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Bhaddālisuttaṃ
5. 밧달리 경
134
나는 이렇게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밧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비구들이여” 하고 부르시자, 비구들이 “세존이시여” 하고 대답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Evaṃ me sutaṃ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bhikkhavo’’ti.
“비구들이여” 하고.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예,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비구들이여, 나는 하루 한 끼만 먹는다. 하루 한 끼를 먹으니 병이 적고 괴로움이 적다는 것을 안다. 몸이 가볍고 힘이 있으며 편안하게 지낸다는 것도 안다. 비구들이여, 너희도 와서 하루 한 끼만 먹어 보아라. 그러면 너희도 병이 적고 괴로움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몸이 가볍고 힘이 있으며 편안하게 지낸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ahaṃ kho, bhikkhave, ekāsanabhojanaṃ bhuñjāmi;
“비구들이여, 나는 한 자리에서 먹는 식사를 한다.
ekāsanabhojanaṃ kho, ahaṃ, bhikkhave, bhuñjamāno appābādhatañca sañjānāmi appātaṅkatañca lahuṭṭhānañca balañca phāsuvihārañca.
비구들이여, 나는 한 자리에서 먹는 식사를 하면서 병이 적음과 괴로움이 적음과 가뿐히 일어남과 힘과 편안히 머묾을 안다.
Etha, tumhepi, bhikkhave, ekāsanabhojanaṃ bhuñjatha;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한 자리에서 먹는 식사를 하라.
ekāsanabhojanaṃ kho, bhikkhave, tumhepi bhuñjamānā appābādhatañca sañjānissatha appātaṅkatañca lahuṭṭhānañca balañca phāsuvihārañcā’’ti.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한 자리에서 먹는 식사를 하면 병이 적음과 괴로움이 적음과 가뿐히 일어남과 힘과 편안히 머묾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밧달리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하루 한 끼만 먹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먹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후회가 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밧달리여, 초대받은 곳에서 일부는 먹고 일부는 가져가서 먹어도 좋다. 그렇게 먹더라도 그대는 하루 한 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그렇게 해도 저는 먹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게 먹어도 마음이 불편하고 후회가 일 것 같습니다.”
Evaṃ vutte, āyasmā bhaddāli bhagavantaṃ etadavoca –
이렇게 말씀하시자, 밧달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ahaṃ kho, bhante, na ussahāmi ekāsanabhojanaṃ bhuñjituṃ;
“세존이시여, 저는 한 자리에서 먹는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ekāsanabhojanañhi me, bhante, bhuñjato siyā kukkuccaṃ, siyā vippaṭisāro’’ti.
세존이시여, 한 자리에서 먹는 식사를 하면 저에게 꺼림이 생기고 뉘우침이 생길 것입니다.”
‘‘Tena hi tvaṃ, bhaddāli, yattha nimantito assasi tattha ekadesaṃ bhuñjitvā ekadesaṃ nīharitvāpi bhuñjeyyāsi.
“그렇다면 밧달리여, 그대는 초대받은 자리에서 일부를 먹고 일부는 가지고 나와서 먹어도 좋다.
Evampi kho tvaṃ, bhaddāli, bhuñjamāno ekāsano yāpessasī’’ti.
밧달리여, 그렇게 먹더라도 그대는 한 자리에서 먹는 이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Evampi kho ahaṃ, bhante, na ussahāmi bhuñjituṃ;
“세존이시여, 그렇게라도 저는 먹을 수 없습니다.
evampi hi me, bhante, bhuñjato siyā kukkuccaṃ, siyā vippaṭisāro’’ti.
세존이시여, 그렇게 먹더라도 저에게 꺼림이 생기고 뉘우침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자 존자 밧달리는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세존께서 학습 규정을 세우시고 비구 승가가 그 학습을 받아들이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밧달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석 달 내내 세존 앞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Atha kho āyasmā bhaddāli bhagavat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
그때 밧달리 존자는 세존께서 학습계목을 제정하시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Atha kho āyasmā bhaddāli sabbaṃ taṃ temāsaṃ na bhagavato sammukhībhāvaṃ adās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
그때 밧달리 존자는 그 석 달 내내 세존 앞에 나서지 않았으니,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이가 그러하듯이.
135
그때 많은 비구들이 세존의 옷을 짓고 있었다. 옷이 다 되면 세존께서 석 달이 지난 뒤 유행을 떠나실 것이라고 했다. 존자 밧달리가 그 비구들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정중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한쪽에 앉았다. 그러자 비구들이 밧달리에게 말했다. “벗 밧달리여, 이것은 세존의 옷을 짓는 일입니다. 옷이 다 되면 세존께서는 석 달이 지난 뒤 유행을 떠나실 것입니다. 벗 밧달리여, 이 허물을 잘 마음에 두십시오. 나중에 더 힘들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불확실]
Tena kho pana samayena sambahulā bhikkhū bhagavato cīvarakammaṃ karonti –
그 무렵 여러 비구가 세존의 가사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
niṭṭhitacīvaro bhagavā temāsaccayena cārikaṃ pakkamissatīti.
‘가사가 다 되면 세존께서는 석 달이 지난 뒤 유행을 떠나시리라’ 하면서.
Atha kho āyasmā bhaddāli yena te bhikkhū tenupasaṅkami;
그때 밧달리 존자가 그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tehi bhikkhūhi saddhiṃ sammodi.
다가가서 그 비구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정다운 인사말을 서로 나눈 뒤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aṃ kho āyasmantaṃ bhaddāliṃ te bhikkhū etadavocuṃ –
한쪽에 앉은 밧달리 존자에게 그 비구들이 이렇게 말했다 —
‘‘idaṃ kho, āvuso bhaddāli, bhagavato cīvarakammaṃ karīyati.
“밧달리 벗이여, 지금 세존의 가사 만드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Niṭṭhitacīvaro bhagavā temāsaccayena cārikaṃ pakkamissati.
가사가 다 되면 세존께서는 석 달이 지난 뒤 유행을 떠나실 것입니다.
Iṅghāvuso bhaddāli, etaṃ dosakaṃ sādhukaṃ manasi karohi, mā te pacchā dukkarataraṃ ahosī’’ti.
자, 밧달리 벗이여, 이 허물을 잘 마음에 새기십시오. 나중에 그대에게 더 어려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알겠습니다, 벗들이여.” 존자 밧달리는 이렇게 대답하고 세존께 찾아갔다. 세존께 절하고 한쪽에 앉아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허물을 저질렀습니다. 어리석고 미혹하고 어질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 학습 규정을 세우시고 비구 승가가 그 학습을 받아들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허물을 허물로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는 스스로 단속하겠습니다.”
‘‘Evamāvuso’’ti kho āyasmā bhaddāli tesaṃ bhikkhūnaṃ paṭissu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그렇게 하겠습니다, 벗들이여” 하고 밧달리 존자는 그 비구들에게 대답한 뒤, 세존께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bhaddāli bhagavantaṃ etadavoca –
한쪽에 앉은 밧달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accayo maṃ, bhante,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ohaṃ bhagavat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ṃ.
“세존이시여, 제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서툰 그대로 잘못이 저를 덮쳤습니다. 세존께서 학습계목을 제정하시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Tassa me, bhante, bhagavā accayaṃ accayato paṭiggaṇhātu āyatiṃ saṃvarāyā’’ti.
세존이시여, 그런 저의 잘못을 세존께서는 잘못으로 받아 주시어 앞으로 삼가게 해 주소서.”
