhānaṃ dhammaṃ deseti.
그는 논변으로 두들겨 다듬어진, 탐구를 따라 나온, 스스로 떠오른 법을 설한다.
Takkissa kho pana, sandaka, satthuno vīmaṃsissa sutakkitampi hoti duttakkitampi hoti tathāpi hoti aññathāpi hoti.
그런데 산다까여, 논변가이고 탐구자인 스승에게는 잘 논변된 것도 있고 잘못 논변된 것도 있으며, 그러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산다까여,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어른 스승은 따져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이리저리 살펴 헤아린다. 그는 그렇게 따지고 헤아려 나온 자기 나름의 착상으로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스승에게는 잘 따진 것도 있고 잘못 따진 것도 있다.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과 다른 것도 있다.’ ‘이 청정한 삶은 믿고 의지할 만하지 못하다.’ 이렇게 알고 나면 그는 그런 청정한 삶에 싫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불확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불확실]
불확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takkī vīmaṃsī.
‘이 스승은 논변가이고 탐구자이다.
So takkapariyāhataṃ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paṭibhānaṃ dhammaṃ deseti.
그는 논변으로 두들겨 다듬어진, 탐구를 따라 나온, 스스로 떠오른 법을 설한다.
Takkissa kho pana satthuno vīmaṃsissa sutakkitampi hoti duttakkitampi hoti tathāpi hoti aññathāpi hoti’.
논변가이고 탐구자인 스승에게는 잘 논변된 것도 있고 잘못 논변된 것도 있으며, 그러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So ‘anassāsikaṃ idaṃ brahmacariya’nti –
그는 ‘이 청정한 삶은 위안이 없다’고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나간다.
산다까여,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이렇게 밝히셨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온 힘을 다해 닦을 수 없는 청정한 삶이 있다. 닦는다 해도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없는 삶이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청정한 삶, 그 세 번째가 이것이다.
Id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tatiyaṃ anassāsikaṃ brahmacariyaṃ akkhātaṃ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다 —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232
산다까여, 또 여기 어떤 스승은 둔하고 몹시 어리석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으면 말을 얼버무린다.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며 둘러댄다. ‘그렇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그렇지 않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달리 그렇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아니지 않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Puna caparaṃ, sandaka, idhekacco satthā mando hoti momūho.
“또한 산다까여, 여기 어떤 스승은 둔하고 아주 미혹하다.
So mandattā momūhattā tattha tattha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vācāvikkhepaṃ āpajjati amarāvikkhepaṃ –
그는 둔한 탓에, 아주 미혹한 탓에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서 말을 이리저리 흔드는 데 빠진다, 끝없는 얼버무림에 —
‘evantipi me no, tathātipi me no, aññathātipi me no, notipi me no, no notipi me no’ti.
‘이렇다고도 내게는 아니고, 그렇다고도 내게는 아니고, 다르다고도 내게는 아니고, 아니라고도 내게는 아니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내게는 아니다’라고.
산다까여, 이럴 때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곰곰이 따져 본다. ‘이 어른 스승은 둔하고 몹시 어리석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질문을 받으면 말을 얼버무리고, 뱀장어처럼 빠져나가며 둘러댄다. 그렇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그렇지 않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달리 그렇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아니지 않다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소 하고 말이다.’ ‘이 청정한 삶은 믿고 의지할 만하지 못하다.’ 이렇게 알고 나면 그는 그런 청정한 삶에 싫증을 내고 떠나 버린다.[불확실]
Tatra, sandaka,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거기서, 산다까여,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성찰한다[불확실]
불확실 —
‘ayaṃ kho bhavaṃ satthā mando momūho.
‘이 스승은 둔하고 아주 미혹하다.
So mandattā momūhattā tattha tattha pañhaṃ puṭṭho samāno vācāvikkhepaṃ āpajjati amarāvikkhepaṃ –
그는 둔한 탓에, 아주 미혹한 탓에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서 말을 이리저리 흔드는 데 빠진다, 끝없는 얼버무림에 —
evantipi me no, tathātipi me no, aññathātipi me no, notipi me no, no notipi me no’ti.
「이렇다고도 내게는 아니고, 그렇다고도 내게는 아니고, 다르다고도 내게는 아니고, 아니라고도 내게는 아니고, 아닌 것이 아니라고도 내게는 아니다」라고.’
