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Alagaddūpamasuttaṃ
2. 물뱀 비유 경
234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무셨다. 그때 전직 독수리 사냥꾼이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Evaṃ me sutaṃ –
나는 이렇게 들었다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Tena kho pana samayena ariṭṭhassa nāma bhikkhuno gaddhabādhipubbass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hoti –
그런데 그때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라는 비구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다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많은 비구들이 이 소문을 들었다. “전직 독수리 사냥꾼이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다고 한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그래서 비구들은 아릿타 비구를 찾아가 물었다. “벗 아릿타여, 자네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다는 것이 사실인가?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아릿타가 대답했다. “벗들이여, 그렇습니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Assosuṃ kho sambahulā bhikkhū –
여러 비구가 들었다 —
‘‘ariṭṭhassa kira nāma bhikkhuno gaddhabādhipubbass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라는 비구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다고 한다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Atha kho te bhikkhū yena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tenupasaṅkamiṃsu;
그때 그 비구들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davocuṃ –
다가가서는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
‘‘saccaṃ kira te, āvuso ariṭṭh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벗 아릿타여, 그대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다는 것이 사실인가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Evaṃbyākho ahaṃ, āvuso,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벗들이여, 참으로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비구들은 아릿타를 그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따지고 캐묻고 다그쳤다. “벗 아릿타여, 그렇게 말하지 말게. 세존을 비방하지 말게.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지 않네. 세존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네. 벗 아릿타여, 세존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장애가 되는 것을 장애라고 하셨네. 그것을 즐기면 실제로 장애가 된다고도 하셨네. 세존께서는 욕망의 즐거움은 적다고 하셨네. 괴로움과 번뇌는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하셨네. 세존께서는 욕망을 여러 가지에 비유하셨네. 뼈다귀, 고깃덩이, 횃불, 숯불 구덩이, 꿈, 빌린 물건, 나무 열매, 도살장, 칼과 창, 뱀의 머리가 그것이네. 그러면서 욕망에는 괴로움과 번뇌가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하셨네.”
Atha kho tepi bhikkhū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smā pāpakā diṭṭhigatā vivecetukāmā samanuyuñjanti samanugāhanti samanubhāsanti –
그러자 그 비구들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를 그 나쁜 견해에서 떼어 놓고자 캐묻고 따져 묻고 훈계했다 —
‘‘mā hevaṃ, āvuso ariṭṭha, avaca, mā bhagavantaṃ abbhācikkhi;
“벗 아릿타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ṃ, na hi bhagavā evaṃ vadeyya.
세존을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Anekapariyāyenāvuso ariṭṭha, antarāyikā dhammā antarāyikā vuttā bhagavatā, alañca pana te paṭisevato antarāyāya.
벗 아릿타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것들은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다.
Appassād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ādīnavo ettha bhiyyo.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Aṭṭhikaṅkal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pe… maṃsapes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tiṇukk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aṅgārakās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supinak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yācitak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rukkhaphal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asisūn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sattisūl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sappasir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ti.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해골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고깃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풀 횃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숯불 구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빌린 물건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열매 달린 나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칼과 도마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창과 꼬챙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뱀 머리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34.17에서 되살렸습니다.
그래도 아릿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비구들이 그렇게 따지고 캐묻고 다그치는데도, 그 그릇된 견해를 고집스레 붙들고 집착하며 말했다. “벗들이여, 그렇습니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Evampi kho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tehi bhikkhūhi samanuyuñjiyamāno samanugāhiyamāno samanubhāsiyamāno tadeva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thāmasā parāmāsā abhinivissa voharati –
이렇게까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는 그 비구들에게 캐물음을 받고 따져 물음을 받고 훈계를 받으면서도, 바로 그 나쁜 견해를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집착하여 말했다 —
‘‘evaṃbyākho ahaṃ, āvuso,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벗들이여, 참으로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235
비구들은 아릿타를 그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존께 가서 절을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전직 독수리 사냥꾼이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습니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Yato kho te bhikkhū nāsakkhiṃsu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smā pāpakā diṭṭhigatā vivecetuṃ, atha kho te bhikkhū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su;
그 비구들이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를 그 나쁜 견해에서 떼어 놓을 수 없게 되자, 그때 그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ṃsu.
다가가서는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ā kho te bhikkhū bhagavantaṃ etadavocuṃ –
한쪽에 앉은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
‘‘ariṭṭhassa nāma, bhante, bhikkhuno gaddhabādhipubbass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세존이시여,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라는 비구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습니다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전직 독수리 사냥꾼이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다고 한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그래서 저희는 아릿타 비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벗 아릿타여, 자네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다는 것이 사실인가?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그러자 아릿타 비구는 저희에게 대답했습니다. ‘벗들이여, 그렇습니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Assumha kho mayaṃ, bhante –
세존이시여, 저희는 들었습니다 —
‘ariṭṭhassa kira nāma bhikkhuno gaddhabādhipubbass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라는 비구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다고 한다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Atha kho mayaṃ, bhante, yena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tenupasaṅkamimha;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희는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다가갔습니다;
upasaṅkamit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davocumha –
다가가서는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saccaṃ kira te, āvuso ariṭṭh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벗 아릿타여, 그대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다는 것이 사실인가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Evaṃ vutte, bhante,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amhe etadavoca –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하자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evaṃbyākho ahaṃ, āvuso,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벗들이여, 참으로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저희는 아릿타 비구를 그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따지고 캐묻고 다그쳤습니다. ‘벗 아릿타여, 그렇게 말하지 말게. 세존을 비방하지 말게.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지 않네. 세존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네. 벗 아릿타여, 세존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장애가 되는 것을 장애라고 하셨네. 그것을 즐기면 실제로 장애가 된다고도 하셨네. 세존께서는 욕망의 즐거움은 적다고 하셨네. 괴로움과 번뇌는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하셨네. 욕망을 뼈다귀에 비유하는 데서 시작해 뱀의 머리에 비유하는 데까지 이르셨네. 그러면서 욕망에는 괴로움과 번뇌가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하셨네.’
Atha kho mayaṃ, bhante,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smā pāpakā diṭṭhigatā vivecetukāmā samanuyuñjimha samanugāhimha samanubhāsimha –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희는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를 그 나쁜 견해에서 떼어 놓고자 캐묻고 따져 묻고 훈계했습니다 —
‘mā hevaṃ, āvuso ariṭṭha, avaca, mā bhagavantaṃ abbhācikkhi;
‘벗 아릿타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ṃ, na hi bhagavā evaṃ vadeyya.
세존을 잘못 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세존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다.
Anekapariyāyenāvuso ariṭṭha, antarāyikā dhammā antarāyikā vuttā bhagavatā, alañca pana te paṭisevato antarāyāya.
벗 아릿타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고, 그것들은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다.
Appassād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Aṭṭhikaṅkal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pe… sappasir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ti.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해골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고깃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풀 횃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숯불 구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빌린 물건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열매 달린 나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칼과 도마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창과 꼬챙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뱀 머리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34.18에서 되살렸습니다.
그래도 세존이시여, 아릿타 비구는 저희가 그렇게 따지고 캐묻고 다그치는데도, 그 그릇된 견해를 고집스레 붙들고 집착하며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그렇습니다.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아릿타 비구를 그 견해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세존께 말씀드립니다.”
Evampi kho, bhante,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amhehi samanuyuñjiyamāno samanugāhiyamāno samanubhāsiyamāno tadeva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thāmasā parāmāsā abhinivissa voharati –
세존이시여, 이렇게까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는 저희에게 캐물음을 받고 따져 물음을 받고 훈계를 받으면서도, 바로 그 나쁜 견해를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집착하여 말했습니다 —
‘evaṃbyākho ahaṃ, āvuso,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벗들이여, 참으로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Yato kho mayaṃ, bhante, nāsakkhimha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smā pāpakā diṭṭhigatā vivecetuṃ, atha mayaṃ etamatthaṃ bhagavato ārocemā’’ti.
세존이시여, 저희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를 그 나쁜 견해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기에, 그래서 저희는 이 일을 세존께 아룁니다.”
236
세존께서 한 비구를 부르셨다. “비구여, 가서 내 말을 전하여라. 전직 독수리 사냥꾼 아릿타 비구에게 ‘벗 아릿타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비구는 세존께 대답하고 아릿타 비구를 찾아가 말했다. “벗 아릿타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십니다.” “알겠습니다, 벗이여.” 아릿타 비구는 그 비구에게 대답하고 세존께 갔다.
Atha kho bhagavā aññataraṃ bhikkhuṃ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어떤 비구를 부르셨다 —
‘‘ehi tvaṃ, bhikkhu, mama vacanena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āmantehi –
“비구여, 오라. 그대는 내 말로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를 부르라 —
‘satthā taṃ, āvuso ariṭṭha, āmantetī’’’ti.
‘벗 아릿타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신다.’”
