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Bhūmijasuttaṃ
6. 부미자 경
223
이렇게 들었습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벨루바나, 칼란다카 먹이터에 머무셨다.
Evaṃ me sutaṃ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
ekaṃ samayaṃ bhagavā rājagahe viharati veḷuvane kalandakanivāpe.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대나무 숲, 다람쥐 먹이 주는 곳에 머무셨다.
그때 부미자 존자는 오전에 하의를 두르고 발우와 가사를 챙겨 자야세나 왕자의 처소로 갔다. 그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얼마 뒤 자야세나 왕자가 다가와 부미자 존자와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를 나눈 뒤, 왕자는 한쪽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Atha kho āyasmā bhūmijo pubbaṇhasamayaṃ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yena jayasenassa rājakumārassa nivesanaṃ tenupasaṅkami;
그때 부미자 존자가 오전에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자야세나 왕자의 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paññatte āsane nisīdi.
다가가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Atha kho jayaseno rājakumāro yenāyasmā bhūmijo tenupasaṅkami;
그때 자야세나 왕자가 부미자 존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āyasmatā bhūmijena saddhiṃ sammodi.
다가가서 부미자 존자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정다운 인사말을 서로 나눈 뒤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o kho jayaseno rājakumāro āyasmantaṃ bhūmijaṃ etadavoca –
한쪽에 앉은 자야세나 왕자가 부미자 존자께 이렇게 말했다 —
“부미자 존자님, 이런 말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습니다. ‘청정한 수행을 하는 사람이 바라는 마음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든, 역시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자님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주장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santi, bho bhūmij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부미자 존자시여, 이렇게 주장하고 이렇게 보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ā’ti.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Idha bhoto bhūmijassa satthā kiṃvādī kimakkhāyī’’ti?
여기 부미자 존자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주장하시고 무엇을 설하십니까?”
“왕자님, 저는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마주하여 듣고 받아 지닌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세존께서 이렇게 설명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바르지 못하게 청정한 수행을 하면, 바라는 마음이 있든 없든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든, 둘 다 아니든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바르게 청정한 수행을 하면, 바라는 마음이 있든 없든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든, 둘 다 아니든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왕자님, 저는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마주하여 듣고 받아 지닌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세존께서 이렇게 설명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Na kho metaṃ, rājakumāra, bhagavato sammukhā sutaṃ, sammukhā paṭiggahitaṃ.
“왕자여, 나는 그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지 않았고, 면전에서 받지 않았다.
Ṭhānañca kho etaṃ vijjati yaṃ bhagavā evaṃ byākareyya –
그러나 세존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리라는 그런 도리는 있다 —
‘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epi karitvā 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anāsañcepi karitvā 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ā’ti.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Na kho me taṃ, rājakumāra, bhagavato sammukhā sutaṃ, sammukhā paṭiggahitaṃ.
왕자여, 나는 그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지 않았고, 면전에서 받지 않았다.
Ṭhānañca kho etaṃ vijjati yaṃ bhagavā evaṃ byākareyyā’’ti.
그러나 세존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리라는 그런 도리는 있다.”
“스승께서 정말 그렇게 주장하고 말씀하신다면, 존자님의 스승께서는 틀림없이 모든 사문과 바라문 위에서 그 정수리에 닿아 서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야세나 왕자는 부미자 존자에게 자기 솥에서 지은 음식을 손수 올려 대접했다.
‘‘Sace kho bhoto bhūmijassa satthā evaṃvādī evamakkhāyī, addhā bhoto bhūmijassa satthā sabbesaṃyeva puthusamaṇabrāhmaṇānaṃ muddhānaṃ maññe āhacca tiṭṭhatī’’ti.
“만일 부미자 존자의 스승께서 이렇게 주장하시고 이렇게 설하신다면, 참으로 부미자 존자의 스승께서는 그 모든 여러 사문·바라문들의 정수리를 밟고 서 계시는 듯합니다.”
Atha kho jayaseno rājakumāro āyasmantaṃ bhūmijaṃ sakeneva thālipākena parivisi.
그때 자야세나 왕자가 바로 자기의 그릇 음식으로 부미자 존자를 대접했다.