So ‘anassāsikaṃ idaṃ brahmacariya’nti –
그는 ‘이 청정한 삶은 위안이 없다’고 —
iti viditvā tasmā brahmacariyā nibbijja pakkamati.
이렇게 알고서 그 청정한 삶에 흥미를 잃고 떠나간다.
산다까여,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세존께서 이렇게 밝히셨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온 힘을 다해 닦을 수 없는 청정한 삶이 있다. 닦는다 해도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없는 삶이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청정한 삶, 그 네 번째가 이것이다. 세존께서는 그런 청정한 삶을 바로 이 네 가지로 밝히셨다.
Idaṃ kho,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utthaṃ anassāsikaṃ brahmacariyaṃ akkhātaṃ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이것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번째,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다 —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Imāni kho, (tāni sandaka,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i anassāsikāni brahmacariyāni akkhātāni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산다까여, 이것들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다 —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님. 희한합니다, 아난다 존자님. 알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청정한 삶을 이렇게 네 가지로 밝히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온 힘을 다해 닦을 수 없고, 닦는다 해도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루지 못할 삶입니다. 믿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을 믿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밝히셨으니 말입니다.
‘‘Acchariyaṃ, bho ānanda, abbhutaṃ, bho ānanda!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신기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Yāvañcidaṃ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cattāri anassāsikāneva brahmacariyāni anassāsikāni brahmacariyānīti akkhātāni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na vaseyya, vasanto ca n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네 가지 위안 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위안이 없는 청정한 삶’이라고 말씀하셨다니 —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산다 해도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 존자님, 그 스승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밝히기에 지혜로운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고,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까?
So pana, bho ānanda, satthā kiṃ vādī kiṃ akkhāyī y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그런데 아난다 존자시여, 그 스승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주장하기에,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이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하겠습니까?”
233
산다까여, 여기 여래가 세상에 나타난다. 그분은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시며, 밝은 지혜와 실천을 갖추신 분이시다. 좋은 길을 가신 분이시며, 세간을 아시는 분이시며, 위없이 사람을 길들이는 분이시다.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시며, 깨달으신 분이시며, 세존이시다. 이렇게 이어지는 말씀은 줄인다. 그 제자는 다섯 가지 덮개를 버려 마음의 때를 씻고, 지혜로 마음을 약하게 하는 것들을 없앤다. 그러고는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법에서 벗어나 첫째 선정에 들어 머문다. 이 선정에는 일으킨 생각과 머문 생각이 있고, 홀로 있음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
‘‘Idha, sandaka,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pe… so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산다까여, 여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한다 — 아라한이시고,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시고, 앎과 실천을 갖추신 분이시고, 온전히 이루신 분이시고, 세상을 아시는 분이시고, 위없는 분이시고, 길들일 사람을 이끄시는 분이시고,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고, 깨달으신 분이시고, 세존이시다. 그는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이 세상을, 사문과 바라문,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무리를 스스로 깨달아 실현하고서 알린다. 그는 법을 설한다 —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뜻과 표현을 갖추어 온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그 삶을 드러낸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이가 그 법을 듣는다. 법을 듣고서 그는 여래에 대한 믿음을 얻는다. 그는 그렇게 얻은 믿음을 지니고 이렇게 성찰한다: ‘집안의 삶은 비좁고 먼지 끼는 길이며, 출가는 툭 트인 열린 곳이다. 집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원만하고 더할 나위 없이 청정한,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청정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집 없이 출가하리라.’ 그는 뒷날 적거나 많은 재산을 버리고, 적거나 많은 친척을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집 없이 출가한다. 이렇게 출가하여 그는 비구들의 학습 규범과 생활을 갖추어 살아간다. 산목숨 죽이기를 버려 산목숨 죽이기를 삼가고,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아 부끄러움을 알고 자비로우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바라며 머문다. 주지 않은 것 가지기를 버려 주지 않은 것 가지기를 삼가고, 주는 것만 받고 주는 것만 바라며 훔치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머문다. 청정하지 못한 삶을 버려 청정하게 살고, 멀리 떠나 세속의 성행위를 삼간다. 거짓말을 버려 거짓말을 삼가고, 진실을 말하며 진실에 이어져 믿음직하고 의지할 만하여 세상을 속이지 않는다. 이간하는 말을 버려 이간하는 말을 삼가고, 갈라진 이들을 화합시키고 화합한 이들을 북돋우며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거워하며 화합을 이루는 말을 한다. 