‘‘Evaṃ, bhante’’ti kho so bhikkhu bhagavato paṭissutvā, yena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tenupasaṅkami;
“예,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는 세존께 대답하고,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davoca –
다가가서는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
‘‘satthā taṃ, āvuso ariṭṭha, āmantetī’’ti.
“벗 아릿타여, 스승께서 그대를 부르신다.”
‘‘Evamāvuso’’ti kho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tassa bhikkhuno paṭissu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그렇게 하겠네, 벗이여” 하고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는 그 비구에게 대답하고 세존께 다가갔다;
아릿타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세존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릿타여, 그대에게 이런 그릇된 견해가 생겼다는 것이 사실인가? ‘나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다.’” 아릿타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가르치신 법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세존께서 장애가 된다고 하신 것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되기에 충분치 않습니다.”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다가가서는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aṃ kho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bhagavā etadavoca –
한쪽에 앉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saccaṃ kira te, ariṭṭha,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아릿타여, 그대에게 이런 나쁜 견해가 일어났다는 것이 사실인가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나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안다 —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Evaṃbyākho ahaṃ, bhante,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이렇게 압니다 —
‘yathā yem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bhagavatā te paṭisevato nālaṃ antarāyāyā’’’ti.
‘세존께서 장애가 되는 법들이라고 말씀하신 이 법들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어리석은 자여, 내가 누구에게 그렇게 법을 가르쳤다고 그대는 이해하는가? 내가 여러 방식으로 장애가 되는 것을 장애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것을 즐기면 실제로 장애가 된다고도 말했다. 나는 욕망의 즐거움은 적다고 말했다. 괴로움과 번뇌는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욕망을 여러 가지에 비유했다. 뼈다귀, 고깃덩이, 횃불, 숯불 구덩이, 꿈, 빌린 물건, 나무 열매, 도살장, 칼과 창, 뱀의 머리가 그것이다. 그러면서 욕망에는 괴로움과 번뇌가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잘못 붙든 자기 생각으로 우리를 비방한다. 스스로를 파 들어가며 많은 악업을 쌓고 있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오랜 세월 그대에게 해로움과 괴로움이 될 것이다.”
‘‘Kassa kho nāma tvaṃ, moghapurisa, mayā evaṃ dhammaṃ desitaṃ ājānāsi?
“쓸모없는 자여, 그대는 내가 누구에게 그렇게 법을 설했다고 아는가?
Nanu mayā, moghapurisa, anekapariyāyena antarāyikā dhammā antarāyikā vuttā?
쓸모없는 자여,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장애가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Alañca pana te paṭisevato antarāyāya.
그리고 그것들은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다.
Appassādā kāmā vuttā may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나는 감각적 욕망은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Aṭṭhikaṅkalūpamā kāmā vuttā mayā… maṃsapesūpamā kāmā vuttā mayā… tiṇukkūpamā kāmā vuttā mayā… aṅgārakāsūpamā kāmā vuttā mayā… supinakūpamā kāmā vuttā mayā… yācitakūpamā kāmā vuttā mayā… rukkhaphalūpamā kāmā vuttā mayā… asisūnūpamā kāmā vuttā mayā… sattisūlūpamā kāmā vuttā mayā… sappasirūpamā kāmā vuttā may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나는 감각적 욕망은 해골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고깃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풀 횃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숯불 구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빌린 물건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열매 달린 나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칼과 도마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창과 꼬챙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뱀 머리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36.17에서 되살렸습니다.
Atha ca pana tvaṃ, moghapurisa, attanā duggahitena amhe ceva abbhācikkhasi, attānañca khanasi, bahuñca apuññaṃ pasavasi.
그런데도 쓸모없는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붙잡은 것으로 우리를 잘못 전하고, 자신을 파헤치고, 많은 악덕을 쌓는다.
Tañhi te, moghapurisa, bhavissati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ā’’ti.
쓸모없는 자여, 그것은 그대에게 오랜 세월 이롭지 않음과 괴로움이 될 것이다.”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아릿타 비구에게 이 법과 율 안에서 온기라도 생겼다고 하겠느냐?” “어찌 그렇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Ath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āyaṃ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usmīkatopi imasmiṃ dhammavinaye’’ti?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이 아릿타 비구가 이 법과 율에서 온기라도 낸 적이 있는가?”
‘‘Kiñhi siyā, bhante;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no hetaṃ, bhante’’ti.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릿타는 말없이 풀이 죽었다. 어깨를 떨구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아무 대꾸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세존께서 그 모습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그 그릇된 견해 때문에 스스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이 일을 비구들에게 묻겠다.”
Evaṃ vutte,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tuṇhībhūto maṅkubhūto pattakkhandho adhomukho pajjhāyanto appaṭibhāno nisīdi.
이렇게 말씀하시자,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는 말없이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Atha kho bhaga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tuṇhībhūtaṃ maṅkubhūtaṃ pattakkhandhaṃ adhomukhaṃ pajjhāyantaṃ appaṭibhānaṃ viditvā ariṭṭhaṃ bhikkhuṃ gaddhabādhipubbaṃ etadavoca –
그때 세존께서는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가 말없이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아무 대답도 못 하는 것을 아시고,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아릿타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paññāyissasi kho tvaṃ, moghapurisa, etena sakena pāpakena diṭṭhigatena.
“쓸모없는 자여, 그대는 자신의 이 나쁜 견해로 드러날 것이다.
Idhāhaṃ bhikkhū paṭipucchissāmī’’ti.
여기서 나는 비구들에게 되물어보겠다.”
237
세존께서 다시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이 아릿타 비구처럼 이해하는가? 잘못 붙든 자기 생각으로 우리를 비방하고, 스스로를 파 들어가며, 많은 악업을 쌓는 식으로 내가 법을 가르쳤다고 이해하는가?”
Ath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
‘‘tumhepi me, bhikkhave, evaṃ dhammaṃ desitaṃ ājānātha yathāyaṃ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attanā duggahitena amhe ceva abbhācikkhati, attānañca khanati, bahuñca apuññaṃ pasavatī’’ti?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내가 설한 법을,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이 아릿타 비구가 스스로 잘못 붙잡은 것으로 우리를 잘못 전하고 자신을 파헤치고 많은 악덕을 쌓는 것처럼, 그렇게 아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저희에게 장애가 되는 것을 장애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즐기면 실제로 장애가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욕망의 즐거움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움과 번뇌는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욕망을 뼈다귀에 비유하는 데서 시작해 뱀의 머리에 비유하는 데까지 이르셨습니다. 그러면서 욕망에는 괴로움과 번뇌가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Anekapariyāyena hi no, bhante, antarāyikā dhammā antarāyikā vuttā bhagavatā;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저희에게 장애가 되는 법들을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lañca pana te paṭisevato antarāyāya.
그리고 그것들은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Appassād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ṭṭhikaṅkal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pe… sappasirūpam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ti.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해골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고깃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풀 횃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숯불 구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빌린 물건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열매 달린 나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칼과 도마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창과 꼬챙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은 뱀 머리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34.18에서 되살렸습니다.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내가 가르친 법을 그렇게 이해하니 훌륭하다. 나는 여러 방식으로 장애가 되는 것을 말했고, 그것을 즐기면 실제로 장애가 된다고도 말했다. 나는 욕망의 즐거움은 적다고 말했다. 괴로움과 번뇌는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욕망을 뼈다귀에 비유하는 데서 시작해 뱀의 머리에 비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 욕망에는 괴로움과 번뇌가 많고 그 안에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이 아릿타 비구는 잘못 붙든 자기 생각으로 우리를 비방한다. 스스로를 파 들어가며 많은 악업을 쌓고 있다. 그 어리석은 자에게 그것은 오랜 세월 해로움과 괴로움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욕망을 떠나고, 욕망에 대한 인식을 떠나고, 욕망에 대한 생각을 떠나서 욕망을 즐기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Sādhu sādhu, bhikkhave, sādhu, kho me tumhe, bhikkhave, evaṃ dhammaṃ desitaṃ ājānātha.
“훌륭하다,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법을 그렇게 안다.
주 [불확실 — 확정 술어 No.191의 `sādhu` 구속 문자열(“비구여, 그대가 내가 간략히 말한 뜻을 자세히 이해하니 훌륭하다.”)은 이 자리의 저본과 문장이 다르다. 저본대로 옮기고 신고한다.]
Anekapariyāyena hi kho, bhikkhave, antarāyikā dhammā vuttā mayā, alañca pana te paṭisevato antarāyāya.
비구들이여, 나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장애가 되는 법들을 말했고, 그것들은 즐기는 자에게 장애가 되기에 충분하다.
Appassādā kāmā vuttā may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나는 감각적 욕망은 즐거움이 적고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Aṭṭhikaṅkalūpamā kāmā vuttā mayā…pe… sappasirūpamā kāmā vuttā may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나는 감각적 욕망은 해골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고깃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풀 횃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숯불 구덩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꿈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빌린 물건과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열매 달린 나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칼과 도마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창과 꼬챙이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나는 감각적 욕망은 뱀 머리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으며 거기에는 위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36.18에서 되살렸습니다.