224
부미자 존자는 식사를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을 찾아갔다. 그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쪽에 앉아 이렇게 말씀드렸다.
Atha kho āyasmā bhūmijo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paṭikkan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그때 부미자 존자가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다가가서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bhūmijo bhagavantaṃ etadavoca –
한쪽에 앉은 부미자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오늘 오전에 저는 하의를 두르고 발우와 가사를 챙겨 자야세나 왕자의 처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련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자 왕자가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반갑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를 나눈 뒤, 왕자는 한쪽에 앉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idhāhaṃ, bhante, pubbaṇhasamayaṃ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yena jayasenassa rājakumārassa nivesanaṃ tenupasaṅkamiṃ;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오전에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자야세나 왕자의 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upasaṅkamitvā paññatte āsane nisīdiṃ.
다가가서 마련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Atha kho, bhante, jayaseno rājakumāro yenāhaṃ tenupasaṅkami;
세존이시여, 그때 자야세나 왕자가 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upasaṅkamitvā mayā saddhiṃ sammodi.
다가와서 저와 함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정다운 인사말을 서로 나눈 뒤 한쪽에 앉았습니다.
Ekamantaṃ nisinno kho, bhante, jayaseno rājakumāro maṃ etadavoca –
세존이시여, 한쪽에 앉은 자야세나 왕자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부미자 존자님, 이런 말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습니다. 청정한 수행을 하는 사람이 바라는 마음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결실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든, 역시 결실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존자님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주장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santi, bho bhūmij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부미자 존자시여, 이렇게 주장하고 이렇게 보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3.11에서 되살렸습니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ā’ti.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Idha bhoto bhūmijassa satthā kiṃvādī kimakkhāyī’ti?
‘여기 부미자 존자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주장하시고 무엇을 설하십니까?’
세존이시여, 이 말을 듣고 저는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자님, 저는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마주하여 듣고 받아 지닌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세존께서 이렇게 설명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바르지 못하게 청정한 수행을 하면, 바라는 마음이 있든 없든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든, 둘 다 아니든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바르게 청정한 수행을 하면, 바라는 마음이 있든 없든,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든, 둘 다 아니든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왕자님, 저는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마주하여 듣고 받아 지닌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세존께서 이렇게 설명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왕자가 말했습니다. ‘스승께서 정말 그렇게 주장하고 말씀하신다면, 존자님의 스승께서는 틀림없이 모든 사문과 바라문 위에서 그 정수리에 닿아 서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vaṃ vutte ahaṃ, bhante, jayasenaṃ rājakumāraṃ etadavocaṃ –
세존이시여, 이렇게 말하자 저는 자야세나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na kho me taṃ, rājakumāra, bhagavato sammukhā sutaṃ, sammukhā paṭiggahitaṃ.
‘왕자여, 나는 그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지 않았고, 면전에서 받지 않았다.
Ṭhānañca kho etaṃ vijjati yaṃ bhagavā evaṃ byākareyya –
그러나 세존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리라는 그런 도리는 있다 —
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a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epi karitvā 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yoniso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āti.
기대를 내지 않고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3.22 ~ PN:mn126/223.23에서 되살렸습니다.
Na kho me taṃ, rājakumāra, bhagavato sammukhā sutaṃ, sammukhā paṭiggahitaṃ.
왕자여, 나는 그것을 세존의 면전에서 듣지 않았고, 면전에서 받지 않았다.
Ṭhānañca kho etaṃ vijjati yaṃ bhagavā evaṃ byākareyyā’ti.
그러나 세존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리라는 그런 도리는 있다.’
‘Sace bhoto bhūmijassa satthā evaṃvādī evamakkhāyī, addhā bhoto bhūmijassa satthā sabbesaṃyeva puthusamaṇabrāhmaṇānaṃ muddhānaṃ maññe āhacca tiṭṭhatī’ti.