“밧달리여,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혹하고 어질지 못하게 허물을 저질렀다. 그 까닭은 이렇다. 내가 학습 규정을 세우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들이는 중에, 그대가 따르지 못하겠다고 했다.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세존께서는 사밧티에 머물고 계신다. 세존께서도 나를 알게 되실 것이다. 밧달리라는 비구가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고.’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런 때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많은 비구들이 사밧티에서 안거를 지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밧달리라는 비구가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고.’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런 때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많은 비구니들이 사밧티에서 안거를 지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밧달리라는 비구가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고.’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런 때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많은 남자 재가신자들이 사밧티에 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밧달리라는 비구가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고.’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런 때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많은 여자 재가신자들이 사밧티에 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밧달리라는 비구가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고.’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런 때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러 다른 교단의 사문과 바라문들이 사밧티에서 안거를 지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게 될 것이다. 사문 고따마의 제자 가운데 밧달리라는 상좌 비구가 그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고.’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Taggha tvaṃ, bhaddāli, accayo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aṃ tvaṃ may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
“참으로 밧달리여, 그대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서툰 그대로 잘못이 그대를 덮쳤다. 내가 학습계목을 제정하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그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Samayopi kho te, bhaddāli, appaṭividdho ahosi –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bhagavā kho sāvatthiyaṃ viharati, bhagavāpi maṃ jānissati –
‘세존께서 사왓티에 머무신다. 세존께서도 나를 아실 것이다 —
bhaddāli nāma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ti.
밧달리라는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라고.
Ayampi kho te, bhaddāli, samayo appaṭividdho ahosi.
밧달리여, 이 때도 그대는 꿰뚫어 알지 못했다.
Samayopi kho te, bhaddāli, appaṭividdho ahosi –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sambahulā kho bhikkhu sāvatthiyaṃ vassaṃ upagatā, tepi maṃ jānissanti –
‘여러 비구가 사왓티에서 안거에 들었다. 그들도 나를 알 것이다 —
bhaddāli nāma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ti.
밧달리라는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라고.
Ayampi kho te, bhaddāli, samayo appaṭividdho ahosi.
밧달리여, 이 때도 그대는 꿰뚫어 알지 못했다.
Samayopi kho te, bhaddāli, appaṭividdho ahosi –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sambahulā kho bhikkhuniyo sāvatthiyaṃ vassaṃ upagatā, tāpi maṃ jānissanti –
‘여러 비구니가 사왓티에서 안거에 들었다. 그들도 나를 알 것이다 —
bhaddāli nāma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ti.
밧달리라는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라고.
Ayampi kho te, bhaddāli, samayo appaṭividdho ahosi.
밧달리여, 이 때도 그대는 꿰뚫어 알지 못했다.
Samayopi kho te, bhaddāli, appaṭividdho ahosi –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sambahulā kho upāsakā sāvatthiyaṃ paṭivasanti, tepi maṃ jānissanti –
‘여러 재가신자가 사왓티에 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 것이다 —
bhaddāli nāma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ti.
밧달리라는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라고.
Ayampi kho te, bhaddāli, samayo appaṭividdho ahosi.
밧달리여, 이 때도 그대는 꿰뚫어 알지 못했다.
Samayopi kho te, bhaddāli, appaṭividdho ahosi –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sambahulā kho upāsikā sāvatthiyaṃ paṭivasanti, tāpi maṃ jānissanti –
‘여러 여자 재가신자가 사왓티에 살고 있다. 그들도 나를 알 것이다 —
bhaddāli nāma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ti.
밧달리라는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라고.
Ayampi kho te, bhaddāli, samayo appaṭividdho ahosi.
밧달리여, 이 때도 그대는 꿰뚫어 알지 못했다.
Samayopi kho te, bhaddāli, appaṭividdho ahosi –
밧달리여, 그대는 이런 때도 꿰뚫어 알지 못했다 —
‘sambahulā kho nānātitthiyā samaṇabrāhmaṇā sāvatthiyaṃ vassaṃ upagatā, tepi maṃ jānissanti –
‘여러 갈래의 외도 사문·바라문들이 사왓티에서 안거에 들었다. 그들도 나를 알 것이다 —
bhaddāli nāma bhikkhu samaṇassa gotamassa sāvako theraññataro bhikkhu 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ti.
밧달리라는 비구는 사문 고따마의 제자로 장로 축에 드는 비구인데, 그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라고.
Ayampi kho te, bhaddāli, samayo appaṭividdho ahosī’’ti.
밧달리여, 이 때도 그대는 꿰뚫어 알지 못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허물을 저질렀습니다. 어리석고 미혹하고 어질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 학습 규정을 세우시고 비구 승가가 그 학습을 받아들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허물을 허물로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는 스스로 단속하겠습니다.” “밧달리여,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혹하고 어질지 못하게 허물을 저질렀다. 그 까닭은 이렇다. 내가 학습 규정을 세우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들이는 중에, 그대가 따르지 못하겠다고 했다.”
‘‘Accayo maṃ, bhante,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ohaṃ bhagavat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ṃ.
“세존이시여, 제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서툰 그대로 잘못이 저를 덮쳤습니다. 세존께서 학습계목을 제정하시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Tassa me, bhante, bhagavā accayaṃ accayato paṭiggaṇhātu āyatiṃ saṃvarāyā’’ti.
세존이시여, 그런 저의 잘못을 세존께서는 잘못으로 받아 주시어 앞으로 삼가게 해 주소서.”
‘‘Taggha tvaṃ, bhaddāli, accayo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aṃ tvaṃ may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
“참으로 밧달리여, 그대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서툰 그대로 잘못이 그대를 덮쳤다. 내가 학습계목을 제정하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그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136
“밧달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양면으로 해탈한 비구가 있다고 하자.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비구여, 이리 와서 진창 위에 다리가 되어 주게.’ 그러면 그가 다리가 되어 주겠는가, 몸을 다른 쪽으로 돌리겠는가? 아니면 ‘싫습니다’ 하고 말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ṃ kiṃ maññasi, bhaddāli, idhassa bhikkhu ubhatobhāgavimutto, tamahaṃ evaṃ vadeyyaṃ –
“밧달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어떤 비구가 양면으로 해탈한 이라 하자.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
‘ehi me tvaṃ, bhikkhu, paṅke saṅkamo hohī’ti, api nu kho so saṅkameyya vā aññena vā kāyaṃ sannāmeyya, ‘no’ti vā vadeyyā’’ti?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나를 위해 진창을 건너는 다리가 되어라’라고. 그러면 그가 다리가 되어 주겠는가, 아니면 몸을 다른 쪽으로 돌리겠는가, 또는 ‘아니오’라고 말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밧달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지혜로 해탈한 비구가 있다고 하자. 몸으로 체득한 이, 견해를 얻은 이, 믿음으로 해탈한 이, 법을 따르는 이, 믿음을 따르는 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비구여, 이리 와서 진창 위에 다리가 되어 주게.’ 그러면 그가 다리가 되어 주겠는가, 몸을 다른 쪽으로 돌리겠는가? 아니면 ‘싫습니다’ 하고 말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ṃ kiṃ maññasi, bhaddāli, idhassa bhikkhu paññāvimutto… kāyasakkhi… diṭṭhippatto… saddhāvimutto… dhammānusārī… saddhānusārī, tamahaṃ evaṃ vadeyyaṃ –
“밧달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 어떤 비구가 통찰지로 해탈한 이라 하자, 여기 어떤 비구가 몸으로 체험한 이라 하자, 여기 어떤 비구가 견해를 얻은 이라 하자, 여기 어떤 비구가 믿음으로 해탈한 이라 하자, 여기 어떤 비구가 법을 따르는 이라 하자, 여기 어떤 비구가 믿음을 따르는 이라 하자.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65:136.1에서 되살렸습니다.