거친 말을 버려 거친 말을 삼가고, 부드럽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와닿으며 예의 바르고 많은 이가 좋아하고 많은 이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한다. 쓸데없는 말을 버려 쓸데없는 말을 삼가고, 때에 맞게 말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치에 맞게 말하고 법답게 말하고 율답게 말하며, 새겨 둘 만하고 근거가 있고 알맞고 이익을 주는 말을 때에 맞게 한다. 그는 씨앗과 초목을 해치는 일을 삼가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밤에 먹지 않고 때 아닌 때에 먹기를 삼간다. 춤과 노래와 음악과 구경거리를 삼가고, 꽃다발과 향과 화장품으로 몸을 꾸미고 치장하기를 삼간다. 높고 큰 자리를 삼가고, 금과 은을 받기를 삼간다. 그는 몸을 보호할 옷과 배를 채울 탁발 음식으로 만족하며, 어디를 가든 이것만 지니고 간다 — 마치 새가 날개만 지니고 날아가듯이.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무더기를 갖추어 안으로 흠 없는 행복을 느낀다. 그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도 그 표상을 취하지 않고 세부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껴도, 그 표상을 취하지 않고 세부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법을 알고도 그 표상을 취하지 않고 세부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눈의 기능을 단속하지 않고 머물면 탐욕과 근심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그를 덮칠 것이므로, 그는 눈의 기능을 단속하는 길을 닦고, 눈의 기능을 지키고, 눈의 기능을 단속한다. 그와 같이 귀의 기능을, 코의 기능을, 혀의 기능을, 몸의 기능을, 마음의 기능을 단속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기능의 단속을 갖추어 안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행복을 느낀다. 그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둘러볼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굽힐 때도 펼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옷과 발우를 지닐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가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잠잠할 때도 또렷이 알아차리며 행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무더기를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기능의 단속을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마음챙김과 또렷한 알아차림을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만족을 갖추어, 숲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무덤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 같은 외딴 거처를 찾아 머문다. 그는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을 마친 뒤 가부좌를 틀고 몸을 곧게 세우고 앞으로 마음챙김을 두어 앉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탐욕을 여읜 마음으로 머물며, 탐욕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성냄과 악의를 버리고 악의 없는 마음으로 머물며, 모든 생명의 이익을 바라 성냄과 악의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해태와 혼침을 버리고 해태와 혼침 없이 머물며, 빛을 지각하고 마음챙기고 또렷이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들뜸과 후회를 버리고 들뜨지 않고 머물며, 안으로 고요한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의심을 버리고 의심을 건너 머물며, 유익한 법들에 대해 갈팡질팡하지 않고 의심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는 마음을 오염시키고 지혜를 약하게 하는 이 다섯 장애를 버리고,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떠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76:233.1에서 되살렸습니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산다까여, 또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머문 생각이 가라앉아 … 둘째 선정에 들어 머문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
‘‘Puna caparaṃ, sandaka,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pe.
“또한 산다까여,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하나됨을 이루며, 일으킨 생각도 없고 지속적 고찰도 없이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6:287.26에서 되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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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제2선에 들어 머문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산다까여, 또 비구는 기쁨이 사라져 평온하게 머물며 … 셋째 선정에 들어 머문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불확실]
‘‘Puna caparaṃ, sandaka, bhikkhu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pe…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또한 산다까여, 비구는 희열이 사라져 평온에 머물며, 마음챙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느끼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산다까여, 또 비구는 즐거움마저 내려놓고 … 넷째 선정에 들어 머문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
‘‘Puna caparaṃ, sandaka, bhikkhu sukhassa ca pahānā…pe…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또한 산다까여,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이전에 이미 기쁨과 불만이 사라졌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 평온에 의한 마음챙김의 청정이 있는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6:287.30에서 되살렸습니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이렇게 그의 마음이 고요해지고, 깨끗하고 맑아진다. 얼룩이 없고 때가 사라지며, 부드럽고 다루기 쉬워진다. 굳건히 서서 흔들림이 없게 되면, 그는 전생을 기억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갖가지 전생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이러하다. 한 번의 태어남, 두 번의 태어남 … 이렇게 모습과 내용을 갖추어 갖가지 전생을 기억한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그의 마음이 이렇게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좋고, 안정되어 흔들림 없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전생을 기억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So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곧 —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pe…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한 생도, 두 생도, 세 생도, 네 생도, 다섯 생도, 열 생도, 스무 생도, 서른 생도, 마흔 생도, 쉰 생도, 백 생도, 천 생도, 십만 생도, 여러 수축 겁도, 여러 팽창 겁도, 여러 수축·팽창 겁도 기억한다 — ‘저기서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었고, 이런 수명의 끝을 맞았다. 