Atha ca panāyaṃ ariṭṭho bhikkhu gaddhabādhipubbo attanā duggahitena amhe ceva abbhācikkhati, attānañca khanati, bahuñca apuññaṃ pasavati.
그런데도 예전에 독수리 잡이였던 이 아릿타 비구는 스스로 잘못 붙잡은 것으로 우리를 잘못 전하고, 자신을 파헤치고, 많은 악덕을 쌓는다.
Tañhi tassa moghapurisassa bhavissati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a.
그것은 그 쓸모없는 자에게 오랜 세월 이롭지 않음과 괴로움이 될 것이다.
So vata, bhikkhave, aññatreva kāmehi aññatra kāmasaññāya aññatra kāmavitakkehi kāme paṭisevissatīti –
비구들이여, 그가 감각적 욕망 없이, 감각적 욕망의 인식 없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 없이 감각적 욕망을 즐길 것이라는 것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그런 도리는 없다.”
238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이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법을 배운다. 경, 응송, 해설,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담, 미증유법, 문답이다. 그들은 법을 배우고도 지혜로 그 뜻을 깊이 살펴보지 않는다. 뜻을 살펴보지 않으니, 그 법들은 그들에게 숙고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이익과 논쟁에서 빠져나가는 이익을 노리고 법을 배운다. 법을 배우는 목적이어야 할 바로 그 뜻을, 그들은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법들은 잘못 붙든 것이 되어, 오랜 세월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못 붙들었기 때문이다.
‘‘Idha, bhikkhave, ekacce moghapuri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쓸모없는 자들은 법을 배운다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경(설법),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 미증유법, 문답.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na upaparikkhanti.
그들은 그 법을 배우고서 그 법들의 뜻을 통찰지로 살피지 않는다.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anupaparikkhataṃ na nijjhānaṃ khamanti.
통찰지로 뜻을 살피지 않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깊이 헤아려 봄을 견뎌 내지 못한다.
Te upārambhānisaṃsā ceva dhammaṃ pariyāpuṇanti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법을 배우고, 말다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배운다.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nānubhonti.
그리고 법을 배우는 그 목적, 그 목적을 그들은 누리지 못한다.
Tesaṃ te dhammā duggahitā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a saṃvattanti.
잘못 붙잡은 그 법들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이롭지 않음과 괴로움으로 이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D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비구들이여, 법들을 잘못 붙잡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독사를 바라고 찾아 구하러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커다란 독사를 보고 그 몸통이나 꼬리를 잡는다. 그러면 독사는 몸을 돌려 그의 손이나 팔이나 몸의 다른 곳을 문다. 그는 그 때문에 죽거나 죽을 만큼 괴로워할 것이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독사를 잘못 붙들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alagaddatthiko alagaddagavesī alagaddapariyesanaṃ caramāno.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물뱀을 원하고 물뱀을 찾아 물뱀을 구하러 다니는 것과 같다.
So passeyya mahantaṃ alagaddaṃ.
그는 큰 물뱀을 볼 것이다.
Tamenaṃ bhoge vā naṅguṭṭhe vā gaṇheyya.
그는 그것을 몸통이나 꼬리를 잡을 것이다.
Tassa so alagaddo paṭiparivattitvā hatthe vā bāhāya vā aññatarasmiṃ vā aṅgapaccaṅge ḍaṃseyya.
그러면 그 물뱀이 되돌아서 그의 손이나 팔이나 다른 어느 몸의 부분을 물 것이다.
So tatonidānaṃ maraṇaṃ vā nigaccheyya maraṇamattaṃ vā dukkhaṃ.
그는 그로 인해 죽거나 죽을 만큼의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Duggahitattā, bhikkhave, alagaddassa.
비구들이여, 물뱀을 잘못 붙잡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어리석은 이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법을 배운다. 경, 응송, 해설,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담, 미증유법, 문답이다. 그들은 법을 배우고도 지혜로 그 뜻을 깊이 살펴보지 않는다. 뜻을 살펴보지 않으니, 그 법들은 그들에게 숙고하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이익과 논쟁에서 빠져나가는 이익을 노리고 법을 배운다. 법을 배우는 목적이어야 할 바로 그 뜻을, 그들은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 법들은 잘못 붙든 것이 되어, 오랜 세월 해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못 붙들었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e moghapuri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쓸모없는 자들은 법을 배운다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경(설법),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 미증유법, 문답.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na upaparikkhanti.
그들은 그 법을 배우고서 그 법들의 뜻을 통찰지로 살피지 않는다.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anupaparikkhataṃ na nijjhānaṃ khamanti.
통찰지로 뜻을 살피지 않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깊이 헤아려 봄을 견뎌 내지 못한다.
Te upārambhānisaṃsā ceva dhammaṃ pariyāpuṇanti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법을 배우고, 말다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배운다.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nānubhonti.
그리고 법을 배우는 그 목적, 그 목적을 그들은 누리지 못한다.
Tesaṃ te dhammā duggahitā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a saṃvattanti.
잘못 붙잡은 그 법들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이롭지 않음과 괴로움으로 이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D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비구들이여, 법들을 잘못 붙잡았기 때문이다.
239
“그러나 비구들이여, 좋은 집안의 아들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법을 배운다. 경, 응송, 해설,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담, 미증유법, 문답이다. 그들은 법을 배우고 나서 지혜로 그 뜻을 깊이 살펴본다. 뜻을 살펴보니, 그 법들은 그들에게 숙고하여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이익을 노리고 법을 배우지 않는다. 논쟁에서 빠져나가는 이익을 노리고 배우지도 않는다. 법을 배우는 목적이 되는 바로 그 뜻을, 그들은 얻는다. 그들에게 그 법들은 잘 붙든 것이 되어, 오랜 세월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진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 붙들었기 때문이다.
‘‘Idha pana, bhikkhave, ekacce kulaputt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비구들이여, 그런데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법을 배운다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경(설법),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 미증유법, 문답.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nti.
그들은 그 법을 배우고서 그 법들의 뜻을 통찰지로 살핀다.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통찰지로 뜻을 살피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깊이 헤아려 봄을 견뎌 낸다.
Te na ceva upārambhānisaṃ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na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법을 배우지 않고, 말다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배우지도 않는다.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anubhonti.
그리고 법을 배우는 그 목적, 그 목적을 그들은 누린다.
Tesaṃ te dhammā suggahitā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saṃvattanti.
잘 붙잡은 그 법들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S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비구들이여, 법들을 잘 붙잡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독사를 바라고 찾아 구하러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가 커다란 독사를 보고, 갈래진 막대로 독사를 단단히 눌러 제압한다. 그런 다음 목을 제대로 움켜잡는다. 그러면 독사가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몸의 다른 곳을 몸통으로 칭칭 감는다 해도, 그는 죽거나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독사를 잘 붙들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alagaddatthiko alagaddagavesī alagaddapariyesanaṃ caramāno.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물뱀을 원하고 물뱀을 찾아 물뱀을 구하러 다니는 것과 같다.
So passeyya mahantaṃ alagaddaṃ.
그는 큰 물뱀을 볼 것이다.
Tamenaṃ ajapadena daṇḍena suniggahitaṃ niggaṇheyya.
그는 그것을 염소 발굽 모양의 막대기로 잘 눌러 붙잡을 것이다.
Ajapadena daṇḍena suniggahitaṃ niggahitvā, gīvāya suggahitaṃ gaṇheyya.
염소 발굽 모양의 막대기로 잘 눌러 붙잡고서, 목을 잘 붙잡을 것이다.
Kiñcāpi so, bhikkhave, alagaddo tassa purisassa hatthaṃ vā bāhaṃ vā aññataraṃ vā aṅgapaccaṅgaṃ bhogehi paliveṭheyya, atha kho so neva tatonidānaṃ maraṇaṃ vā nigaccheyya maraṇamattaṃ vā dukkhaṃ.
비구들이여, 그 물뱀이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다른 어느 몸의 부분을 몸통으로 휘감는다 하더라도, 그는 그로 인해 죽거나 죽을 만큼의 괴로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Suggahitattā, bhikkhave, alagaddassa.
비구들이여, 물뱀을 잘 붙잡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좋은 집안의 아들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법을 배운다. 경, 응송, 해설,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담, 미증유법, 문답이다. 그들은 법을 배우고 나서 지혜로 그 뜻을 깊이 살펴본다. 뜻을 살펴보니, 그 법들은 그들에게 숙고하여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이익을 노리고 법을 배우지 않는다. 논쟁에서 빠져나가는 이익을 노리고 배우지도 않는다. 법을 배우는 목적이 되는 바로 그 뜻을, 그들은 얻는다. 그들에게 그 법들은 잘 붙든 것이 되어, 오랜 세월 유익함과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어진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법을 잘 붙들었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e kulaputt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법을 배운다 —
suttaṃ, geyyaṃ, veyyākaraṇaṃ, gāthaṃ, udānaṃ, itivuttakaṃ, jātakaṃ, abbhutadhammaṃ, vedallaṃ.