‘ehi me tvaṃ, bhikkhu, paṅke saṅkamo hohī’ti, api nu kho so saṅkameyya vā aññena vā kāyaṃ sannāmeyya, ‘no’ti vā vadeyyā’’ti?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나를 위해 진창을 건너는 다리가 되어라’라고. 그러면 그가 다리가 되어 주겠는가, 아니면 몸을 다른 쪽으로 돌리겠는가, 또는 ‘아니오’라고 말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밧달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때 그대는 양면으로 해탈한 이였는가, 지혜로 해탈한 이였는가? 아니면 몸으로 체득한 이, 견해를 얻은 이, 믿음으로 해탈한 이, 법을 따르는 이, 믿음을 따르는 이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밧달리여, 그때 그대는 비어 있고 헛되며 잘못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Taṃ kiṃ maññasi, bhaddāli, api nu tvaṃ, bhaddāli, tasmiṃ samaye ubhatobhāgavimutto vā hosi paññāvimutto vā kāyasakkhi vā diṭṭhippatto vā saddhāvimutto vā dhammānusārī vā saddhānusārī vā’’ti?
“밧달리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밧달리여, 그때 그대는 양면으로 해탈한 이였는가, 통찰지로 해탈한 이였는가, 몸으로 체험한 이였는가, 견해를 얻은 이였는가, 믿음으로 해탈한 이였는가, 법을 따르는 이였는가, 믿음을 따르는 이였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Nanu tvaṃ, bhaddāli, tasmiṃ samaye ritto tuccho aparaddho’’ti?
“밧달리여, 그때 그대는 헛되고 텅 비고 어긋난 것 아니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허물을 저질렀습니다. 어리석고 미혹하고 어질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 학습 규정을 세우시고 비구 승가가 그 학습을 받아들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허물을 허물로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는 스스로 단속하겠습니다.” “밧달리여,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고 미혹하고 어질지 못하게 허물을 저질렀다. 그 까닭은 이렇다. 내가 학습 규정을 세우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들이는 중에, 그대가 따르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밧달리여, 그대가 허물을 허물로 보고 법답게 바로잡으니,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허물을 허물로 보고 법답게 바로잡아 앞으로 스스로 단속하는 것, 그것이 성스러운 율에서 이루는 성장이다.”[불확실]
‘‘Evaṃ, bhante.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ccayo maṃ, bhante,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ohaṃ bhagavat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ṃ.
세존이시여, 제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서툰 그대로 잘못이 저를 덮쳤습니다. 세존께서 학습계목을 제정하시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Tassa me, bhante, bhagavā accayaṃ accayato paṭiggaṇhātu āyatiṃ saṃvarāyā’’ti.
세존이시여, 그런 저의 잘못을 세존께서는 잘못으로 받아 주시어 앞으로 삼가게 해 주소서.”
‘‘Taggha tvaṃ, bhaddāli, accayo accagamā yathābālaṃ yathāmūḷhaṃ yathāakusalaṃ, yaṃ tvaṃ mayā sikkhāpade paññāpiyamāne bhikkhusaṅghe sikkhaṃ samādiyamāne anussāhaṃ pavedesi.
“참으로 밧달리여, 그대가 어리석고 미혹하고 서툰 그대로 잘못이 그대를 덮쳤다. 내가 학습계목을 제정하고 비구 승가가 학습을 받아 지닐 때, 그대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Yato ca kho tvaṃ, bhaddāli, accayaṃ accayato disvā yathādhammaṃ paṭikarosi, taṃ te mayaṃ paṭiggaṇhāma.
그러나 밧달리여, 그대가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법답게 바로잡았으니,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Vuddhihesā, bhaddāli, ariyassa vinaye yo accayaṃ accayato disvā yathādhammaṃ paṭikaroti, āyatiṃ saṃvaraṃ āpajjati’’.
밧달리여,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법답게 바로잡아 앞으로 삼가는 것,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향상이다.”
137
“밧달리여, 여기 어떤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외딴 처소를 찾아가야겠다. 숲, 나무 밑,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 깊은 숲, 노지, 짚더미 같은 곳이다. 어쩌면 사람의 법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앎과 봄의 특별함을 몸소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외딴 처소를 찾아간다. 숲, 나무 밑,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 깊은 숲, 노지, 짚더미 같은 곳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지내는 그를 스승이 나무란다. 사려 깊은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도 나무라고, 천신들도 나무라며, 스스로도 자신을 나무란다. 그는 스승에게도, 동료 수행자들에게도, 천신들에게도 나무람을 받고, 스스로에게서도 나무람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의 법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앎과 봄의 특별함을 몸소 실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Idha, bhaddāli, ekacco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 hoti.
“밧달리여, 여기 어떤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다.
Tassa evaṃ hoti –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yaṃnūnāhaṃ vivittaṃ senāsanaṃ bhajeyyaṃ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나는 외딴 처소를 가까이하리라 — 숲, 나무 아래,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가, 숲속 외딴 곳, 한데, 짚더미를.
Appeva nāmāhaṃ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ṃ sacchikareyya’nti.
그러면 나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앎과 봄의 뛰어남을 실현할지도 모른다’라고.
So vivittaṃ senāsanaṃ bhajati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그는 외딴 처소를 가까이한다 — 숲, 나무 아래,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가, 숲속 외딴 곳, 한데, 짚더미를.
Tassa tathāvūpakaṭṭhassa viharato satthāpi upavadati, anuviccapi viññū sabrahmacārī upavadanti, devatāpi upavadanti, attāpi attānaṃ upavadati.
그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머무는데도 스승도 나무라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도 살펴본 뒤 나무라고, 신들도 나무라고, 자신도 스스로를 나무란다.
So satthārāpi upavadito, anuviccapi viññūhi sabrahmacārīhi upavadito, devatāhipi upavadito, attanāpi attānaṃ upavadito na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ṃ sacchikaroti.
그는 스승에게도 나무람을 받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에게도 살펴본 끝에 나무람을 받고, 신들에게도 나무람을 받고, 자신에게도 스스로 나무람을 받아,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앎과 봄의 뛰어남을 실현하지 못한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138
“그러나 밧달리여, 여기 어떤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운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외딴 처소를 찾아가야겠다. 숲, 나무 밑,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 깊은 숲, 노지, 짚더미 같은 곳이다. 어쩌면 사람의 법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앎과 봄의 특별함을 몸소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외딴 처소를 찾아간다. 숲, 나무 밑,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 깊은 숲, 노지, 짚더미 같은 곳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지내는 그를 스승은 나무라지 않는다. 사려 깊은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도 나무라지 않고, 천신들도 나무라지 않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는 스승에게도, 동료 수행자들에게도, 천신들에게도 나무람을 받지 않고, 스스로에게서도 나무람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법을 넘어서는 성스러운 앎과 봄의 특별함을 몸소 실현한다. 그는 감각적 욕망에서 멀리 떠나고, 해로운 상태에서도 멀리 떠난다. 그리하여 첫째 선정에 들어 지낸다. 이 선정에는 일으킨 생각과 머문 생각이 있고, 떠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Idha pana, bhaddāli, ekacco bhikkhu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ī hoti.
밧달리여, 그러나 여기 어떤 비구는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다.