그리고 거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났다. 거기서도 나는 이런 이름이었고, 이런 성이었고, 이런 용모였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었고, 이런 수명의 끝을 맞았다. 그리고 거기서 죽어 여기에 태어났다’고. 이와 같이 특징과 자세한 내용을 갖추어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76:233.14에서 되살렸습니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이렇게 그의 마음이 고요해지고, 깨끗하고 맑아진다. 얼룩이 없고 때가 사라지며, 부드럽고 다루기 쉬워진다. 굳건히 서서 흔들림이 없게 되면, 그는 중생이 죽고 다시 태어남을 아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사람의 눈을 뛰어넘는 맑은 하늘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다. 천하고 귀한 이, 아름답고 추한 이, 좋은 곳에 가는 이, 나쁜 곳에 가는 이 …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안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그의 마음이 이렇게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좋고, 안정되어 흔들림 없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So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p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하늘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 죽어 가고 태어나고, 못나고 잘나고, 곱고 밉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중생들을 보며, 자기 행위대로 가는 중생들을 안다: ‘이 중생들은 몸으로 나쁘게 행하고 말로 나쁘게 행하고 마음으로 나쁘게 행하였으며,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에 따라 행하였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괴로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 중생들은 몸으로 좋게 행하고 말로 좋게 행하고 마음으로 좋게 행하였으며,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에 따라 행하였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났다.’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하늘눈으로 중생들을 본다 — 죽어 가고 태어나고, 못나고 잘나고, 곱고 밉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중생들을 보며, 자기 행위대로 가는 중생들을 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76:233.17에서 되살렸습니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이렇게 그의 마음이 고요해지고, 깨끗하고 맑아진다. 얼룩이 없고 때가 사라지며, 부드럽고 다루기 쉬워진다. 굳건히 서서 흔들림이 없게 되면, 그는 번뇌가 다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또 ‘이것이 괴로움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사라짐으로 가는 길이다’ 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그는 ‘이것이 번뇌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 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또 ‘이것이 번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번뇌의 사라짐으로 가는 길이다’ 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의 마음은 번뇌에서 벗어난다.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도, 존재의 번뇌에서도, 무명의 번뇌에서도 벗어난다. 벗어났을 때 ‘벗어났다’는 앎이 생긴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다시는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안다. 산다까여, 어떤 스승 밑에서 제자가 이와 같은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하자. 그런 스승 밑에서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청정한 삶을 닦을 수 있다. 닦으면 바른 이치, 곧 좋은 법을 이룰 수 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그의 마음이 이렇게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좋고, 안정되어 흔들림 없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번뇌를 다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S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ime āsav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이것들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Tassa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에서도, 무명의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앎이 일어난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다시는 이런 상태로 오지 않는다’고 안다.
Yasmiṃ kho, sandaka, satthari sāvako evarūpaṃ uḷāravisesaṃ adhigacchati tattha viññū puriso sasakkaṃ brahmacariyaṃ vaseyya, vasanto ca ārādheyya ñāyaṃ dhammaṃ kusala’’nti.
산다까여, 어떤 스승 아래서 제자가 이런 높은 특별함을 얻는다면,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힘닿는 데까지 청정한 삶을 살 것이고, 살면서 옳은 방법이요 유익한 법을 성취할 것이다.”
234
아난다 존자님, 아라한이며 번뇌가 다한 비구가 있습니다. 그는 청정한 삶을 마치고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표에 이르렀으며, 존재의 속박을 모두 끊고 바른 앎으로 해탈했습니다. 그런 비구가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 있습니까?
‘‘Yo pana so, bho ānand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paribhuñjeyya so kāme’’ti?
“그런데 아난다 존자시여,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른 앎으로 해탈한 비구, 그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누리겠습니까?”
산다까여, 아라한이며 번뇌가 다한 그 비구는 청정한 삶을 마치고 할 일을 다 했다.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표에 이르렀으며, 존재의 속박을 모두 끊고 바른 앎으로 해탈했다. 그런 비구는 다섯 가지를 저지를 수 없다. 번뇌가 다한 비구는 일부러 생명을 빼앗을 수 없고, 훔칠 뜻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다. 성행위를 할 수 없고, 알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재물을 쌓아 두고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도 없다. 산다까여, 바른 앎으로 해탈한 그 비구는 이 다섯 가지를 저지를 수 없다.
