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Cūḷadhammasamādānasuttaṃ
5. 법을 받아 지님에 관한 짧은 경
468
이렇게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사밧티의 제타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Evaṃ me sutaṃ –
나는 이렇게 들었다.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bhikkhavo’’ti.
“비구들이여.”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예,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법을 받아 지니는 방식에는 네 가지가 있다. 어떤 네 가지인가? 지금은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 있다. 지금도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 있다. 또 지금은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 있다.”
‘‘cattārimāni, bhikkhave, dhammasamādānāni.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법을 받아 지님이 있다.
Katamāni cattāri?
무엇이 넷인가?
Atth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sukhaṃ āyatiṃ duk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지금은 즐겁고 앞으로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 있다.
atth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dukkhañceva āyatiñca duk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지금도 괴롭고 앞으로도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 있다.
atth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dukkhaṃ āyatiṃ su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지금은 괴롭고 앞으로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 있다.
atth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sukhañceva āyatiñca su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지금도 즐겁고 앞으로도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 있다.”
469
“비구들이여, 지금은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믿는다.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에 빠져든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 유행자들을 곁에 두고 시중을 받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문과 바라문들은 욕망에서 무슨 앞날의 두려움을 보았기에 욕망을 버리라고 할까? 어째서 욕망을 철저히 알라고 가르칠까? 이 젊고 부드럽고 솜털 난 여자 유행자의 팔이 닿는 느낌은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말하며 그들은 욕망에 빠져든다. 욕망에 빠져든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악처, 나쁜 곳, 파멸의 곳, 지옥에 태어난다. 거기서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사문과 바라문들이 욕망에서 앞날의 두려움을 보고 욕망을 버리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욕망을 철저히 알라고 가르친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욕망 때문에, 욕망에서 비롯하여 우리는 지금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고 있다.’
‘‘Katamañca,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sukhaṃ āyatiṃ dukkhavipākaṃ?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지금은 즐겁고 앞으로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인가?
Santi, bhikkhave,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보아 —
‘natthi kāmesu doso’ti.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고 한다.
Te kāmesu pātabyataṃ āpajjanti.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빠져든다.
Te kho moḷibaddhāhi paribbājikāhi paricārenti.
그들은 머리를 상투로 묶은 여자 유행자들과 즐긴다.
Te evamāhaṃsu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kiṃsu nām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kāmesu anāgatabhayaṃ sampassamānā kāmānaṃ pahānamāhaṃsu, kām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nti?
‘저 존경스러운 사문과 바라문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서 무엇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감각적 욕망을 온전히 아는 것을 드러내는가?
Sukho imissā paribbājikāya taruṇāya mudukāya lomasāya bāhāya samphasso’ti te kāmesu pātabyataṃ āpajjanti.
이 여자 유행자의 연하고 부드럽고 솜털 난 팔의 감촉은 즐겁다’고. 그러면서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빠져든다.
Te kāmesu pātabyataṃ āpajjitvā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anti.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빠져든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난다.
Te tattha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anti.
그들은 거기서 괴롭고 격심하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느낀다.
Te evamāhaṃsu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idaṃ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kāmesu anāgatabhayaṃ sampassamānā kāmānaṃ pahānamāhaṃsu, kām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nti, ime hi mayaṃ kāmahetu kāmanidānaṃ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āmā’ti.
‘저 존경스러운 사문과 바라문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서 이것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감각적 욕망을 온전히 아는 것을 드러냈구나. 우리는 감각적 욕망을 원인으로, 감각적 욕망을 근원으로 이 괴롭고 격심하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구나’라고.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보자. 무더운 철의 마지막 달에 말루바 덩굴의 꼬투리가 터진다. 그 씨앗이 어느 살라 나무 밑동에 떨어진다. 그러면 그 나무에 깃든 신은 겁을 먹고 놀라 두려움에 떤다. 이때 그 신의 벗과 동료, 친지와 혈육이 한데 모인다. 동산의 신, 숲의 신, 나무의 신, 약초와 풀과 큰 나무에 깃든 신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달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말루바 씨앗은 공작이 삼켜 버릴지도 모르고, 짐승이 먹을지도 모릅니다. 들불에 탈지도 모르고, 숲일꾼이 파내 버릴지도 모르고, 흰개미가 쓸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하는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씨앗은 공작이 삼키지도, 짐승이 먹지도 않았다. 들불이 태우지도, 숲일꾼이 파내지도, 흰개미가 쓸어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기의 비구름이 비를 흠뻑 내려 주어, 씨앗은 아무 탈 없이 자라난다.[불확실]
Seyyathāpi, bhikkhave, gimhānaṃ pacchime māse māluvāsipāṭikā phal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말루와 덩굴의 씨 꼬투리가 터진다고 하자.