Tassa evaṃ hoti –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yaṃnūnāhaṃ vivittaṃ senāsanaṃ bhajeyyaṃ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나는 외딴 처소를 가까이하리라 — 숲, 나무 아래,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가, 숲속 외딴 곳, 한데, 짚더미를.
Appeva nāmāhaṃ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ṃ sacchikareyya’nti.
그러면 나는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앎과 봄의 뛰어남을 실현할지도 모른다’라고.
So vivittaṃ senāsanaṃ bhajati araññaṃ rukkhamūlaṃ pabbataṃ kandaraṃ giriguhaṃ susānaṃ vanapatthaṃ abbhokāsaṃ palālapuñjaṃ.
그는 외딴 처소를 가까이한다 — 숲, 나무 아래, 산, 골짜기, 산속 동굴, 무덤가, 숲속 외딴 곳, 한데, 짚더미를.
Tassa tathāvūpakaṭṭhassa viharato satthāpi na upavadati, anuviccapi viññū sabrahmacārī na upavadanti, devatāpi na upavadanti, attāpi attānaṃ na upavadati.
그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머무는데 스승도 나무라지 않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도 살펴본 뒤 나무라지 않고, 신들도 나무라지 않고, 자신도 스스로를 나무라지 않는다.
So satthārāpi anupavadito, anuviccapi viññūhi sabrahmacārīhi anupavadito, devatāhipi anupavadito, attanāpi attānaṃ anupavadito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ṃ sacchikaroti.
그는 스승에게도 나무람을 받지 않고, 지혜로운 동료 수행자들에게도 살펴본 끝에 나무람을 받지 않고, 신들에게도 나무람을 받지 않고, 자신에게도 스스로 나무람을 받지 않아,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앎과 봄의 뛰어남을 실현한다.
S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그는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떠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1선에 들어 머문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139
“또 밧달리여,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머문 생각이 가라앉는다.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그리하여 일으킨 생각도 머문 생각도 없고,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둘째 선정에 들어 지낸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Puna caparaṃ, bhaddāli,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다시 밧달리여,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하고 마음이 한곳에 모이며,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밧달리여, 비구는 기쁨에서도 마음이 멀어져 평온하게 지낸다. 알아차리고 분명히 알며, 몸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성인들이 ‘평온하고 알아차리며 즐겁게 지낸다’ 하고 말하는 셋째 선정에 들어 지낸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Puna caparaṃ, bhaddāli, bhikkhu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
다시 밧달리여, 비구는 희열에 대한 탐냄이 사라져 평온하게 머물며, 마음챙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느낀다. 성자들이 이렇게 일러 주는 그것이다 —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하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밧달리여, 비구는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린다. 앞서 이미 기쁨과 근심도 사라졌다. 그래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 평온과 알아차림으로 청정한 넷째 선정에 들어 지낸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Puna caparaṃ, bhaddāli,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다시 밧달리여,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이 집중되어 맑고 깨끗하며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면, 마음은 부드럽고 다루기 쉬우며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전생을 기억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여러 가지 전생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한 생, 두 생… 이렇게 모습과 내력까지 갖추어 여러 가지 전생을 기억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그의 마음이 이렇게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좋고, 안정되어 흔들림 없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전생을 기억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So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seyyathidaṃ –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곧 —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pe…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한 생도, 두 생도, 세 생도, 네 생도, 다섯 생도, 열 생도, 스무 생도, 서른 생도, 마흔 생도, 쉰 생도, 백 생도, 천 생도, 십만 생도,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도,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도,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도 기억하여, 이와 같이 특징과 자세한 내역을 갖추어 여러 전생을 기억한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65:139.13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이 집중되어 맑고 깨끗하며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면, 마음은 부드럽고 다루기 쉬우며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는 중생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아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청정하고 사람의 눈을 뛰어넘는 천안으로 중생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다. 열등한 이와 뛰어난 이, 아름다운 이와 추한 이, 좋은 곳에 가는 이와 나쁜 곳에 가는 이를 본다. 그리고 중생들이 자기 업을 따라 가는 것을 안다. ‘아, 이 존재들은 몸으로 나쁜 행을 갖추었다… 그래서 악처,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 존재들은 몸으로 좋은 행을 갖추었다… 그래서 좋은 곳, 천상세계에 태어났다.’ 이렇게 청정하고 사람의 눈을 뛰어넘는 천안으로… 중생들이 자기 업을 따라 가는 것을 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그의 마음이 이렇게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좋고, 안정되어 흔들림 없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So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at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
그는 청정하여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보며, 천하고 귀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간,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안다 —
‘ime vata bhonto sattā kāyaduccaritena samannāgatā…pe… vinipātaṃ nirayaṃ upapannā;
‘참으로 이 중생들은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갖추고, 말로 짓는 나쁜 행위를 갖추고,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갖추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니고, 삿된 견해에 따른 업을 지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파멸처인 지옥에 태어났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51:15.3에서 되살렸습니다.
ime vā pana bhonto sattā kāyasucaritena samannāgatā…pe…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nnā’ti iti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pe…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ti.
또 참으로 이 중생들은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갖추고, 말로 짓는 좋은 행위를 갖추고,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갖추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견해에 따른 업을 지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인 천상 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청정하여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보며, 천하고 귀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간,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01:18.4 ~ PN:mn65/139.17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a.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이 집중되어 맑고 깨끗하며 흠이 없고 오염이 사라지면, 마음은 부드럽고 다루기 쉬우며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는 번뇌가 다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괴로움의 일어남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의 사라짐으로 가는 길도 그렇게 있는 그대로 안다. 또 ‘이것들이 번뇌다’ 하고 있는 그대로 안다. 번뇌의 일어남도, 번뇌의 사라짐도, 번뇌의 사라짐으로 가는 길도 그렇게 있는 그대로 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의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도, 존재의 번뇌에서도, 무명의 번뇌에서도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앎이 생긴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쳤고, 더 이상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고 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사람에게는 으레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ti.
그의 마음이 이렇게 삼매에 들어 청정하고 밝고, 흠 없고 오염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다루기 좋고, 안정되어 흔들림 없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번뇌를 다하는 앎으로 마음을 기울인다.
S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ime āsav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Tassa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볼 때,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에서도, 무명의 번뇌에서도 마음이 해탈한다.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앎이 있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다 살았으며, 할 일은 다 마쳤고, 다시는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i taṃ, bhaddāli, hoti yathā 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paripūrakārissā’’ti.
밧달리여, 스승의 가르침에서 학습을 온전히 채우는 자에게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140
밧달리 존자가 이 말씀을 듣고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이유로 어떤 비구는 강하게 몰아붙여 문책을 당합니까? 또 어떤 이유로 어떤 비구는 그렇게까지 몰아붙여 문책하지 않습니까?”
Evaṃ vutte, āyasmā bhaddāli bhagavantaṃ etadavoca –
이렇게 말씀하시자, 밧달리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ko nu kho, bhante, hetu, ko paccayo yena midhekaccaṃ bhikkhuṃ pasayha pasayha kāraṇaṃ karonti?
“세존이시여,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기에 여기 어떤 비구를 거듭거듭 억눌러 다그칩니까?
Ko pana, bhante, hetu, ko paccayo yena midhekaccaṃ bhikkhuṃ no tathā pasayha pasayha kāraṇaṃ karontī’’ti?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기에 여기 어떤 비구는 그렇게 거듭거듭 억눌러 다그치지 않습니까?”