경(설법), 응송, 수기,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 미증유법, 문답.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tesaṃ dhammānaṃ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nti.
그들은 그 법을 배우고서 그 법들의 뜻을 통찰지로 살핀다.
Tesaṃ te dhammā paññāya atthaṃ upaparikkhataṃ nijjhānaṃ khamanti.
통찰지로 뜻을 살피는 그들에게 그 법들은 깊이 헤아려 봄을 견뎌 낸다.
Te na ceva upārambhānisaṃsā dhammaṃ pariyāpuṇanti, na itivādappamokkhānisaṃsā ca.
그들은 남을 비난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법을 배우지 않고, 말다툼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익으로 삼아 배우지도 않는다.
Yassa catthāya dhammaṃ pariyāpuṇanti, tañcassa atthaṃ anubhonti.
그리고 법을 배우는 그 목적, 그 목적을 그들은 누린다.
Tesaṃ te dhammā suggahitā dīgharattaṃ atthāya hitāya sukhāya saṃvattanti.
잘 붙잡은 그 법들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과 이로움과 행복으로 이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Suggahitattā, bhikkhave, dhammānaṃ.
비구들이여, 법들을 잘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내가 한 말의 뜻을 알았다면 그대로 간직하라. 알지 못했다면 나에게 물어라. 아니면 경험 많고 현명한 비구들에게 물어라.”
Tasmātiha, bhikkhave, yassa me bhāsitassa atthaṃ ājāneyyātha, tathā naṃ dhāreyyātha.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이 내가 말한 것의 뜻을 알면, 그대로 그것을 지녀라.
Yassa ca pana me bhāsitassa atthaṃ na ājāneyyātha, ahaṃ vo tattha paṭipucchitabbo, ye vā panāssu viyattā bhikkhū.
그리고 그대들이 내가 말한 것의 뜻을 알지 못하면, 그대들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되물어야 하고, 아니면 밝은 비구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되물어야 한다.
240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뗏목에 비유한 법을 가르치겠다. 이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들고 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이제 말하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Kullūpamaṃ vo, bhikkhave, dhammaṃ desessāmi nittharaṇatthāya, no gahaṇatthāya.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뗏목에 비유되는 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닌 법을 설하겠다.
Taṃ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karotha, bhāsissāmī’’ti.
마음을 다해 잘 들어라. 이제 말하리라.”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예,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고 있다고 하자. 그가 큰물을 만났다. 이쪽 기슭은 위험하고 두려움이 있고, 저쪽 기슭은 안전하고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 건너게 해 줄 배도 없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다리도 없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addhānamaggappaṭipanno.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So passeyya mahantaṃ udakaṇṇavaṃ, orimaṃ tīraṃ sāsaṅkaṃ sappaṭibhayaṃ, pārimaṃ tīraṃ khemaṃ appaṭibhayaṃ;
그는 큰 물바다를 볼 것이다. 이쪽 기슭은 의심스럽고 두려우며, 저쪽 기슭은 안온하고 두렵지 않다;
na cassa nāvā santāraṇī uttarasetu vā apārā pāraṃ gamanāya.
그런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배도 다리도 없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큰물은 넓다. 이쪽 기슭은 위험하고 두려움이 있고, 저쪽 기슭은 안전하고 두려움이 없다. 그런데 건너게 해 줄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그렇다면 풀과 나뭇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묶으면 어떨까. 그 뗏목에 의지해 손발로 애써서 무사히 저쪽으로 건너가자.’
Tassa evamassa –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ayaṃ kho mahāudakaṇṇavo, orimaṃ tīraṃ sāsaṅkaṃ sappaṭibhayaṃ, pārimaṃ tīraṃ khemaṃ appaṭibhayaṃ;
‘이것은 큰 물바다다. 이쪽 기슭은 의심스럽고 두려우며, 저쪽 기슭은 안온하고 두렵지 않다;
natthi ca nāvā santāraṇī uttarasetu vā apārā pāraṃ gamanāya.
그런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배도 다리도 없다.
Yaṃnūnāhaṃ tiṇakaṭṭhasākhāpalāsaṃ saṃkaḍḍhitvā, kullaṃ bandhitvā, taṃ kullaṃ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ṃ uttareyya’nti.
나는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고, 그 뗏목에 의지해 손과 발로 애써 안전하게 저쪽으로 건너가면 어떨까.’
그래서 비구들이여, 그 사람은 풀과 나뭇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묶었다. 그 뗏목에 의지해 손발로 애써서 무사히 저쪽으로 건넜다. 저쪽 기슭에 이른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해 무사히 저쪽으로 건넜다. 그렇다면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Atha kho so, bhikkhave, puriso tiṇakaṭṭhasākhāpalāsaṃ saṃkaḍḍhitvā, kullaṃ bandhitvā taṃ kullaṃ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ṃ uttareyya.
비구들이여, 그러자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모아 뗏목을 엮고, 그 뗏목에 의지해 손과 발로 애써 안전하게 저쪽으로 건너갈 것이다.
Tassa purisassa uttiṇṇassa pāraṅgatassa evamassa –
건너가 저쪽 기슭에 이른 그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bahukāro kho me ayaṃ kullo;
‘이 뗏목은 나에게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imāhaṃ kullaṃ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ṃ uttiṇṇo.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해 손과 발로 애써 안전하게 저쪽으로 건너왔다.
Yaṃnūnāhaṃ imaṃ kullaṃ sīse vā āropetvā khandhe vā uccāretvā yena kāmaṃ pakkameyya’nti.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하는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evaṃkārī tasmiṃ kulle kiccakārī assā’’ti?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하는 그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해 할 일을 한 것이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겠느냐? 건너서 저쪽 기슭에 이른 그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자.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해 무사히 저쪽으로 건넜다. 그렇다면 이 뗏목을 뭍에 올려 두거나 물에 띄워 놓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는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Kathaṃkārī ca so, bhikkhave, puriso tasmiṃ kulle kiccakārī assa?
“비구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그 뗏목에 대해 할 일을 한 것이겠는가?
Idha, bhikkhave, tassa purisassa uttiṇṇassa pāraṅgatassa evamassa –
비구들이여, 여기 건너가 저쪽 기슭에 이른 그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
‘bahukāro kho me ayaṃ kullo;
‘이 뗏목은 나에게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imāhaṃ kullaṃ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ṃ uttiṇṇo.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해 손과 발로 애써 안전하게 저쪽으로 건너왔다.
Yaṃnūnāhaṃ imaṃ kullaṃ thale vā ussādetvā udake vā opilāpetvā yena kāmaṃ pakkameyya’nti.
나는 이 뗏목을 뭍에 올려놓거나 물에 띄워 보내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Evaṃkārī kho so, bhikkhave, puriso tasmiṃ kulle kiccakārī assa.
비구들이여, 그렇게 하는 그 사람이 그 뗏목에 대해 할 일을 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뗏목에 비유한 법을 가르쳤다. 이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들고 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뗏목에 비유한 법을 아는 그대들은 법조차 버려야 한다.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Evameva kho, bhikkhave, kullūpamo mayā dhammo desito nittharaṇatthāya, no gahaṇatthāya.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나는 뗏목에 비유되는 법을 건너기 위한 것이지 붙잡기 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설했다.
Kullūpamaṃ vo, bhikkhave, dhammaṃ desitaṃ, ājānantehi dhammā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
비구들이여, 뗏목에 비유되는 법이 설해졌으니, 아는 자들은 법들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들이랴.
241
비구들이여, 견해가 자리 잡는 곳이 여섯 가지 있다. 어떤 여섯인가?
‘‘Chayimāni, bhikkhave, diṭṭhiṭṭhānāni.
“비구들이여, 이 여섯 가지 견해의 토대가 있다.