Atha kho taṃ, bhikkhave, māluvābījaṃ aññatarasmiṃ sālamūle nipateyya.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말루와 씨앗이 어떤 살라 나무 밑에 떨어진다고 하자.
Atha kho, bhikkhave, yā tasmiṃ sāle adhivatthā devatā sā bhītā saṃviggā santāsaṃ āpajjeyya.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살라 나무에 깃들어 사는 천신은 두려워하고 떨며 겁에 질릴 것이다.
Atha kho, bhikkhave, tasmiṃ sāle adhivatthāya devatāya mittāmaccā ñātisālohitā ārāmadevatā vanadevatā rukkhadevatā osadhitiṇavanappatīsu adhivatthā devatā saṅgamma samāgamma evaṃ samassāseyyuṃ –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살라 나무에 깃들어 사는 천신의 친구와 동료, 친척과 혈육, 원림의 천신들, 숲의 천신들, 나무의 천신들, 약초와 풀과 큰 나무들에 깃들어 사는 천신들이 모여들고 함께 모여 이렇게 위로할 것이다 —
‘mā bhavaṃ bhāyi, mā bhavaṃ bhāyi;
‘그대는 두려워 마시오, 그대는 두려워 마시오.
appeva nāmetaṃ māluvābījaṃ moro vā gileyya, mago vā khādeyya, davaḍāho vā ḍaheyya, vanakammikā vā uddhareyyuṃ, upacikā vā uṭṭhaheyyuṃ, abījaṃ vā panassā’ti.
혹시 이 말루와 씨앗을 공작이 삼켜 버리거나, 사슴이 씹어 먹거나, 들불이 태워 버리거나, 나무꾼들이 뽑아 버리거나, 흰개미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싹 틔우지 못할 씨앗일지도 모르오’라고.[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tha kho taṃ, bhikkhave, māluvābījaṃ neva moro gileyya, na mago khādeyya, na davaḍāho ḍaheyya, na vanakammikā uddhareyyuṃ, na upacikā uṭṭhaheyyuṃ, bījañca panassa taṃ pāvussakena meghena abhippavuṭṭhaṃ sammadeva viruheyya.
비구들이여, 그런데 그 말루와 씨앗을 공작이 삼키지도 않고, 사슴이 씹어 먹지도 않고, 들불이 태우지도 않고, 나무꾼들이 뽑아 버리지도 않고, 흰개미가 일어나지도 않고, 그 씨앗이 우기의 비구름에 흠뻑 젖어 제대로 싹튼다고 하자.
어리고 부드럽고 솜털이 난 말루바 덩굴이 가늘게 늘어지며 그 살라 나무를 타고 오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 나무에 깃든 신은 이런 생각을 한다. ‘벗과 동료, 친지와 혈육인 신들은 말루바 씨앗에서 무슨 앞날의 두려움을 보았기에 한데 모여 이렇게 달랬을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말루바 씨앗은 공작이 삼켜 버릴지도 모르고, 짐승이 먹을지도 모릅니다. 들불에 탈지도 모르고, 숲일꾼이 파내 버릴지도 모르고, 흰개미가 쓸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하는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이 어리고 부드럽고 솜털 난 덩굴이 몸을 감아 올 때의 느낌은 이렇게 좋은데.’ 덩굴은 살라 나무를 계속 휘감더니 꼭대기에 덮개처럼 잎을 펼친다. 무성하게 늘어지고 나서는 나무의 크고 굵은 줄기들을 쪼개 버린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그 나무에 깃든 신은 다시 이런 생각을 한다. ‘벗과 동료, 친지와 혈육인 신들이 말루바 씨앗에서 앞날의 두려움을 보고 한데 모여 이렇게 달랜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말루바 씨앗은 공작이 삼켜 버릴지도 모르고, 짐승이 먹을지도 모릅니다. 들불에 탈지도 모르고, 숲일꾼이 파내 버릴지도 모르고, 흰개미가 쓸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싹을 틔우지 못하는 씨앗일지도 모릅니다.” 말루바 씨앗 때문에 내가 지금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고 있구나.’[불확실]
Sāssa māluvālatā taruṇā mudukā lomasā vilambinī, sā taṃ sālaṃ upaniseveyya.