“밧달리여, 어떤 비구는 잘못을 자주 저지르고 허물이 많다. 비구들이 그 잘못을 지적하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린다. 성내고 미워하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지도 않는다.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하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밧달리여, 그러면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잘못을 자주 저지르고 허물이 많소. 지적을 받으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리오. 성내고 미워하며 불만을 드러내오.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지도 않소.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하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소. 존자들이여, 이 사안이 곧바로 가라앉지 않도록 이 비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면 좋겠소.’ 밧달리여, 이런 비구에 대해서는 비구들이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고, 그래서 이 사안은 곧바로 가라앉지 않는다.
‘‘Idha, bhaddāli, ekacco bhikkhu abhiṇhāpattiko hoti āpattibahulo.
“밧달리여, 여기 어떤 비구는 자주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은 자이다.
So bhikkhūhi vuccamāno aññenaññaṃ paṭicarati, bahiddhā kathaṃ apanāme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na sammā vattati, na lomaṃ pāteti, na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n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고,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털을 떨구지 않고, 벗어남으로 나아가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Tatra, bhaddāli, bhikkhūnaṃ evaṃ hoti –
밧달리여,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yaṃ kho, āvuso, bhikkhu abhiṇhāpattiko āpattibahulo.
벗이여, 이 비구는 자주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은 자입니다.
So bhikkhūhi vuccamāno aññenaññaṃ paṭicarati, bahiddhā kathaṃ apanāme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na sammā vattati, na lomaṃ pāteti, na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n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고,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털을 떨구지 않고, 벗어남으로 나아가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Sādhu vatāyasmanto imassa bhikkhuno tathā tathā upaparikkhatha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na khippameva vūpasameyyāti.
존자들이여, 부디 이 비구를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이 빨리는 가라앉지 않도록.
Tassa kho evaṃ, bhaddāli, bhikkhuno bhikkhū tathā tathā upaparikkhanti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na khippameva vūpasammati.
밧달리여, 그러면 그 비구를 비구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펴서, 이 사건은 빨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141
그런데 밧달리여, 또 어떤 비구는 잘못을 자주 저지르고 허물이 많다. 그러나 비구들이 지적하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리지도 않는다. 성내거나 미워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바르게 처신하고 순순히 따르며,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한다.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밧달리여, 그러면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잘못을 자주 저지르고 허물이 많소. 그래도 지적을 받으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리지도 않소. 성내거나 미워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소. 바르게 처신하고 순순히 따르며,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하오.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오. 존자들이여, 이 사안이 곧바로 가라앉도록 이 비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면 좋겠소.’ 밧달리여, 이런 비구에 대해서는 비구들이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고, 그래서 이 사안은 곧바로 가라앉는다.
‘‘Idha pana, bhaddāli, ekacco bhikkhu abhiṇhāpattiko hoti āpattibahulo.
“밧달리여, 그런데 여기 어떤 비구는 자주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은 자이다.
So bhikkhūhi vuccamāno nāññenaññaṃ paṭicarati, bahiddhā kathaṃ na apanāmeti, na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sammā vattati, lomaṃ pāteti,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지 않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지 않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바르게 처신하고, 털을 떨구고, 벗어남으로 나아가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한다.
Tatra, bhaddāli, bhikkhūnaṃ evaṃ hoti –
밧달리여,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yaṃ kho, āvuso, bhikkhu abhiṇhāpattiko āpattibahulo.
벗이여, 이 비구는 자주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은 자입니다.
So bhikkhūhi vuccamāno nāññenaññaṃ paṭicarati, bahiddhā kathaṃ na apanāmeti, na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sammā vattati, lomaṃ pāteti,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지 않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지 않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바르게 처신하고, 털을 떨구고, 벗어남으로 나아가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합니다.
Sādhu vatāyasmanto, imassa bhikkhuno tathā tathā upaparikkhatha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khippameva vūpasameyyāti.
존자들이여, 부디 이 비구를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이 빨리 가라앉도록.
Tassa kho evaṃ, bhaddāli, bhikkhuno bhikkhū tathā tathā upaparikkhanti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khippameva vūpasammati.
밧달리여, 그러면 그 비구를 비구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펴서, 이 사건은 빨리 가라앉는다.
142
밧달리여, 어떤 비구는 어쩌다 한 번씩 잘못을 저지를 뿐, 허물 없는 날이 더 많다. 그런데 비구들이 지적하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린다. 성내고 미워하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지도 않는다.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하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밧달리여, 그러면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어쩌다 한 번씩 잘못을 저지를 뿐, 허물 없는 날이 더 많소. 그런데도 지적을 받으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리오. 성내고 미워하며 불만을 드러내오.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순순히 따르지도 않소.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하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소. 존자들이여, 이 사안이 곧바로 가라앉지 않도록 이 비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면 좋겠소.’ 밧달리여, 이런 비구에 대해서는 비구들이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고, 그래서 이 사안은 곧바로 가라앉지 않는다.
‘‘Idha, bhaddāli, ekacco bhikkhu adhiccāpattiko hoti anāpattibahulo.
“밧달리여, 여기 어떤 비구는 어쩌다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지 않은 자이다.
So bhikkhūhi vuccamāno aññenaññaṃ paṭicarati, bahiddhā kathaṃ apanāme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na sammā vattati, na lomaṃ pāteti, na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n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고,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털을 떨구지 않고, 벗어남으로 나아가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Tatra, bhaddāli, bhikkhūnaṃ evaṃ hoti –
밧달리여,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yaṃ kho, āvuso, bhikkhu adhiccāpattiko anāpattibahulo.
벗이여, 이 비구는 어쩌다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지 않은 자입니다.
So bhikkhūhi vuccamāno aññenaññaṃ paṭicarati, bahiddhā kathaṃ apanāme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na sammā vattati, na lomaṃ pāteti, na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n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고, 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털을 떨구지 않고, 벗어남으로 나아가지 않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Sādhu vatāyasmanto, imassa bhikkhuno tathā tathā upaparikkhatha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na khippameva vūpasameyyāti.
존자들이여, 부디 이 비구를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이 빨리는 가라앉지 않도록.
Tassa kho evaṃ, bhaddāli, bhikkhuno bhikkhū tathā tathā upaparikkhanti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na khippameva vūpasammati.
밧달리여, 그러면 그 비구를 비구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펴서, 이 사건은 빨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143
그런데 밧달리여, 또 어떤 비구는 어쩌다 한 번씩 잘못을 저지를 뿐, 허물 없는 날이 더 많다. 그는 비구들이 지적하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리지도 않는다. 성내거나 미워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바르게 처신하고 순순히 따르며,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한다.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한다. 밧달리여, 그러면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어쩌다 한 번씩 잘못을 저지를 뿐, 허물 없는 날이 더 많소. 게다가 지적을 받으면 이 말 저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딴소리로 화제를 돌리지도 않소. 성내거나 미워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소. 바르게 처신하고 순순히 따르며, 허물을 벗어날 방도를 실천하오. ‘승가가 흡족해할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오. 존자들이여, 이 사안이 곧바로 가라앉도록 이 비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면 좋겠소.’ 밧달리여, 이런 비구에 대해서는 비구들이 이리저리 살펴보게 되고, 그래서 이 사안은 곧바로 가라앉는다.
‘‘Idha pana, bhaddāli, ekacco bhikkhu adhiccāpattiko hoti anāpattibahulo.
“밧달리여, 그런데 여기 어떤 비구는 어쩌다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지 않은 자이다.
So bhikkhūhi vuccamāno nāññenaññaṃ paṭicarati, na bahiddhā kathaṃ apanāmeti, na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sammā vattati, lomaṃ pāteti,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지 않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지 않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바르게 처신하고, 털을 떨구고, 벗어남으로 나아가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한다.