Katamāni cha?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성자의 법에 밝지 못하고, 그 법으로 길들여지지도 못했다. 참된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다. 참된 사람의 법에도 밝지 못하고, 그 법으로 길들여지지도 못했다. 그는 물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 하고 본다. 느낌과 인식과 형성들도 똑같이 그렇게 본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얻고 찾고, 마음으로 따져 본 것도 있다.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 하고 본다.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보지 못하고 성자의 법에 능하지 못하고 성자의 법에 길들지 못했으며, 참된 이들을 보지 못하고 참된 이의 법에 능하지 못하고 참된 이의 법에 길들지 못하여, 물질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ved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느낌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saññ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인식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saṅkhār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형성작용들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yampi t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 이른 것, 찾은 것, 마음으로 헤아린 것,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견해가 자리 잡는 곳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세계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도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할 것이다. 변하는 성질이 없는 존재로,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머물 것이다.’ 이런 생각이다.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 하고 본다.
yampi taṃ diṭṭhiṭṭhānaṃ –
그리고 그 견해의 토대 또한 —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āmīti –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되어,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으리라’라는 그것 또한 —
tampi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배운 성자의 제자는 성자들을 만났다. 성자의 법에 밝고, 그 법으로 잘 길들여졌다. 참된 사람들도 만났다. 참된 사람의 법에도 밝고, 그 법으로 잘 길들여졌다. 그는 물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하고 본다. 느낌과 인식과 형성들도 똑같이 그렇게 본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얻고 찾고, 마음으로 따져 본 것도 있다.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하고 본다.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ariyānaṃ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ṃ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비구들이여, 그러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보고 성자의 법에 능하고 성자의 법에 잘 길들었으며, 참된 이들을 보고 참된 이의 법에 능하고 참된 이의 법에 잘 길들어, 물질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ved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느낌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saññ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인식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saṅkhāre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형성작용들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yampi taṃ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tampi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본 것, 들은 것, 감지한 것, 안 것, 이른 것, 찾은 것, 마음으로 헤아린 것,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견해가 자리 잡는 곳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이 세계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도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할 것이다. 변하는 성질이 없는 존재로,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머물 것이다.’ 이런 생각이다.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하고 본다.
yampi taṃ diṭṭhiṭṭhānaṃ –
그리고 그 견해의 토대 또한 —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āmīti –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되어,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으리라’라는 그것 또한 —
tampi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그것 또한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이렇게 보는 사람은 없는 것을 두고 불안해하지 않는다.
So evaṃ samanupassanto asati na paritassatī’’ti.
그는 이렇게 여겨서, 없을 때 동요하지 않는다.”
242
이 말씀을 듣고 어떤 비구가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밖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있다, 비구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어떤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내게 있던 것이 이제 내게 없구나. 내게 생기기를 바랐는데, 그것을 얻지 못하는구나.’ 그는 슬퍼하고 지쳐서 탄식한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다가 정신을 잃는다. 비구여, 이렇게 밖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bhagavantaṃ etadavoca –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siyā nu kho, bhante, bahiddhā asati paritassanā’’ti?
“세존이시여, 밖의 것이 없을 때 동요가 있을 수 있습니까?”
‘‘Siyā, bhikkhū’’ti –
“그럴 수 있다, 비구여” 하고 —
bhagavā avoca.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Idha bhikkhu ekaccassa evaṃ hoti –
“비구여, 여기 어떤 이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ahu vata me, taṃ vata me natthi;
‘아, 내게 있었건만 그것이 이제 내게 없구나;
siyā vata me, taṃ vatāhaṃ na labhāmī’ti.
아, 내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나는 얻지 못하는구나’라고.
S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그는 슬퍼하고 지치고 비탄에 잠기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혼미에 빠진다.
Evaṃ kho, bhikkhu, bahiddhā asati paritassanā hotī’’ti.
비구여, 이와 같이 밖의 것이 없을 때 동요가 있다.”
“그러면 세존이시여, 밖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있다, 비구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어떤 비구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게 있던 것이 이제 내게 없구나. 내게 생기기를 바랐는데, 그것을 얻지 못하는구나.’ 그는 슬퍼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탄식하지 않는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정신을 잃지도 않는다. 비구여, 이렇게 밖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 일이 있다.
‘‘Siyā pana, bhante, bahiddhā asati aparitassanā’’ti?
“그러면 세존이시여, 밖의 것이 없을 때 동요 없음이 있을 수 있습니까?”
‘‘Siyā, bhikkhū’’ti –
“그럴 수 있다, 비구여” 하고 —
bhagavā avoca.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Idha bhikkhu ekaccassa na evaṃ hoti –
“비구여, 여기 어떤 이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
‘ahu vata me, taṃ vata me natthi;
‘아, 내게 있었건만 그것이 이제 내게 없구나;
siyā vata me, taṃ vatāhaṃ na labhāmī’ti.
아, 내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나는 얻지 못하는구나’라고.
S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그는 슬퍼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비탄에 잠기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혼미에 빠지지 않는다.
Evaṃ kho, bhikkhu, bahiddhā asati aparitassanā hotī’’ti.
비구여, 이와 같이 밖의 것이 없을 때 동요 없음이 있다.”
“세존이시여, 안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있다, 비구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어떤 비구는 이런 견해를 가진다. ‘그것이 세계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도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할 것이다. 변하는 성질이 없는 존재로,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머물 것이다.’ 그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법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 그 법은 모든 견해의 자리와 고집과 사로잡힘과 집착과 잠재된 성향을 뿌리째 뽑는다. 모든 형성을 가라앉히고, 모든 집착의 바탕을 내려놓게 한다. 갈애를 다하고 탐욕에서 벗어나, 소멸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법이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끊어지고 말겠구나, 사라지고 말겠구나, 없어지고 말겠구나.’ 그는 슬퍼하고 지쳐서 탄식한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다가 정신을 잃는다. 비구여, 이렇게 안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이 생긴다.
‘‘Siyā nu kho, bhante, ajjhattaṃ asati paritassanā’’ti?
“세존이시여, 안의 것이 없을 때 동요가 있을 수 있습니까?”
‘‘Siyā, bhikkhū’’ti –
“그럴 수 있다, 비구여” 하고 —
bhagavā avoca.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Idha, bhikkhu, ekaccassa evaṃ diṭṭhi hoti –
“비구여, 여기 어떤 이에게 이런 견해가 있다 —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āmī’ti.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되어,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으리라’라고.
So suṇāti tathāgatassa vā tathāgatasāvakassa vā sabbesaṃ diṭṭhiṭṭhānādhiṭṭhānapariyuṭṭhānābhinivesānusayānaṃ samugghātāya sabbasaṅkhārasamathāya sabbūpadhipaṭinissaggāya taṇhākkhayāya virāgāya nirodhāya nibbānāya dhammaṃ desentassa.
그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모든 견해의 토대와 고집과 사로잡힘과 집착과 잠재성향을 뿌리 뽑기 위해, 모든 형성의 그침을 위해, 모든 재생 바탕을 놓아버림을 위해, 갈애의 다함을 위해, 탐욕이 사라짐을 위해, 소멸을 위해, 열반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
Tassa evaṃ hoti –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
‘ucchijjissāmi nāmassu, vinassissāmi nāmassu, nassu nāma bhavissāmī’ti.
‘나는 끊어지고 말겠구나, 나는 사라지고 말겠구나, 나는 없어지고 말겠구나’라고.
S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그는 슬퍼하고 지치고 비탄에 잠기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혼미에 빠진다.
Evaṃ kho, bhikkhu, ajjhattaṃ asati paritassanā hotī’’ti.
비구여, 이와 같이 안의 것이 없을 때 동요가 있다.”
“그러면 세존이시여, 안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있다, 비구여.”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기 어떤 비구는 이런 견해를 갖지 않는다. ‘그것이 세계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도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할 것이다. 변하는 성질이 없는 존재로,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머물 것이다.’ 그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법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 그 법은 모든 견해의 자리와 고집과 사로잡힘과 집착과 잠재된 성향을 뿌리째 뽑는다. 모든 형성을 가라앉히고, 모든 집착의 바탕을 내려놓게 한다. 갈애를 다하고 탐욕에서 벗어나, 소멸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법이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끊어지고 말겠구나, 사라지고 말겠구나, 없어지고 말겠구나.’ 그는 슬퍼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탄식하지 않는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정신을 잃지도 않는다. 비구여, 이렇게 안에 없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는 일이 있다.
‘‘Siyā pana, bhante, ajjhattaṃ asati aparitassanā’’ti?
“그러면 세존이시여, 안의 것이 없을 때 동요 없음이 있을 수 있습니까?”
‘‘Siyā, bhikkhū’’ti bhagavā avoca.
“그럴 수 있다, 비구여” 하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Idha, bhikkhu, ekaccassa na evaṃ diṭṭhi hoti –
“비구여, 여기 어떤 이에게 이런 견해가 있지 않다 —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āmī’ti.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되어,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으리라’라고.
So suṇāti tathāgatassa vā tathāgatasāvakassa vā sabbesaṃ diṭṭhiṭṭhānādhiṭṭhānapariyuṭṭhānābhinivesānusayānaṃ samugghātāya sabbasaṅkhārasamathāya sabbūpadhipaṭinissaggāya taṇhākkhayāya virāgāya nirodhāya nibbānāya dhammaṃ desentassa.
그는 여래나 여래의 제자가 모든 견해의 토대와 고집과 사로잡힘과 집착과 잠재성향을 뿌리 뽑기 위해, 모든 형성의 그침을 위해, 모든 재생 바탕을 놓아버림을 위해, 갈애의 다함을 위해, 탐욕이 사라짐을 위해, 소멸을 위해, 열반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을 듣는다.
Tassa na evaṃ hoti –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
‘ucchijjissāmi nāmassu, vinassissāmi nāmassu, nassu nāma bhavissāmī’ti.