그 말루와 덩굴은 연하고 부드럽고 솜털이 나고 늘어져서, 그것이 그 살라 나무에 달라붙을 것이다.
Atha kho, bhikkhave, tasmiṃ sāle adhivatthāya devatāya evamassa –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살라 나무에 깃들어 사는 천신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kiṃsu nāma te bhonto mittāmaccā ñātisālohitā ārāmadevatā vanadevatā rukkhadevatā osadhitiṇavanappatīsu adhivatthā devatā māluvābīje anāgatabhayaṃ sampassamānā saṅgamma samāgamma evaṃ samassāsesuṃ –
‘저 존경스러운 친구와 동료, 친척과 혈육, 원림의 천신들, 숲의 천신들, 나무의 천신들, 약초와 풀과 큰 나무들에 깃들어 사는 천신들은 말루와 씨앗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서 무엇 때문에 모여들고 함께 모여 이렇게 위로했던가 —
‘‘mā bhavaṃ bhāyi mā bhavaṃ bhāyi, appeva nāmetaṃ māluvābījaṃ moro vā gileyya, mago vā khādeyya, davaḍāho vā ḍaheyya, vanakammikā vā uddhareyyuṃ, upacikā vā uṭṭhaheyyuṃ, abījaṃ vā panassā’’ti;
“그대는 두려워 마시오, 그대는 두려워 마시오. 혹시 이 말루와 씨앗을 공작이 삼켜 버리거나, 사슴이 씹어 먹거나, 들불이 태워 버리거나, 나무꾼들이 뽑아 버리거나, 흰개미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싹 틔우지 못할 씨앗일지도 모르오”라고;[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ukho imissā māluvālatāya taruṇāya mudukāya lomasāya vilambiniyā samphasso’ti.
이 말루와 덩굴의 연하고 부드럽고 솜털 나고 늘어진 감촉은 즐겁다’고.
Sā taṃ sālaṃ anuparihareyya.
그 덩굴은 그 살라 나무를 휘감을 것이다.
Sā taṃ sālaṃ anupariharitvā upari viṭabhiṃ kareyya.
그 덩굴은 그 살라 나무를 휘감고서 위로 차일을 이룰 것이다.
Upari viṭabhiṃ karitvā oghanaṃ janeyya.
위로 차일을 이루고서 짓누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Oghanaṃ janetvā ye tassa sālassa mahantā mahantā khandhā te padāleyya.
짓누름을 만들어 내고서, 그 살라 나무의 굵고 굵은 줄기들을 쪼개 버릴 것이다.
Atha kho, bhikkhave, tasmiṃ sāle adhivatthāya devatāya evamassa –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살라 나무에 깃들어 사는 천신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idaṃ kho te bhonto mittāmaccā ñātisālohitā ārāmadevatā vanadevatā rukkhadevatā osadhitiṇavanappatīsu adhivatthā devatā māluvābīje anāgatabhayaṃ sampassamānā saṅgamma samāgamma evaṃ samassāsesuṃ –
‘저 존경스러운 친구와 동료, 친척과 혈육, 원림의 천신들, 숲의 천신들, 나무의 천신들, 약초와 풀과 큰 나무들에 깃들어 사는 천신들은 말루와 씨앗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서 이것 때문에 모여들고 함께 모여 이렇게 위로했구나 —
‘‘mā bhavaṃ bhāyi mā bhavaṃ bhāyi, appeva nāmetaṃ māluvābījaṃ moro vā gileyya, mago vā khādeyya, davaḍāho vā ḍaheyya, vanakammikā vā uddhareyyuṃ, upacikā vā uṭṭhaheyyuṃ abījaṃ vā panassā’’ti.
“그대는 두려워 마시오, 그대는 두려워 마시오. 혹시 이 말루와 씨앗을 공작이 삼켜 버리거나, 사슴이 씹어 먹거나, 들불이 태워 버리거나, 나무꾼들이 뽑아 버리거나, 흰개미가 일어나거나, 아니면 싹 틔우지 못할 씨앗일지도 모르오”라고.[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Yañcāhaṃ māluvābījahetu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āmī’ti.