‘‘Yo so, sandak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abhabbo so pañcaṭṭhānāni ajjhācarituṃ.
“산다까여,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른 앎으로 해탈한 비구, 그런 비구는 다섯 가지 자리를 범할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ñcicca pāṇaṃ jīvitā vorope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adinnaṃ theyyasaṅkhātaṃ ādā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methunaṃ dhammaṃ paṭiseve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mpajānamusā bhāsituṃ,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nnidhikārakaṃ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pi pubbe agāriyabhūto.
번뇌가 다한 비구는 일부러 산 것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번뇌가 다한 비구는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마음으로 가질 수 없고, 번뇌가 다한 비구는 성행위를 할 수 없고, 번뇌가 다한 비구는 알면서 거짓말을 할 수 없고, 번뇌가 다한 비구는 예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 두고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 없다.
Yo so, sandak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abhabbo so imāni pañcaṭṭhānāni ajjhācaritu’’nti.
산다까여,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른 앎으로 해탈한 비구, 그런 비구는 이 다섯 가지 자리를 범할 수 없다.”
235
아난다 존자님, 아라한이며 번뇌가 다한 그 비구는 청정한 삶을 마치고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표에 이르렀으며, 존재의 속박을 모두 끊고 바른 앎으로 해탈했습니다. 그 비구는 걷거나 서 있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언제나 앎과 봄이 끊임없이 그의 앞에 나타나 있습니까? 그래서 ‘나의 번뇌는 다했다’ 하고 압니까?
‘‘Yo pana so, bho ānanda,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tassa carato ceva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ñāṇadassanaṃ paccupaṭṭhitaṃ –
“그런데 아난다 존자시여,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른 앎으로 해탈한 비구, 그에게는 걷거나 서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늘 한결같이 앎과 봄이 나타나 있습니까 —
‘khīṇā me āsavā’’’ti?
‘내 번뇌는 다했다’고?”
산다까여, 그렇다면 그대에게 비유를 들겠다. 비유를 통해 말의 뜻을 알아듣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Tena hi, sandaka, upamaṃ te karissāmi;
“그렇다면 산다까여, 그대에게 비유를 하나 들겠다;
upamāyapidhekacce viññū purisā bhāsitassa atthaṃ ājānanti.
비유로도 여기 어떤 지혜로운 사람들은 말한 바의 뜻을 안다.
산다까여, 어떤 사람의 손과 발이 잘렸다고 하자. 그는 걷거나 서 있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언제나 끊임없이 ‘내 손과 발이 잘렸다’ 하고 알겠는가? 아니면 돌이켜 살필 때에야 ‘내 손과 발이 잘렸다’ 하고 알겠는가? 아난다 존자님, 그 사람은 언제나 끊임없이 ‘내 손과 발이 잘렸다’ 하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돌이켜 살필 때에 ‘내 손과 발이 잘렸다’ 하고 압니다.
Seyyathāpi, sandaka, purisassa hatthapādā chinnā;
산다까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손발이 잘렸다;
tassa carato ceva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jānāti –
그에게는 걷거나 서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늘 한결같이 (안다 —
‘chinnā me hatthapādā’ti, udāhu paccavekkhamāno jānāti –
‘내 손발은 잘렸다’고, 아니면 돌이켜 살펴볼 때 아는가 —
‘chinnā me hatthapādā’’’ti?
‘내 손발은 잘렸다’고?”
‘‘Na kho, bho ānanda, so puriso satataṃ samitaṃ jānāti –
“아난다 존자시여, 그 사람이 늘 한결같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
‘chinnā me hatthapādā’ ti.
‘내 손발은 잘렸다’고.
) Api ca kho pana naṃ paccavekkhamāno jānāti –
) 그러나 돌이켜 살펴볼 때 그것을 압니다 —
‘chinnā me hatthapādā’’’ti.
‘내 손발은 잘렸다’고.”
산다까여, 바로 그처럼 아라한이며 번뇌가 다한 그 비구는 청정한 삶을 마치고 할 일을 다 했다.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표에 이르렀으며, 존재의 속박을 모두 끊고 바른 앎으로 해탈했다. 그런 비구에게 걷거나 서 있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앎과 봄이 언제나 끊임없이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번뇌는 다했다’ 하는 앎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다만 돌이켜 살필 때에 ‘나의 번뇌는 다했다’ 하고 안다.