Tatra, bhaddāli, bhikkhūnaṃ evaṃ hoti –
밧달리여,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yaṃ kho, āvuso, bhikkhu adhiccāpattiko anāpattibahulo.
벗이여, 이 비구는 어쩌다 죄를 범하는 자이고 죄가 많지 않은 자입니다.
So bhikkhūhi vuccamāno nāññenaññaṃ paṭicarati, na bahiddhā kathaṃ apanāmeti, na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sammā vattati, lomaṃ pāteti, netthāraṃ vattati, ‘yena saṅgho attamano hoti taṃ karomī’ti āha.
그는 비구들이 말할 때 다른 것으로 다른 것을 둘러대지 않고, 말을 바깥으로 돌리지 않고, 화와 성냄과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바르게 처신하고, 털을 떨구고, 벗어남으로 나아가고, ‘승가가 흡족해할 그것을 내가 하겠다’고 말합니다.
Sādhu vatāyasmanto, imassa bhikkhuno tathā tathā upaparikkhatha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khippameva vūpasameyyāti.
존자들이여, 부디 이 비구를 이렇게 저렇게 살펴보십시오, 이 사건이 빨리 가라앉도록.
Tassa kho evaṃ, bhaddāli, bhikkhuno bhikkhū tathā tathā upaparikkhanti yathāssidaṃ adhikaraṇaṃ khippameva vūpasammati.
밧달리여, 그러면 그 비구를 비구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펴서, 이 사건은 빨리 가라앉는다.
144
밧달리여, 어떤 비구는 겨우 믿음 한 줌, 애정 한 줌에 기대어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겨우 믿음 한 줌, 애정 한 줌에 기대어 지내오. 우리가 이 비구를 강하게 몰아붙여 문책했다가는, 그에게 남은 믿음 한 줌, 애정 한 줌마저 잃게 될지도 모르오.’ 밧달리여, 이를테면 눈이 한쪽뿐인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친구와 동료, 친지와 혈육은 그 하나 남은 눈을 지켜 주려 한다. ‘그에게 남은 하나뿐인 눈마저 잃지 않게 하자’ 하면서 말이다. 밧달리여, 이와 같이 어떤 비구는 겨우 믿음 한 줌, 애정 한 줌에 기대어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반들이여, 이 비구는 겨우 믿음 한 줌, 애정 한 줌에 기대어 지내오. 우리가 이 비구를 강하게 몰아붙여 문책했다가는, 그에게 남은 믿음 한 줌, 애정 한 줌마저 잃게 될지도 모르오.’ 밧달리여, 이것이 어떤 비구를 강하게 몰아붙여 문책하는 이유이고 까닭이다. 또 이것이 어떤 비구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여 문책하지 않는 이유이고 까닭이다.”
‘‘Idha, bhaddāli, ekacco bhikkhu saddhāmattakena vahati pemamattakena.
“밧달리여, 여기 어떤 비구는 그저 믿음만으로, 그저 애정만으로 지탱한다.
Tatra, bhaddāli, bhikkhūnaṃ evaṃ hoti –
밧달리여,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yaṃ kho, āvuso, bhikkhu saddhāmattakena vahati pemamattakena.
‘벗이여, 이 비구는 그저 믿음만으로, 그저 애정만으로 지탱합니다.
Sace mayaṃ imaṃ bhikkhuṃ pasayha pasayha kāraṇaṃ karissāma –
만일 우리가 이 비구를 거듭거듭 억눌러 다그친다면 —
mā yampissa taṃ saddhāmattakaṃ pemamattakaṃ tamhāpi parihāyī’ti.
그에게 있는 그 그저 믿음뿐인 것, 그저 애정뿐인 것, 그것마저 잃어버리지 않기를.’
Seyyathāpi, bhaddāli, purisassa ekaṃ cakkhuṃ, tassa mittāmaccā ñātisālohitā taṃ ekaṃ cakkhuṃ rakkheyyuṃ –
밧달리여, 마치 어떤 사람에게 눈이 하나뿐이고, 그의 벗과 동료, 친척과 혈육이 그 하나뿐인 눈을 지키려 하는 것과 같다 —
‘mā yampissa taṃ ekaṃ cakkhuṃ tamhāpi parihāyī’ti;
‘그에게 있는 그 하나뿐인 눈, 그것마저 잃어버리지 않기를’ 하고.
evameva kho, bhaddāli, idhekacco bhikkhu saddhāmattakena vahati pemamattakena.
밧달리여, 이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는 그저 믿음만으로, 그저 애정만으로 지탱한다.
Tatra, bhaddāli, bhikkhūnaṃ evaṃ hoti –
밧달리여, 그때 비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yaṃ kho, āvuso, bhikkhu saddhāmattakena vahati pemamattakena.
‘벗이여, 이 비구는 그저 믿음만으로, 그저 애정만으로 지탱합니다.
Sace mayaṃ imaṃ bhikkhuṃ pasayha pasayha kāraṇaṃ karissāma –
만일 우리가 이 비구를 거듭거듭 억눌러 다그친다면 —
mā yampissa taṃ saddhāmattakaṃ pemamattakaṃ tamhāpi parihāyī’ti.
그에게 있는 그 그저 믿음뿐인 것, 그저 애정뿐인 것, 그것마저 잃어버리지 않기를.’
Ayaṃ kho, bhaddāli, hetu ayaṃ paccayo yena midhekaccaṃ bhikkhuṃ pasayha pasayha kāraṇaṃ karonti.
밧달리여,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조건이니, 이 때문에 여기 어떤 비구를 거듭거듭 억눌러 다그친다.
Ayaṃ pana, bhaddāli, hetu ayaṃ paccayo, yena midhekaccaṃ bhikkhuṃ no tathā pasayha pasayha kāraṇaṃ karontī’’ti.
밧달리여, 그런데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조건이니, 이 때문에 여기 어떤 비구는 그렇게 거듭거듭 억눌러 다그치지 않는다.”
145
“세존이시여, 예전에는 학습계율이 적었는데도 궁극의 앎에 굳게 자리 잡은 비구가 더 많았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또 지금은 학습계율이 더 많은데도 궁극의 앎에 굳게 자리 잡는 비구가 더 적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Ko nu kho, bhante, hetu, ko paccayo yena pubbe appatarāni ceva sikkhāpadāni ahesuṃ bahutarā ca bhikkhū aññāya saṇṭhahiṃsu?
“‘세존이시여,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기에 예전에는 학습계율이 더 적었는데도 궁극의 앎에 확립된 비구는 더 많았습니까?
Ko pana, bhante, hetu, ko paccayo yena etarahi bahutarāni ceva sikkhāpadāni honti appatarā ca bhikkhū aññāya saṇṭhahantī’ti?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이기에 지금은 학습계율이 더 많은데도 궁극의 앎에 확립되는 비구는 더 적습니까?’
“밧달리여, 중생들이 쇠퇴하고 바른 법이 사라져 갈 때는 그렇게 된다. 학습계율은 더 많아지고, 궁극의 앎에 굳게 자리 잡는 비구는 더 적어진다. 밧달리여, 승가 안에 번뇌의 근거가 되는 법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하지 않는다. 그런 법들이 나타나면 그때 스승은 바로 그 법들을 막기 위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밧달리여, 승가가 크게 불어나기 전에는 번뇌의 근거가 되는 법들이 승가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 승가가 크게 불어나면 그때 그런 법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스승은 바로 그 법들을 막기 위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밧달리여, 승가가 이득의 정점, 명성의 정점, 많이 배움, 오랜 연륜에 이르기 전에는 그런 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승가가 오랜 연륜에 이르면 그때 승가 안에 번뇌의 근거가 되는 법들이 나타난다. 그러면 스승은 바로 그 법들을 막기 위해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Evametaṃ, bhaddāli, hoti sattesu hāyamānesu, saddhamme antaradhāyamāne, bahutarāni ceva sikkhāpadāni honti appatarā ca bhikkhū aññāya saṇṭhahantīti.