그런데 나는 말루와 씨앗 때문에 이 괴롭고 격심하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구나’라고.
비구들이여, 꼭 그와 같이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 하고 말하며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에 빠져든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 유행자들을 곁에 두고 시중을 받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문과 바라문들은 욕망에서 무슨 앞날의 두려움을 보았기에 욕망을 버리라고 할까? 어째서 욕망을 철저히 알라고 가르칠까? 이 젊고 부드럽고 솜털 난 여자 유행자의 팔이 닿는 느낌은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말하며 그들은 욕망에 빠져든다. 욕망에 빠져든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악처, 나쁜 곳, 파멸의 곳, 지옥에 태어난다. 거기서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 사문과 바라문들이 욕망에서 앞날의 두려움을 보고 욕망을 버리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욕망을 철저히 알라고 가르친 것도 이 때문이었구나. 욕망 때문에, 욕망에서 비롯하여 우리는 지금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지금은 즐겁지만 나중에는 괴로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라 한다.”
Evameva kho, bhikkhave, santi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natthi kāmesu dos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보아 ‘감각적 욕망에는 허물이 없다’고 한다.
Te kāmesu pātabyataṃ āpajjanti.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빠져든다.
Te moḷibaddhāhi paribbājikāhi paricārenti.
그들은 머리를 상투로 묶은 여자 유행자들과 즐긴다.
Te evamāhaṃsu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kiṃsu nām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kāmesu anāgatabhayaṃ sampassamānā kāmānaṃ pahānamāhaṃsu, kām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nti?
‘저 존경스러운 사문과 바라문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서 무엇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감각적 욕망을 온전히 아는 것을 드러내는가?
Sukho imissā paribbājikāya taruṇāya mudukāya lomasāya bāhāya samphasso’ti.
이 여자 유행자의 연하고 부드럽고 솜털 난 팔의 감촉은 즐겁다’고.
Te kāmesu pātabyataṃ āpajjanti.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빠져든다.
Te kāmesu pātabyataṃ āpajjitvā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anti.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빠져든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난다.
Te tattha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anti.
그들은 거기서 괴롭고 격심하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느낀다.
Te evamāhaṃsu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idaṃ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kāmesu anāgatabhayaṃ sampassamānā kāmānaṃ pahānamāhaṃsu, kāmānaṃ pariññaṃ paññapenti.
‘저 존경스러운 사문과 바라문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미래의 두려움을 보고서 이것 때문에 감각적 욕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감각적 욕망을 온전히 아는 것을 드러냈구나.
Ime hi mayaṃ kāmahetu kāmanidānaṃ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āmā’ti.
우리는 감각적 욕망을 원인으로, 감각적 욕망을 근원으로 이 괴롭고 격심하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느끼는구나’라고.
Idaṃ vuccat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sukhaṃ āyatiṃ duk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지금은 즐겁고 앞으로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라 한다.
470
“비구들이여, 지금도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 어떤 이는 옷을 입지 않는 수행자가 된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먹은 뒤에는 손을 핥아 닦는다. 오라고 해도 가지 않고, 서라고 해도 서지 않는다. 가져다준 음식도, 자기를 위해 만든 음식도, 초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솥 아가리에서 곧바로 받지 않고, 그릇 아가리에서 곧바로 받지 않는다. 문지방 너머로 주는 것도, 몽둥이 너머로 주는 것도, 절굿공이 너머로 주는 것도 받지 않는다. 둘이 함께 먹고 있을 때 주는 것도 받지 않는다. 임신한 여인이나 젖먹이를 안은 여인, 남자와 함께 있는 여인이 주는 것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모으는 곳, 개가 기다리고 있는 곳, 파리가 떼 지어 날아다니는 곳에서도 받지 않는다. 물고기도 고기도 먹지 않는다. 곡주도 과실주도 마시지 않고, 곡식 찌꺼기 시큼한 물도 마시지 않는다.[불확실]
‘‘Katamañca,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dukkhañceva āyatiñca dukkhavipākaṃ?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지금도 괴롭고 앞으로도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인가?