‘‘Evameva kho, sandaka, yo so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tassa carato ceva tiṭṭhato ca suttassa ca jāgarassa ca satataṃ samitaṃ (ñāṇadassanaṃ na paccupaṭṭhitaṃ –
“산다까여, 꼭 그와 같이,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른 앎으로 해탈한 비구, 그에게 걷거나 서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늘 한결같이 (앎과 봄이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
‘khīṇā me āsavā’ti;
‘내 번뇌는 다했다’고;
) api ca kho pana naṃ paccavekkhamāno jānāti –
) 그러나 돌이켜 살펴볼 때 그것을 안다 —
‘khīṇā me āsavā’’’ti.
‘내 번뇌는 다했다’고.”
236
아난다 존자님, 그런데 이 법과 율에서 벗어난 이는 얼마나 많습니까? 산다까여, 백 명, 이백 명, 삼백 명, 사백 명, 오백 명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법과 율에서 벗어났다.[불확실]
‘‘Kīvabahukā pana, bho ānanda, imasmiṃ dhammavinaye niyyātāro’’ti?
“그런데 아난다 존자시여, 이 법과 율에서 벗어난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Na kho, sandaka, ekaṃyeva sataṃ na dve satāni na tīṇi satāni na cattāri satāni na pañca satāni, atha kho bhiyyova ye imasmiṃ dhammavinaye niyyātāro’’ti.
“산다까여, 백 명뿐도 아니고 이백 명도 아니고 삼백 명도 아니고 사백 명도 아니고 오백 명도 아니다. 이 법과 율에서 벗어난 이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님. 희한합니다, 아난다 존자님. 이 법을 가르치면서 자기 법을 치켜세우지도 않고 남의 법을 깎아내리지도 않는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벗어난 것으로 드러나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 아지와까 교도들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자식들답게, 자신을 치켜세우고 남을 깎아내립니다. 그러면서 벗어난 이가 겨우 셋뿐이라고 내세웁니다. 그들은 난다 왓차, 끼사 상낏짜, 막칼리 고살라입니다.[불확실]
‘‘Acchariyaṃ, bho ānanda, abbhutaṃ, bho ānanda!
“놀랍습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신기합니다, 아난다 존자시여!
Na ca nāma sadhammokkaṃsanā bhavissati, na paradhammavambhanā, āyatane ca dhammadesanā tāva bahukā ca niyyātāro paññāyissanti.
자기 법을 치켜세우는 일도 없고 남의 법을 헐뜯는 일도 없으며, 마땅한 자리에서 법을 설하는데도, 그토록 많은 벗어난 이들이 드러난다니.[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Ime panājīvakā puttamatāya puttā attānañceva ukkaṃsenti, pare ca vambhenti tayo ceva niyyātāro paññapenti, seyyathidaṃ –
그런데 이 아지와까들은, 아들 죽은 어미의 아들들은, 자기를 치켜세우고 남을 헐뜯으며 벗어난 이는 셋뿐이라고 내세웁니다, 곧 —
nandaṃ vacchaṃ, kisaṃ saṃkiccaṃ, makkhaliṃ gosāla’’nti.
난다 왓차, 끼사 상낏짜, 막칼리 고살라입니다.”
그때 산다까 유행자는 자기 무리를 불러 말했다. ‘여러분, 이제 사문 고따마 곁에서 청정한 삶을 닦으라. 우리는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이렇게 산다까 유행자는 자기 무리를 세존 곁의 청정한 삶으로 보냈다. 산다까의 경이 여섯 번째로 끝났다.[불확실]
Atha kho sandako paribbājako sakaṃ parisaṃ āmantesi –
그때 산다까 유행자가 자기 회중을 불렀다[불확실]
불확실 —
‘‘carantu bhonto samaṇe gotame brahmacariyavāso.
“여러분, 사문 고따마 아래에서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Na dāni sukaraṃ amhehi lābhasakkārasiloke pariccajitu’’nti.
이제 우리가 이득과 존경과 명성을 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Iti hidaṃ sandako paribbājako sakaṃ parisaṃ uyyojesi bhagavati brahmacariyeti.
이렇게 산다까 유행자는 자기 회중을 세존 아래의 청정한 삶으로 보냈다.
Sandakasuttaṃ niṭṭhitaṃ chaṭṭhaṃ.
산다까 경이 끝났다, 여섯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