‘만일 부미자 존자의 스승께서 이렇게 주장하시고 이렇게 설하신다면, 참으로 부미자 존자의 스승께서는 그 모든 여러 사문·바라문들의 정수리를 밟고 서 계시는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렇게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 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한 것이 되겠습니까? 세존을 없는 말로 비방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법에 맞게, 법의 이치를 따라 설명한 것이 되겠습니까? 법에 따라 이어지는 어떤 주장이나 반론도 비난받을 자리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Kaccāhaṃ, bhante, evaṃ puṭṭho evaṃ byākaramāno vuttavādī ceva bhagavato homi, na ca bhagavantaṃ abhūtena abbhācikkhāmi,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omi,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vād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atī’’’ti?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한 것이 되고, 사실 아닌 것으로 세존을 헐뜯지 않은 것이 되며, 법에 맞게 법을 대답한 것이 되고, 법다운 어떤 논박도 비난받을 만한 자리에 이르지 않는 것이 됩니까?”
“부미자여, 참으로 그렇다. 너는 그렇게 질문을 받고 그렇게 답하여 내 말 그대로 말했다. 나를 없는 말로 비방하지도 않았다. 법에 맞게, 법의 이치를 따라 설명했다. 법에 따라 이어지는 어떤 주장이나 반론도 비난받을 자리에 이르지 않는다.
‘‘Taggha tvaṃ, bhūmija, evaṃ puṭṭho evaṃ byākaramāno vuttavādī ceva me hosi, na ca maṃ abhūtena abbhācikkhasi,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osi,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vād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ati.
“참으로 그렇다, 부미자여. 너는 이렇게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하여, 내가 말한 대로 말한 것이 되고, 사실 아닌 것으로 나를 헐뜯지 않은 것이 되며, 법에 맞게 법을 대답한 것이 되고, 법다운 어떤 논박도 비난받을 만한 자리에 이르지 않는다.
부미자여, 그릇된 견해, 그릇된 사유, 그릇된 말, 그릇된 행위, 그릇된 생계, 그릇된 노력, 그릇된 마음챙김, 그릇된 삼매를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청정한 수행을 해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마음 없이 해도 얻을 수 없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면서 해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Ye hi keci, bhūmija,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micchādiṭṭhino micchāsaṅkappā micchāvācā micchākammantā micchāājīvā micchāvāyāmā micchāsatī micch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릇된 견해를 지니고, 그릇된 사유를 지니고, 그릇된 말을 하고, 그릇된 행위를 하고, 그릇된 생계를 지니고, 그릇된 정진을 하고, 그릇된 마음챙김을 지니고, 그릇된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내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데 맞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225
부미자여,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름이 필요한 사람이 기름을 찾아 돌아다닌다. 그러다 모래를 통에 쏟아 붓고 물을 뿌려 가며 거듭 짜낸다고 하자.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해도 기름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마음 없이 해도 얻을 수 없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면서 해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기름을 얻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telatthiko telagavesī telapariyesanaṃ caramāno vālik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부미자여, 마치 기름이 필요하고 기름을 찾고 기름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 모래를 통에 붓고 물을 뿌리고 또 뿌리며 짜는 것과 같다.
Āsañcepi karitvā vālik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abhabbo te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모래를 통에 붓고 물을 뿌리고 또 뿌리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 vālik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abhabbo te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모래를 통에 붓고 물을 뿌리고 또 뿌리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없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vālik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abhabbo te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모래를 통에 붓고 물을 뿌리고 또 뿌리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없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vālik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abhabbo te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모래를 통에 붓고 물을 뿌리고 또 뿌리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없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te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기름을 얻는 데 맞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미자여, 그릇된 견해, 그릇된 사유, 그릇된 말, 그릇된 행위, 그릇된 생계, 그릇된 노력, 그릇된 마음챙김, 그릇된 삼매를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청정한 수행을 해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마음 없이 해도 얻을 수 없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면서 해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micchādiṭṭhino micchāsaṅkappā micchāvācā micchākammantā micchāājīvā micchāvāyāmā micchāsatī micch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이와 같이, 부미자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릇된 견해를 지니고, 그릇된 사유를 지니고, 그릇된 말을 하고, 그릇된 행위를 하고, 그릇된 생계를 지니고, 그릇된 정진을 하고, 그릇된 마음챙김을 지니고, 그릇된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내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데 맞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또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우유가 필요한 사람이 우유를 찾아 돌아다닌다. 그러다 어린 송아지를 데리고 있는 암소의 뿔을 잡아당겨 짜려 한다고 하자.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해도 우유를 얻을 수 없다. 바라는 마음 없이 해도,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하면서 해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해도 우유를 얻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우유를 얻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khīratthiko khīragavesī khīrapariyesanaṃ caramāno gāviṃ taruṇavacchaṃ visāṇato āviñcheyya.