‘나는 끊어지고 말겠구나, 나는 사라지고 말겠구나, 나는 없어지고 말겠구나’라고.
S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그는 슬퍼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비탄에 잠기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혼미에 빠지지 않는다.
Evaṃ kho, bhikkhu, ajjhattaṃ asati aparitassanā hoti’’.
비구여, 이와 같이 안의 것이 없을 때 동요 없음이 있다.”
243
비구들이여, 무언가를 소유한다면 그 소유는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해야 한다. 변하는 성질이 없어서,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남아 있을 만한 것을 소유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너희는 그렇게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한 소유물이 보이느냐?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남아 있을 만한 소유물 말이다. “보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좋다, 비구들이여. 나 역시 그런 소유물을 보지 못한다.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하며,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남아 있을 만한 소유물은 보이지 않는다.
‘‘Taṃ, bhikkhave, pariggahaṃ pariggaṇheyyātha, yvāssa pariggaho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tiṭṭheyya.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소유를 붙잡아도 좋다 — 그 소유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을 그런 것이라면.
Passatha no tumhe, bhikkhave, taṃ pariggahaṃ yvāssa pariggaho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tiṭṭheyyā’’ti?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소유를 보는가 — 그 소유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을 그런 소유를?”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ādhu, bhikkhave.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Ahampi kho taṃ, bhikkhave, pariggahaṃ na samanupassāmi yvāssa pariggaho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tiṭṭheyya.
비구들이여, 나 또한 그런 소유를 보지 못한다 — 그 소유가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을 그런 소유를.
비구들이여, 자아에 대한 주장을 붙든다면, 붙들어도 슬픔과 탄식과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기지 않을 집착을 붙들어야 한다. 너희는 그런 자아 주장에 대한 집착이 보이느냐? 그것을 붙들어도 슬픔과 탄식과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기지 않을 집착 말이다. “보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좋다, 비구들이여. 나 역시 그런 집착을 보지 못한다. 붙들어도 슬픔과 탄식과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기지 않을 자아 주장에 대한 집착은 보이지 않는다.
‘‘Taṃ, bhikkhave, attavādupādānaṃ upādiyetha, yaṃsa attavādupādānaṃ upādiyato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자아론에 대한 취착을 취해도 좋다 — 그 자아론에 대한 취착을 취하는 이에게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일어나지 않을 그런 것이라면.
Passatha no tumhe, bhikkhave, taṃ attavādupādānaṃ yaṃsa attavādupādānaṃ upādiyato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ti?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자아론에 대한 취착을 보는가 — 그 자아론에 대한 취착을 취하는 이에게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일어나지 않을 그런 취착을?”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ādhu, bhikkhave.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Ahampi kho taṃ, bhikkhave, attavādupādānaṃ na samanupassāmi yaṃsa attavādupādānaṃ upādiyato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비구들이여, 나 또한 그런 자아론에 대한 취착을 보지 못한다 — 그 자아론에 대한 취착을 취하는 이에게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일어나지 않을 그런 취착을.
비구들이여, 견해에 기댄다면, 기대어도 슬픔과 탄식과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기지 않을 의지처에 기대야 한다. 너희는 그런 견해의 의지처가 보이느냐? 그것에 기대어도 슬픔과 탄식과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기지 않을 의지처 말이다. “보이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좋다, 비구들이여. 나 역시 그런 의지처를 보지 못한다. 기대어도 슬픔과 탄식과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기지 않을 견해의 의지처는 보이지 않는다.
‘‘Taṃ, bhikkhave, diṭṭhinissayaṃ nissayetha yaṃsa diṭṭhinissayaṃ nissayato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견해의 의지처에 의지해도 좋다 — 그 견해의 의지처에 의지하는 이에게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일어나지 않을 그런 것이라면.
Passatha no tumhe, bhikkhave, taṃ diṭṭhinissayaṃ yaṃsa diṭṭhinissayaṃ nissayato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ti?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그런 견해의 의지처를 보는가 — 그 견해의 의지처에 의지하는 이에게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일어나지 않을 그런 의지처를?”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ādhu, bhikkhave.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Ahampi kho taṃ, bhikkhave, diṭṭhinissayaṃ na samanupassāmi yaṃsa diṭṭhinissayaṃ nissayato na uppajjeyyu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비구들이여, 나 또한 그런 견해의 의지처를 보지 못한다 — 그 견해의 의지처에 의지하는 이에게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일어나지 않을 그런 의지처를.”
244
“비구들이여, 자아가 있다면 ‘내 것’이라는 것도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내 것이 있다면 ‘나의 자아’라는 것도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자아도 내 것도 참되고 확실하게는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견해가 자리 잡은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그것이 세계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도 항상하고 변치 않고 영원할 것이다. 변하는 성질이 없는 존재로, 영원과 똑같이 그대로 머물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온통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참으로 온통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Attani vā, bhikkhave, sati attaniyaṃ me ti assā’’ti?
“비구들이여, 자아가 있을 때 ‘나에게 자아에 속한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주 [불확실: 앵커 No.228 `sati`→「마음챙김」이 이 자리에 서지 않는다. 여기 `sati`는 `santa`의 처격 절대구(‘있을 때’)이므로 저본대로 옮겼다]
‘‘Evaṃ, bhante’’.
“예, 세존이시여” 하고 비구들이 대답했다.
‘‘Attaniye vā, bhikkhave, sati attā me ti assā’’ti?
“비구들이여, 자아에 속한 것이 있을 때 ‘나에게 자아가 있다’고 하겠는가?”
주 [불확실: 앵커 No.228 `sati`→「마음챙김」이 이 자리에 서지 않는다. 여기 `sati`는 `santa`의 처격 절대구(‘있을 때’)이므로 저본대로 옮겼다]
‘‘Evaṃ, bhante’’.
“예, 세존이시여” 하고 비구들이 대답했다.
‘‘Attani ca, bhikkhave, attaniye ca saccato thetato anupalabbhamāne, yampi taṃ diṭṭhiṭṭhānaṃ –
“비구들이여, 자아도 자아에 속한 것도 진실로 확실하게 얻어지지 않는데, 그 견해의 토대 또한 —
‘so loko so attā, so pecca bhavissāmi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āmī’ti –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자아다. 나는 죽은 뒤에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되어, 영원처럼 언제까지나 그대로 서 있으리라’라는 그것 또한 —
nanāyaṃ, bhikkhave, kevalo paripūro bāladhammo’’’ti?
비구들이여, 이것은 온통 완전한 어리석은 자의 법이 아닌가?”
‘‘Kiñhi no siyā, bhante, kevalo hi, bhante, paripūro bāladhammo’’ti.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참으로 온통 완전한 어리석은 자의 법입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무상한 것은 괴로운가, 즐거운가?” “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 하고 보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rūp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Aniccaṃ, bhante’’.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Dukkhaṃ, bhante’’.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이렇게 여기는 것이 옳은가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느낌은, 인식은, 형성들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무상한 것은 괴로운가, 즐거운가?” “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 하고 보는 것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vedanā…pe… saññā… saṅkhārā… viññāṇa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인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형성작용들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의식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44.9에서 되살렸습니다.