“밧달리여, 그것은 이러하다. 중생들이 쇠퇴하고 바른 법이 사라져 갈 때, 학습계율은 더 많아지고 궁극의 앎에 확립되는 비구는 더 적어진다.
Na tāva, bhaddāli, satthā sāvakānaṃ sikkhāpadaṃ paññāpeti yāva na idhekacce āsavaṭṭhānīyā dhammā saṅghe pātubhavanti.
밧달리여, 여기 번뇌의 바탕이 되는 어떤 법들이 승가에 나타나지 않는 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하지 않는다.
Yato ca kho, bhaddāli, idhekacce āsavaṭṭhānīyā dhammā saṅghe pātubhavanti, atha satthā sāvakānaṃ sikkhāpadaṃ paññāpeti tesaṃyeva āsavaṭṭhānīyānaṃ dhammānaṃ paṭighātāya.
밧달리여, 여기 번뇌의 바탕이 되는 어떤 법들이 승가에 나타날 때, 그때 스승은 바로 그 번뇌의 바탕이 되는 법들을 막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Na tāva, bhaddāli, idhekacce āsavaṭṭhānīyā dhammā saṅghe pātubhavanti yāva na saṅgho mahattaṃ patto hoti.
밧달리여, 승가가 큰 규모에 이르지 않는 한, 여기 번뇌의 바탕이 되는 어떤 법들은 승가에 나타나지 않는다.
Yato ca kho, bhaddāli, saṅgho mahattaṃ patto hoti, atha idhekacce āsavaṭṭhānīyā dhammā saṅghe pātubhavanti.
밧달리여, 승가가 큰 규모에 이를 때, 그때 여기 번뇌의 바탕이 되는 어떤 법들이 승가에 나타난다.
Atha satthā sāvakānaṃ sikkhāpadaṃ paññāpeti tesaṃyeva āsavaṭṭhānīyānaṃ dhammānaṃ paṭighātāya.
그때 스승은 바로 그 번뇌의 바탕이 되는 법들을 막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Na tāva, bhaddāli, idhekacce āsavaṭṭhānīyā dhammā saṅghe pātubhavanti yāva na saṅgho lābhaggaṃ patto hoti, yasaggaṃ patto hoti, bāhusaccaṃ patto hoti, rattaññutaṃ patto hoti.
밧달리여, 승가가 이득의 정점에 이르고, 명성의 정점에 이르고, 많이 배움에 이르고, 오랜 연륜에 이르지 않는 한, 여기 번뇌의 바탕이 되는 어떤 법들은 승가에 나타나지 않는다.
Yato ca kho, bhaddāli, saṅgho rattaññutaṃ patto hoti, atha idhekacce āsavaṭṭhānīyā dhammā saṅghe pātubhavanti, atha satthā sāvakānaṃ sikkhāpadaṃ paññāpeti tesaṃyeva āsavaṭṭhānīyānaṃ dhammānaṃ paṭighātāya.
밧달리여, 승가가 오랜 연륜에 이를 때, 그때 여기 번뇌의 바탕이 되는 어떤 법들이 승가에 나타나고, 그때 스승은 바로 그 번뇌의 바탕이 되는 법들을 막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학습계율을 제정한다.
146
밧달리여, 내가 그대들에게 ‘준마를 길들이는 비유’ 법문을 설하던 때, 그대들은 수가 많지 않았다. 밧달리여, 그대는 그것을 기억하는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밧달리여, 그렇다면 그 일을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여기는가?” “세존이시여, 아마도 제가 오랫동안 스승의 가르침 안에서 배움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밧달리여, 그것만이 이유이고 까닭은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내 마음으로 그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자는 내가 법을 설할 때 절실하게 여기지도, 마음에 새기지도, 온 마음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귀를 열어 법을 듣지도 않는다.’ 그런 줄 알았다. 그래도 밧달리여, 내가 그대에게 ‘준마를 길들이는 비유’ 법문을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새겨 두어라. 내가 말하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하고 밧달리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불확실]
‘‘Appakā kho tumhe, bhaddāli, tena samayena ahuvattha yadā vo ahaṃ ājānīyasusūpamaṃ dhammapariyāyaṃ desesiṃ.
“밧달리여, 내가 그대들에게 혈통 좋은 망아지의 비유로 법문을 설했을 때, 그때 그대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Taṃ sarasi bhaddālī’’ti?
밧달리여, 그것을 기억하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tra, bhaddāli, kaṃ hetuṃ paccesī’’ti?
“밧달리여, 거기서 그대는 무슨 원인을 대는가?”
‘‘So hi nūnāhaṃ, bhante, dīgharattaṃ satthusāsane sikkhāya aparipūrakārī ahosi’’nti.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는 오랫동안 스승의 가르침에서 공부를 온전히 채우지 못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Na kho, bhaddāli, eseva hetu, esa paccayo.
“밧달리여, 그것만이 원인이고 그것만이 조건인 것은 아니다.
Api ca me tvaṃ, bhaddāli, dīgharattaṃ cetasā cetoparicca vidito –
그러나 밧달리여, 나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그대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알았다 —
‘na cāyaṃ moghapuriso mayā dhamme desiyamāne aṭṭhiṃ katvā manasi katvā sabbacetaso samannāharitvā ohitasoto dhammaṃ suṇātī’ti.
‘내가 법을 설할 때 이 쓸모없는 자는 긴요하게 여기고, 마음에 새기고, 온 마음을 기울여, 귀를 기울여 법을 듣지 않는구나.’
Api ca te ahaṃ, bhaddāli, ājānīyasusūpamaṃ dhammapariyāyaṃ desessāmi.
그러나 밧달리여, 내가 그대에게 혈통 좋은 망아지의 비유로 법문을 설하겠다.
Taṃ suṇāhi, sādhukaṃ manasi karohi;
그것을 잘 들어라, 마음을 잘 기울여라.
bhāsissāmī’’ti.
이제 말하리라.”
‘‘Evaṃ, bhante’’ti kho āyasmā bhaddāli bhagavato paccassosi.