Idha, bhikkhave, ekacco acelako hoti muttācāro hatthāpalekhano, naehibhaddantiko, natiṭṭhabhaddantiko, nābhihaṭaṃ, na uddissakataṃ, na nimantanaṃ sādiyati, so na kumbhimukhā paṭiggaṇhāti, na kaḷopimukhā paṭiggaṇhāti, na eḷakamantaraṃ, na daṇḍamantaraṃ, na musalamantaraṃ, na dvinnaṃ bhuñjamānānaṃ, na gabbhiniyā, na pāyamānāya, na purisantaragatāya, na saṅkittīsu, na yattha sā upaṭṭhito hoti, na yattha makkhikā saṇḍasaṇḍacārinī, na macchaṃ, na maṃsaṃ, na suraṃ, na merayaṃ, na thusodakaṃ piv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나체 수행자로서 관습을 벗어나 손을 핥고, ‘오십시오’ 해도 오지 않고, ‘서십시오’ 해도 서지 않으며, 가져다준 음식도, 자기를 위해 특별히 차린 음식도, 초청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항아리 아가리에서 받지 않고, 단지 아가리에서 받지 않으며, 문지방 사이에서도, 막대기 사이에서도, 절굿공이 사이에서도 받지 않고, 두 사람이 먹고 있을 때도, 임신한 여자에게서도, 젖 먹이는 여자에게서도, 남자와 함께 있는 여자에게서도 받지 않으며, 나누어 주려고 모아 둔 음식에서도, 개가 곁에 서 있는 곳에서도, 파리 떼가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곳에서도 받지 않는다. 생선도 받지 않고, 고기도 받지 않으며, 곡주도 과실주도 쌀뜨물도 마시지 않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그는 한 집에서만 받아 한 입만 먹기도 한다. 두 집에서만 받아 두 입만 먹기도 하고, 그렇게 일곱 집에서 받아 일곱 입만 먹기도 한다. 한 번 담아 준 것으로 연명하기도 하고, 두 번 담아 준 것으로 연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일곱 번 담아 준 것으로 연명하기도 한다.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하고, 이틀에 한 끼를 먹기도 하며, 그렇게 이레에 한 끼를 먹기도 한다. 이렇게 보름에 이르기까지 끼니를 돌려 가며 거르는 수행에 몰두하여 지낸다.[불확실]
So ekāgāriko vā hoti ekālopiko, dvāgāriko vā hoti dvālopiko…pe… sattāgāriko vā hoti sattālopiko.
그는 한 집에서만 받아 한 입만 먹기도 하고, 두 집에서만 받아 두 입만 먹기도 하고, 세 집에서만 받아 세 입만 먹기도 하고, 네 집에서만 받아 네 입만 먹기도 하고, 다섯 집에서만 받아 다섯 입만 먹기도 하고, 여섯 집에서만 받아 여섯 입만 먹기도 하고, 일곱 집에서만 받아 일곱 입만 먹기도 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kissāpi dattiyā yāpeti, dvīhipi dattīhi yāpeti… sattahipi dattīhi yāpeti.
한 접시로도 지내고, 두 접시로도 지내고, 세 접시로도 지내고, 네 접시로도 지내고, 다섯 접시로도 지내고, 여섯 접시로도 지내고, 일곱 접시로도 지낸다.
Ekāhikampi āhāraṃ āhāreti, dvīhikampi āhāraṃ āhāreti… sattāhikampi āhāraṃ āhāreti.
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하고, 사흘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하고, 나흘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하고, 닷새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하고, 엿새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이레에 한 번 음식을 먹기도 한다.
Iti evarūpaṃ addhamāsikampi pariyāyabhattabhojanānuyogamanuyutto viharati.
이와 같이 보름에 한 번에 이르기까지, 정해진 때에만 음식을 먹는 수행에 몰두하여 지낸다.
그는 채소, 기장, 야생 쌀, 가죽 부스러기, 물풀, 쌀겨, 밥 위의 눌은 거품, 깻묵, 풀, 소똥을 먹으며 지내기도 한다. 숲의 뿌리와 열매를 먹기도 하고, 떨어진 열매로 연명하기도 한다. 또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기도 한다. 삼베와 섞어 짠 옷, 시체를 쌌던 천, 누더기, 나무껍질 천을 입기도 한다. 영양 가죽이나 그 조각, 쿠사 풀로 엮은 옷, 나무껍질로 엮은 옷, 널빤지로 엮은 옷을 입기도 한다. 머리털로 짠 담요, 말총으로 짠 담요, 올빼미 깃털을 걸치기도 한다. 머리털과 수염을 뽑는 수행자가 되어 그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앉지 않고 서 있기만 하며 자리를 물리치기도 하고, 쪼그려 앉아 있는 수행에 몰두하기도 한다. 가시 위에 눕는 수행자가 되어 가시 위에 잠자리를 펴기도 한다. 저녁까지 세 번씩 물에 들어가는 일에 몰두하며 지내기도 한다.