‘‘Aniccaṃ, bhante’’.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Dukkhaṃ, bhante’’.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이렇게 여기는 것이 옳은가 —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어떤 물질이든 모든 물질을 이렇게 보아야 한다.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상관없다. 안이든 밖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낮든 뛰어나든, 멀든 가깝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느낌도, 인식도, 형성들도, 의식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든 모두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안이든 밖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낮든 뛰어나든, 멀든 가깝든 상관없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Tasmātiha, bhikkhave, yaṃ kiñci rūp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어떤 물질이든,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물질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이것을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Yā kāci vedanā…pe… yā kāci saññā… ye keci saṅkhārā… yaṃ kiñci viññāṇ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
어떤 느낌이든,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느낌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어떤 인식이든,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인식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어떤 형성작용들이든,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형성작용들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어떤 의식이든,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친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저열한 것이든 뛰어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의식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09:90.25에서 되살렸습니다.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이것을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245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배운 성자의 제자는 물질에 싫증을 낸다. 느낌에도, 인식에도, 형성들에도, 의식에도 싫증을 낸다. 싫증이 나면 탐욕에서 벗어나고, 탐욕에서 벗어나면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앎이 생긴다. 그는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다 살았다. 해야 할 일을 마쳤으니 더는 이런 상태가 되지 않는다’ 하고 안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이렇게 부른다. 빗장을 걷어 올린 사람, 해자를 메운 사람, 기둥을 뽑은 사람, 문빗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놓아 속박에서 벗어난 성자라고도 부른다.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ṃ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saññāya nibbindati, saṅkhāresu nibbindati, viññāṇasmiṃ nibbindati, nibbid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아서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인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작용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 탐욕이 사라지고, 그 사라짐으로 해탈한다.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앎이 일어난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은 다 살았다. 할 일은 다 마쳤다. 다시는 이런 상태로 오지 않는다’라고 안다.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ukkhittapaligho itipi, saṃkiṇṇaparikkho itipi, abbūḷhesiko itipi, niraggaḷo itipi, ariyo pannaddhajo pannabhāro visaṃyutto itipi.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일러 가로장을 들어 올린 이라고도 하고, 해자를 메운 이라고도 하고, 말뚝을 뽑은 이라고도 하고, 빗장이 풀린 이라고도 하고,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놓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이라고도 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빗장을 걷어 올린 사람이 되는가? 여기 비구는 무명을 버렸다. 그 뿌리를 자르고 야자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어 없앴으니,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빗장을 걷어 올린 사람이 된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ukkhittapaligho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가로장을 들어 올린 이가 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no avijjā pahīnā hoti,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ṃ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 무명이 버려졌다 — 뿌리째 끊기고, 밑동 잘린 야자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었다.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ukkhittapaligho h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가로장을 들어 올린 이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해자를 메운 사람이 되는가? 여기 비구는 다시 태어남으로 이어지는 태어남과 윤회를 버렸다. 그 뿌리를 자르고 야자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어 없앴으니,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해자를 메운 사람이 된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saṃkiṇṇaparikkho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해자를 메운 이가 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no ponobbhaviko jātisaṃsāro pahīno hoti, ucchinnamūlo tālāvatthukato anabhāvaṃkato, āyatiṃ anuppādadhammo.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 다시 태어남을 부르는 태어남의 윤회가 버려졌다 — 뿌리째 끊기고, 밑동 잘린 야자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었다.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saṃkiṇṇaparikkho h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해자를 메운 이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기둥을 뽑은 사람이 되는가? 여기 비구는 갈애를 버렸다. 그 뿌리를 자르고 야자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어 없앴으니,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기둥을 뽑은 사람이 된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abbūḷhesiko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말뚝을 뽑은 이가 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no taṇhā pahīnā hoti,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ṃ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 갈애가 버려졌다 — 뿌리째 끊기고, 밑동 잘린 야자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었다.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abbūḷhesiko h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말뚝을 뽑은 이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문빗장이 없는 사람이 되는가? 여기 비구는 낮은 단계에 묶는 다섯 가지 족쇄를 버렸다. 그 뿌리를 자르고 야자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어 없앴으니,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문빗장이 없는 사람이 된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niraggaḷo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빗장이 풀린 이가 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no pañc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honti, ucchinnamūlāni tālāvatthukatāni anabhāvaṃkatāni, āyatiṃ anuppādadhammān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버려졌다 — 뿌리째 끊기고, 밑동 잘린 야자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었다.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niraggaḷo h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빗장이 풀린 이가 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놓아 속박에서 벗어난 성자가 되는가? 여기 비구는 ‘내가 있다’는 교만을 버렸다. 그 뿌리를 자르고 야자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어 없앴으니, 앞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놓아 속박에서 벗어난 성자가 된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ariyo pannaddhajo pannabhāro visaṃyutto hoti?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놓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이가 되는가?
Idha, bhikkhave, bhikkhuno asmimāno pahīno hoti, ucchinnamūlo tālāvatthukato anabhāvaṃkato, āyatiṃ anuppādadhammo.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에게 ‘나’라는 자만이 버려졌다 — 뿌리째 끊기고, 밑동 잘린 야자나무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 되었다.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ariyo pannaddhajo pannabhāro visaṃyutto ho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깃발을 내리고 짐을 내려놓고 얽매임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이가 된다.
246
비구들이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비구를 신들이 찾아본다. 인드라와 함께하는 신들, 브라흐마와 함께하는 신들, 쁘라자빠띠와 함께하는 신들이다. 그래도 끝내 알아내지 못한다. ‘이것이 여래의 의식이 의지한 곳이다.’ 왜 그런가? 비구들이여, 나는 지금 여기, 이 삶에서조차 여래를 찾아낼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Evaṃ vimuttacittaṃ kho, bhikkhave, bhikkhuṃ saindā devā sabrahmakā sapajāpatikā anvesaṃ nādhigacchanti –
“비구들이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비구를, 인드라와 함께하고 브라흐마와 함께하고 빠자빠띠와 함께하는 신들도 찾아서 이르지 못한다 —
‘idaṃ nissitaṃ tathāgatassa viññāṇa’nti.
‘여래의 의식은 이것에 의지해 있다’라고.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Diṭṭhevāhaṃ, bhikkhave, dhamme tathāgataṃ ananuvijjoti vadāmi.
비구들이여, 나는 지금 여기에서도 여래는 알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가르치는 나를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거짓으로 비방한다. 사실이 아니고 헛되고 거짓된 말로 이렇게 비방한다. ‘사문 고따마는 허무론자다. 존재하는 중생의 끊어짐과 사라짐과 없어짐을 주장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지 않는 바로 그것을 두고, 그 사문과 바라문들은 사실이 아니고 헛되고 거짓된 말로 나를 비방한다. ‘사문 고따마는 허무론자다. 존재하는 중생의 끊어짐과 사라짐과 없어짐을 주장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알린다.
Evaṃvādiṃ kho maṃ, bhikkhave, evamakkhāyiṃ eke samaṇabrāhmaṇā asatā tucchā musā abhūtena abbhācikkhanti –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주장하는 나를 두고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있지 않은 것으로, 헛되이, 거짓으로, 사실 아닌 것으로 비방한다 —
‘venayiko samaṇo gotamo,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āpetī’ti.
‘사문 고따마는 파멸을 주장하는 자다. 실재하는 중생의 끊어짐과 사라짐과 없어짐을 천명한다’라고.
Yathā cāhaṃ na, bhikkhave, yathā cāhaṃ na vadāmi, tathā maṃ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asatā tucchā musā abhūtena abbhācikkhanti –
비구들이여, 내가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나를 있지 않은 것으로, 헛되이, 거짓으로, 사실 아닌 것으로 비방한다 —
‘venayiko samaṇo gotamo,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āpetī’ti.
‘사문 고따마는 파멸을 주장하는 자다. 실재하는 중생의 끊어짐과 사라짐과 없어짐을 천명한다’라고.
Pubbe cāhaṃ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ṃ.
비구들이여, 예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한다.
비구들이여, 그럴 때 남들이 여래를 욕하고 꾸짖고 화나게 하고 괴롭힐 수 있다. 그래도 여래에게는 원한도 없고 불쾌함도 없고 마음의 언짢음도 없다. 비구들이여, 그럴 때 남들이 여래를 존경하고 공경하고 높이고 받들 수도 있다. 그래도 여래에게는 기쁨도 없고 즐거운 마음도 없고 마음이 들뜸도 없다. 남들이 여래를 그렇게 존경하고 공경하고 높이고 받들면, 여래에게는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내가 철저히 알았던 바로 그것에 대해 이런 대접을 하는구나.’
Tatra ce, bhikkhave, pare tathāgataṃ akkosanti paribhāsanti rosenti vihesenti, tatra, bhikkhave, tathāgatassa na hoti āghāto na appaccayo na cetaso anabhiraddhi.
비구들이여, 거기서 만일 남들이 여래를 욕하고 비방하고 성나게 하고 괴롭힌다 해도, 비구들이여, 그때 여래에게는 노여움도 없고 언짢음도 없고 마음의 불쾌함도 없다.
‘‘Tatra ce, bhikkhave, pare tathāgataṃ sakkaronti garuṃ karonti mānenti pūjenti, tatra, bhikkhave, tathāgatassa na hoti ānando na somanassaṃ na cetaso uppilāvitattaṃ.
비구들이여, 거기서 만일 남들이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한다 해도, 비구들이여, 그때 여래에게는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고 마음의 들뜸도 없다.
Tatra ce, bhikkhave, pare vā tathāgataṃ sakkaronti garuṃ karonti mānenti pūjenti, tatra, bhikkhave, tathāgatassa evaṃ hoti –
비구들이여, 거기서 만일 남들이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면, 비구들이여, 그때 여래에게는 이런 생각이 든다 —
‘yaṃ kho idaṃ pubbe pariññātaṃ tattha me evarūpā kārā karīyantī’ti.
‘예전에 온전히 안 것, 그것에 대해 내게 이런 대접이 행해지는 것이다’라고.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남들이 너희를 욕하고 꾸짖고 화나게 하고 괴롭히더라도 이렇게 하라. 원한도 내지 말고, 불쾌함도 내지 말고, 마음의 언짢음도 내지 말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남들이 너희를 존경하고 공경하고 높이고 받들더라도 이렇게 하라. 기쁨도 내지 말고, 즐거운 마음도 내지 말고, 마음이 들뜨지도 말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남들이 너희를 그렇게 존경하고 공경하고 높이고 받들면, 너희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예전에 철저히 알았던 바로 그것에 대해 이런 대접을 하는구나.’