“예, 세존이시여” 하고 밧달리 존자가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147
“밧달리여, 이를테면 솜씨 좋은 말 조련사가 훌륭한 준마를 얻으면, 먼저 재갈 물리는 훈련부터 시킨다. 재갈 물리는 훈련을 받는 말은, 이런 훈련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말이 으레 그렇듯, 얼마간은 이리저리 날뛰고 몸부림치고 버둥거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말은 거듭된 훈련과 차근차근한 훈련으로 그 단계에서 길이 든다. 밧달리여, 훌륭한 준마가 그 단계에서 길이 들면, 조련사는 그다음으로 멍에를 씌우는 훈련을 시킨다. 멍에를 씌우는 훈련을 받는 말도, 이런 훈련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말이 으레 그렇듯, 얼마간은 이리저리 날뛰고 몸부림치고 버둥거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말은 거듭된 훈련과 차근차근한 훈련으로 그 단계에서 길이 든다. 밧달리여, 훌륭한 준마가 그 단계에서 길이 들면, 조련사는 그다음으로 또 다른 훈련을 시킨다. 걸음 바꾸기, 원을 그리며 돌기, 발굽 놀리기, 달리기, 전투 대비, 왕의 말다운 품위, 왕의 혈통다운 자질, 최고의 속도, 최고의 기량, 최고의 온순함을 익히는 훈련이다. 이 훈련을 받는 말도, 이런 훈련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말이 으레 그렇듯, 얼마간은 이리저리 날뛰고 몸부림치고 버둥거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말은 거듭된 훈련과 차근차근한 훈련으로 그 단계에서 길이 든다. 밧달리여, 훌륭한 준마가 그 단계에서 길이 들면, 조련사는 그다음으로 털에 윤기를 내 주는 손질과 마실 것을 보살피는 일을 더해 준다. 밧달리여, 이 열 가지 요소를 갖춘 훌륭한 준마는 왕에게 어울리고, 왕이 쓰기에 알맞아, 왕의 한 부분으로 꼽힌다.[불확실]
‘‘Seyyathāpi, bhaddāli, dakkho assadamako bhadraṃ assājānīyaṃ labhitvā paṭhameneva mukhādhāne kāraṇaṃ kāreti.
“밧달리여, 마치 능숙한 말 조련사가 혈통 좋은 훌륭한 말을 얻어 먼저 재갈 물리기에서 훈련을 시키는 것과 같다.
Tassa mukhādhāne kāraṇaṃ kāriyamānassa hontiyeva visūkāyitāni visevitāni vipphanditāni kānici kānici, yathā taṃ akāritapubbaṃ kāraṇaṃ kāriyamānassa.
그가 재갈 물리기에서 훈련을 받을 때, 전에 받아 본 적 없는 훈련을 받는 것이 그러하듯, 이러저러한 뒤틀림과 어깃장과 몸부림이 있기 마련이다.
So abhiṇhakāraṇā anupubbakāraṇā tasmiṃ ṭhāne parinibbāyati.
그는 거듭된 훈련과 차례차례의 훈련으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Yato kho, bhaddāli, bhadro assājānīyo abhiṇhakāraṇā anupubbakāraṇā tasmiṃ ṭhāne parinibbuto hoti, tamenaṃ assadamako uttari kāraṇaṃ kāreti yugādhāne.
밧달리여, 혈통 좋은 훌륭한 말이 거듭된 훈련과 차례차례의 훈련으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말 조련사는 그에게 다시 멍에 씌우기에서 훈련을 시킨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Tassa yugādhāne kāraṇaṃ kāriyamānassa hontiyeva visūkāyitāni visevitāni vipphanditāni kānici kānici, yathā taṃ akāritapubbaṃ kāraṇaṃ kāriyamānassa.
그가 멍에 씌우기에서 훈련을 받을 때, 전에 받아 본 적 없는 훈련을 받는 것이 그러하듯, 이러저러한 뒤틀림과 어깃장과 몸부림이 있기 마련이다.
So abhiṇhakāraṇā anupubbakāraṇā tasmiṃ ṭhāne parinibbāyati.
그는 거듭된 훈련과 차례차례의 훈련으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Yato kho, bhaddāli, bhadro assājānīyo abhiṇhakāraṇā anupubbakāraṇā tasmiṃ ṭhāne parinibbuto hoti, tamenaṃ assadamako uttari kāraṇaṃ kāreti anukkame maṇḍale khurakāse dhāve davatte rājaguṇe rājavaṃse uttame jave uttame haye uttame sākhalye.
밧달리여, 혈통 좋은 훌륭한 말이 거듭된 훈련과 차례차례의 훈련으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말 조련사는 그에게 다시 걸음 맞추기, 원 돌기, 발굽 끌기, 질주, 먼 거리 달리기, 왕을 태우는 몸가짐, 왕가의 품격, 최상의 속력, 최상의 말다움, 최상의 온순함에서 훈련을 시킨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Tassa uttame jave uttame haye uttame sākhalye kāraṇaṃ kāriyamānassa hontiyeva visūkāyitāni visevitāni vipphanditāni kānici kānici, yathā taṃ akāritapubbaṃ kāraṇaṃ kāriyamānassa.
그가 최상의 속력, 최상의 말다움, 최상의 온순함에서 훈련을 받을 때, 전에 받아 본 적 없는 훈련을 받는 것이 그러하듯, 이러저러한 뒤틀림과 어깃장과 몸부림이 있기 마련이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o abhiṇhakāraṇā anupubbakāraṇā tasmiṃ ṭhāne parinibbāyati.
그는 거듭된 훈련과 차례차례의 훈련으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Yato kho, bhaddāli, bhadro assājānīyo abhiṇhakāraṇā anupubbakāraṇā tasmiṃ ṭhāne parinibbuto hoti, tamenaṃ assadamako uttari vaṇṇiyañca pāṇiyañca anuppavecchati.
밧달리여, 혈통 좋은 훌륭한 말이 거듭된 훈련과 차례차례의 훈련으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말 조련사는 그에게 다시 털 손질과 물 씻김을 베푼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Imehi kho, bhaddāli, dasahaṅgehi samannāgato bhadro assājānīyo rājāraho hoti rājabhoggo rañño aṅganteva saṅkhyaṃ gacchati.
밧달리여, 이 열 가지 요소를 갖춘 혈통 좋은 훌륭한 말은 왕에게 어울리고, 왕이 쓸 만하며, 왕의 한 부분이라고 헤아려진다.
밧달리여, 이와 같이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을 만하고, 손님으로 대접받을 만하다. 보시받을 만하고 합장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어떤 열 가지인가? 밧달리여, 비구는 무학의 바른 견해를 갖추고, 무학의 바른 사유를 갖춘다. 무학의 바른 말과 무학의 바른 행위를 갖추고, 무학의 바른 생계를 갖춘다. 무학의 바른 노력과 무학의 바른 새김을 갖추고, 무학의 바른 삼매를 갖춘다. 또 무학의 바른 지혜를 갖추고, 무학의 바른 해탈을 갖춘다. 밧달리여, 이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을 만하고, 손님으로 대접받을 만하다. 보시받을 만하고 합장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Evameva kho, bhaddāli, dasahi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āhuneyyo hoti pāhun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a.
“밧달리여, 이와 같이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대접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Katamehi dasahi?
어떤 열 가지인가?
Idha, bhaddāli, bhikkhu asekhāya sammādiṭṭhiyā samannāgato hoti, asekhena sammāsaṅkappena samannāgato hoti, asekhāya sammāvācāya samannāgato hoti, asekhena sammākammantena samannāgato hoti, asekhena sammāājīvena samannāgato hoti, asekhena sammāvāyāmena samannāgato hoti, asekhāya sammāsatiyā samannāgato hoti, asekhena sammāsamādhinā samannāgato hoti, asekhena sammāñāṇena samannāgato hoti, asekhāya sammāvimuttiyā samannāgato hoti –
밧달리여, 여기 비구는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견해를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사유를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말을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행위를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생계를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정진을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마음챙김을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삼매를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앎을 갖추고, 더 배울 것 없는 바른 해탈을 갖춘다 —
imehi kho, bhaddāli, dasahi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āhuneyyo hoti pāhun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ti.
밧달리여, 이 열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공양받아 마땅하고, 대접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밧달리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밧달리 경, 다섯 번째가 끝났다.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o āyasmā bhaddāli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밧달리 존자는 마음이 흡족하여,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며 받들었다.
Bhaddālisuttaṃ niṭṭhitaṃ pañcamaṃ.
밧달리 경이 끝났다, 다섯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