So sākabhakkho vā hoti, sāmākabhakkho vā hoti, nīvārabhakkho vā hoti, daddulabhakkho vā hoti, haṭabhakkho vā hoti, kaṇabhakkho vā hoti, ācāmabhakkho vā hoti, piññākabhakkho vā hoti, tiṇabhakkho vā hoti, gomayabhakkho vā hoti, vanamūlaphalāhāro yāpeti pavattaphalabhojī.
그는 채소만 먹기도 하고, 기장만 먹기도 하고, 야생 쌀만 먹기도 하고, 가죽 부스러기만 먹기도 하고, 물풀만 먹기도 하고, 쌀겨만 먹기도 하고, 쌀뜨물만 먹기도 하고, 깻묵만 먹기도 하고, 풀만 먹기도 하고, 소똥만 먹기도 하며, 숲의 뿌리와 열매를 먹고 지내며 저절로 떨어진 열매를 먹는다.
So sāṇānipi dhāreti, masāṇānipi dhāreti, chavadussānipi dhāreti, paṃsukūlānipi dhāreti, tirīṭānipi dhāreti, ajinampi dhāreti, ajinakkhipampi dhāreti, kusacīrampi dhāreti, vākacīrampi dhāreti, phalakacīrampi dhāreti, kesakambalampi dhāreti, vāḷakambalampi dhāreti, ulūkapakkhampi dhāreti, kesamassulocakopi hoti, kesamassulocanānuyogamanuyutto, ubbhaṭṭhakopi hoti, āsanapaṭikkhitto, ukkuṭikopi hoti ukkuṭikappadhānamanuyutto, kaṇṭakāpassayikopi hoti, kaṇṭakāpassaye seyyaṃ kappeti, sāyatatiyakampi udakorohanānuyogamanuyutto viharati.
그는 삼베옷도 입고, 섞어 짠 옷도 입고, 시체를 쌌던 천도 입고, 넝마도 입고, 로드라 나무껍질 옷도 입고, 영양 가죽도 입고, 영양 가죽 망토도 입고, 꾸사 풀로 엮은 옷도 입고, 나무껍질로 엮은 옷도 입고, 나무판을 엮은 옷도 입고, 머리카락으로 짠 담요도 입고, 짐승 털로 짠 담요도 입고, 올빼미 깃털 옷도 입으며,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자이기도 하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수행에 몰두하고, 늘 서 있는 자이기도 하여 자리를 거부하며, 쪼그려 앉는 자이기도 하여 쪼그려 앉는 정진에 몰두하고, 가시 위에 눕는 자이기도 하여 가시 자리에 잠자리를 마련하며, 저녁을 세 번째로 하여 물에 들어가는 수행에 몰두하여 지낸다.
이렇게 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몸을 달구고 괴롭히는 일에 몰두하며 지낸다. 그러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악처, 나쁜 곳, 파멸의 곳, 지옥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지금도 괴롭고 나중에도 괴로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라 한다.”
Iti evarūpaṃ anekavihitaṃ kāyassa ātāpanaparitāpanānuyogamanuyutto viharati.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몸을 태우고 괴롭히는 수행에 몰두하여 지낸다.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ati.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난다.
Idaṃ vuccat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dukkhañceva āyatiñca duk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지금도 괴롭고 앞으로도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라 한다.
471
“비구들이여, 지금은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 어떤 이는 타고나기를 탐욕이 강하다. 그래서 탐욕에서 생기는 괴로움과 근심을 자주 겪는다. 타고나기를 성냄이 강하여, 성냄에서 생기는 괴로움과 근심을 자주 겪기도 한다. 타고나기를 어리석음이 강하여,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괴로움과 근심을 자주 겪기도 한다. 그는 괴로워하고 근심하며 눈물 젖은 얼굴로 울면서도, 온전하고 청정한 수행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지금은 괴롭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라 한다.”