Tasmātiha, bhikkhave, tumhe cepi pare akkoseyyuṃ paribhāseyyuṃ roseyyuṃ viheseyyuṃ, tatra tumhe hi na āghāto na appaccayo na cetaso anabhiraddhi karaṇīyā.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만일 남들이 그대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성나게 하고 괴롭힌다 해도, 그때 그대들은 노여움도, 언짢음도, 마음의 불쾌함도 내어서는 안 된다.
Tasmātiha, bhikkhave, tumhe cepi pare sakkareyyuṃ garuṃ kareyyuṃ māneyyuṃ pūjeyyuṃ, tatra tumhehi na ānando na somanassaṃ na cetaso uppilāvitattaṃ karaṇīyaṃ.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만일 남들이 그대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한다 해도, 그때 그대들은 기쁨도, 즐거움도, 마음의 들뜸도 내어서는 안 된다.
Tasmātiha, bhikkhave, tumhe cepi pare sakkareyyuṃ garuṃ kareyyuṃ māneyyuṃ pūjeyyuṃ, tatra tumhākaṃ evamassa –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만일 남들이 그대들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면, 그때 그대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
‘yaṃ kho idaṃ pubbe pariññātaṃ, tattha me evarūpā kārā karīyantī’ti.
‘예전에 온전히 안 것, 그것에 대해 내게 이런 대접이 행해지는 것이다’라고.
247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너희 것이 아닌 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느낌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인식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형성들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버려라. 그것들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의식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Tasmātiha, bhikkhave, yaṃ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 그것을 버려라;
taṃ vo pahīnaṃ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Kiñca, bhikkhave, na tumhāk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대들의 것이 아닌가?
Rūpaṃ,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물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taṃ vo pahīnaṃ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Vedanā,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sā vo pahīnā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Saññā,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인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sā vo pahīnā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Saṅkhārā, bhikkhave, na tumhākaṃ, te pajahatha;
비구들이여, 형성작용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버려라;
te vo pahīnā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nti.
그것들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Viññāṇaṃ,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의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taṃ vo pahīnaṃ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제따숲에 있는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마음대로 쓴다고 하자. 그럴 때 너희에게 이런 생각이 들겠느냐? ‘사람들이 우리를 가져가고 태우고 마음대로 쓰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그것은 저희의 자아도 아니고 저희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너희 것이 아닌 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yaṃ imasmiṃ jetavane tiṇakaṭṭhasākhāpalāsaṃ, taṃ jano hareyya vā daheyya vā yathāpaccayaṃ vā kareyya.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제따 숲에 있는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을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마음대로 한다고 하자.
Api nu tumhākaṃ evamassa –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겠는가 —
‘amhe jano harati vā dahati vā yathāpaccayaṃ vā karotī’ti?
‘사람들이 우리를 가져가거나 태우거나 마음대로 한다’라고?”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Na hi no etaṃ, bhante, attā vā attaniyaṃ vā’’ti.
“세존이시여, 그것은 저희의 자아도 아니고 저희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Evameva kho, bhikkhave, yaṃ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그대들의 것이 아닌 것, 그것을 버려라;
taṃ vo pahīnaṃ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너희 것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물질은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느낌도, 인식도, 형성들도, 의식도 너희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그것을 버리면 오랫동안 너희에게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Kiñca, bhikkhave, na tumhāk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대들의 것이 아닌가?
Rūpaṃ,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물질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taṃ vo pahīnaṃ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Vedanā, bhikkhave…pe… saññā, bhikkhave… saṅkhārā, bhikkhave…pe… viññāṇaṃ, bhikkhave, na tumhākaṃ, taṃ pajahatha;
비구들이여, 느낌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비구들이여, 인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비구들이여, 형성작용들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버려라; 비구들이여, 의식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버려라;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22:247.6 ~ PN:mn22/247.13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vo pahīnaṃ dīgharattaṃ hitāya sukhāya bhavissati.
그것을 버린 것이 그대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될 것이다.
248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법을 잘 설했다. 그래서 법이 드러나고 열리고 밝혀졌으며, 해진 헝겊 조각이 잘려 나갔다. 이렇게 법이 밝혀졌으니, 아라한인 비구들에게는 돌고 도는 윤회를 말할 길이 없다. 그들은 번뇌가 다하고, 살 만큼 살고, 할 일을 마치고, 짐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목표에 이르고, 존재의 족쇄가 다하여, 바르게 알아 해탈한 이들이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법을 잘 설했다 —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이다.
Evaṃ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uttāne vivaṭe pakāsite chinnapilotike ye te bhikkhū arahanto khīṇāsavā vusitavanto katakaraṇīyā ohitabhārā anuppattasadatthā parikkhīṇabhavasaṃyojanā sammadaññā vimuttā, vaṭṭaṃ tesaṃ natthi paññāpanāya.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법을 잘 설하여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일 때, 아라한이고 번뇌를 다했고 청정한 삶을 다 살았고 할 일을 마쳤고 짐을 내려놓았고 자신의 목표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다 없앴고 바르게 알아 해탈한 그 비구들에게는, 그들을 두고 말할 굴러감이 없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법을 잘 설했다. 그래서 법이 드러나고 열리고 밝혀졌으며, 해진 헝겊 조각이 잘려 나갔다. 이렇게 법이 밝혀졌으니, 낮은 단계에 묶는 다섯 가지 족쇄를 버린 비구들은 모두 홀연히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들은 그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법을 잘 설했다 —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이다.
Evaṃ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uttāne vivaṭe pakāsite chinnapilotike yesaṃ bhikkhūnaṃ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sabbe te opapātikā, tattha parinibbāyino, anāvattidhammā tasmā lokā.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법을 잘 설하여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일 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버린 그 비구들은 모두 화생하여 거기서 완전한 열반에 들며, 그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법을 잘 설했다. 그래서 법이 드러나고 열리고 밝혀졌으며, 해진 헝겊 조각이 잘려 나갔다. 이렇게 법이 밝혀졌으니, 세 가지 족쇄를 버리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진 비구들은 모두 한 번 돌아오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딱 한 번만 다시 와서 괴로움을 끝낼 것이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법을 잘 설했다 —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이다.
Evaṃ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uttāne vivaṭe pakāsite chinnapilotike yesaṃ bhikkhūnaṃ tīṇi saṃyojanāni pahīnāni, rāgadosamohā tanubhūtā, sabbe te sakadāgāmino, sakideva imaṃ lokaṃ āgantvā dukkhassantaṃ karissan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법을 잘 설하여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일 때, 세 가지 족쇄를 버리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진 그 비구들은 모두 한 번 돌아오는 이여서, 이 세상에 한 번만 와서 괴로움의 끝을 낼 것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법을 잘 설했다. 그래서 법이 드러나고 열리고 밝혀졌으며, 해진 헝겊 조각이 잘려 나갔다. 이렇게 법이 밝혀졌으니, 세 가지 족쇄를 버린 비구들은 모두 흐름에 든 자들이다. 그들은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는 성질을 지니고, 확정되어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법을 잘 설했다 —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이다.
Evaṃ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uttāne vivaṭe pakāsite chinnapilotike yesaṃ bhikkhūnaṃ tīṇi saṃyojanāni pahīnāni, sabbe te sotāpannā, avinipātadhammā, niyatā sambodhiparāyanā.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법을 잘 설하여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일 때, 세 가지 족쇄를 버린 그 비구들은 모두 흐름에 든 이여서,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으로 정해져 나아가는 이들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법을 잘 설했다. 그래서 법이 드러나고 열리고 밝혀졌으며, 해진 헝겊 조각이 잘려 나갔다. 이렇게 법이 밝혀졌으니, 법을 따르는 자와 믿음을 따르는 자인 비구들은 모두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법을 잘 설했다 —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이다.
Evaṃ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uttāne vivaṭe pakāsite chinnapilotike ye te bhikkhū dhammānusārino saddhānusārino sabbe te sambodhiparāyanā.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법을 잘 설하여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일 때, 법을 따르는 이들과 믿음을 따르는 그 비구들은 모두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법을 잘 설했다. 그래서 법이 드러나고 열리고 밝혀졌으며, 해진 헝겊 조각이 잘려 나갔다. 이렇게 법이 밝혀졌으니, 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을 뿐인 비구들은 모두 천상으로 나아간다.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법을 잘 설했다 —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이다.
Evaṃ svākkhāte, bhikkhave, mayā dhamme uttāne vivaṭe pakāsite chinnapilotike yesaṃ mayi saddhāmattaṃ pemamattaṃ sabbe te saggaparāyanā’’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법을 잘 설하여 드러나 있고 열려 있고 밝혀져 있고 기운 헝겊을 잘라낸 것일 때, 나에 대해 믿음만큼이라도, 사랑만큼이라도 지닌 이들은 모두 천상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뱀의 비유 경」 둘째 부분이 끝났다.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비구들은 크게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받들었다.
Alagaddūpamasuttaṃ niṭṭhitaṃ dutiyaṃ.
알라갓두빠마 경이 끝났다. 두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