‘‘Katamañca,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dukkhaṃ āyatiṃ sukhavipākaṃ?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지금은 괴롭고 앞으로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인가?
Idha, bhikkhave, ekacco pakatiyā tibbarāgajātiko hoti, so abhikkhaṇaṃ rāgaj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e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본래 탐욕이 심한 성품이어서, 그는 자주 탐욕에서 생긴 괴로움과 불만을 겪는다.
pakatiyā tibbadosajātiko hoti, so abhikkhaṇaṃ dosaj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eti;
본래 성냄이 심한 성품이어서, 그는 자주 성냄에서 생긴 괴로움과 불만을 겪는다.
pakatiyā tibbamohajātiko hoti, so abhikkhaṇaṃ mohaj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eti.
본래 어리석음이 심한 성품이어서, 그는 자주 어리석음에서 생긴 괴로움과 불만을 겪는다.
So sahāpi dukkhena, sahāpi domanassena, assumukhopi rudamāno paripuṇṇaṃ parisuddhaṃ brahmacariyaṃ carati.
그는 괴로움을 안고서도, 불만을 안고서도, 얼굴이 눈물에 젖어 울면서도 온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jjati.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
Idaṃ vuccat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dukkhaṃ āyatiṃ su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지금은 괴롭고 앞으로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라 한다.
472
“비구들이여, 지금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 어떤 이는 타고나기를 탐욕이 강하지 않다. 그래서 탐욕에서 생기는 괴로움과 근심을 자주 겪지 않는다. 타고나기를 성냄이 강하지 않아, 성냄에서 생기는 괴로움과 근심도 자주 겪지 않는다. 타고나기를 어리석음이 강하지 않아,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괴로움과 근심도 자주 겪지 않는다.
‘‘Katamañca,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sukhañceva āyatiñca sukhavipākaṃ?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지금도 즐겁고 앞으로도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인가?
Idha, bhikkhave, ekacco pakatiyā na tibbarāgajātiko hoti, so na abhikkhaṇaṃ rāgaj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e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본래 탐욕이 심한 성품이 아니어서, 그는 자주 탐욕에서 생긴 괴로움과 불만을 겪지 않는다.
pakatiyā na tibbadosajātiko hoti, so na abhikkhaṇaṃ dosaj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eti;
본래 성냄이 심한 성품이 아니어서, 그는 자주 성냄에서 생긴 괴로움과 불만을 겪지 않는다.
pakatiyā na tibbamohajātiko hoti, so na abhikkhaṇaṃ mohajaṃ dukkhaṃ domanassaṃ paṭisaṃvedeti.
본래 어리석음이 심한 성품이 아니어서, 그는 자주 어리석음에서 생긴 괴로움과 불만을 겪지 않는다.
그는 욕망에서 멀리 떨어지고 해로운 마음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다. 그리하여 생각과 숙고가 있고, 떨쳐 냄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째 선정에 들어 지낸다. 이어서 생각과 숙고가 가라앉아 안이 맑아지고 마음이 한곳으로 모인다. 생각도 숙고도 없이 삼매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둘째 선정에 들어 지낸다. 셋째 선정에도, 넷째 선정에도 그렇게 들어 지낸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계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지금도 즐겁고 나중에도 즐거운 결과를 낳는 방식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법을 받아 지니는 네 가지 방식이다.”[불확실]
S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그는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떠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1선에 들어 머문다.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pe… tatiyaṃ jhāna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하고 마음이 한곳에 모이며,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제3선에 들어 머문다. 제4선에 들어 머문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45:472.5에서 되살렸습니다.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jjati.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
Idaṃ vuccati, bhikkhave, dhammasamādānaṃ paccuppannasukhañceva āyatiñca sukhavipāk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지금도 즐겁고 앞으로도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법을 받아 지님이라 한다.
Imāni kho, bhikkhave, cattāri dhammasamādānānī’’ti.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법을 받아 지님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법을 받아 지니는 방식 작은 경」, 다섯째가 끝났다.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비구들은 크게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받들었다.
Cūḷadhammasamādānasuttaṃ niṭṭhitaṃ pañcamaṃ.
법을 받아 지님에 관한 짧은 경이 끝났다. 다섯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