“부미자여, 마치 우유가 필요하고 우유를 찾고 우유를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 갓 난 송아지를 둔 암소의 뿔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
Āsañcepi karitvā gāviṃ taruṇavacchaṃ visāṇato āviñcheyya, abhabbo khīr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고서 갓 난 송아지를 둔 암소의 뿔을 잡아당기더라도 그는 우유를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gāviṃ taruṇavacchaṃ visāṇato āviñcheyya, abhabbo khīr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갓 난 송아지를 둔 암소의 뿔을 잡아당기더라도 그는 우유를 얻을 수 없다;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갓 난 송아지를 둔 암소의 뿔을 잡아당기더라도 그는 우유를 얻을 수 없다;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갓 난 송아지를 둔 암소의 뿔을 잡아당기더라도 그는 우유를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5.15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khīr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우유를 얻는 데 맞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미자여, 그릇된 견해를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부터 그릇된 삼매를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까지, 누구든 청정한 수행을 해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는 마음을 가졌어도, 바라는 마음이 없어도 그렇다. 바라기도 하고 바라지 않기도 해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니어도 그렇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micchādiṭṭhino…pe… micch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이와 같이, 부미자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릇된 견해를 지니고, 그릇된 사유를 지니고, 그릇된 말을 하고, 그릇된 행위를 하고, 그릇된 생계를 지니고, 그릇된 정진을 하고, 그릇된 마음챙김을 지니고, 그릇된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내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5.8에서 되살렸습니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내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내기도 하고 내지 않기도 하면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는 것도 아니게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5.9 ~ PN:mn126/225.10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데 맞는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226
부미자여, 버터를 바라고 버터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항아리에 물을 붓고 막대로 휘젓는다. 버터를 얻고 싶은 마음으로 하든, 얻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든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없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버터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navanītatthiko navanītagavesī navanītapariyesanaṃ caramāno udakaṃ kalase āsiñcitvā matthena āviñcheyya.
“부미자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버터를 원하고 버터를 찾아 버터를 구하러 다니면서, 물을 통에 붓고 젓개로 젓는다고 하자.
Āsañcepi karitvā udakaṃ kalase āsiñcitvā matthena āviñcheyya, abhabbo navanīt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고서 물을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udakaṃ kalase āsiñcitvā matthena āviñcheyya, abhabbo navanīt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물을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물을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물을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navanīt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버터를 얻는 바른 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와 같이 그릇된 견해, 그릇된 사유, 그릇된 말, 그릇된 행위, 그릇된 생계, 그릇된 노력, 그릇된 마음챙김, 그릇된 삼매를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결실을 바라고 청정한 삶을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지 않고 살아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살아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micchādiṭṭhino…pe… micch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꼭 이와 같이,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릇된 견해를 지니고, 그릇된 사유를 지니고, 그릇된 말을 지니고, 그릇된 행위를 지니고, 그릇된 생계를 지니고, 그릇된 정진을 지니고, 그릇된 마음챙김을 지니고, 그릇된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9에서 되살렸습니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20 ~ PN:mn126/226.2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또 불을 바라고 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물기 있고 진이 남은 젖은 나무를 위쪽 부싯개로 삼아 비벼 댄다. 불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하든, 얻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든 그는 불을 얻을 수 없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불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aggitthiko aggigavesī aggipariyesanaṃ caramāno allaṃ kaṭṭhaṃ sasnehaṃ uttarāraṇiṃ ādāya abhimantheyya.
“부미자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을 원하고 불을 찾아 불을 구하러 다니면서, 물기 머금은 젖은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댄다고 하자.
Āsañcepi karitvā allaṃ kaṭṭhaṃ sasnehaṃ uttarāraṇiṃ ādāya abhimantheyya, abhabbo aggi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고서 물기 머금은 젖은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없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allaṃ kaṭṭhaṃ sasnehaṃ uttarāraṇiṃ ādāya abhimantheyya, abhabbo aggi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물기 머금은 젖은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물기 머금은 젖은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물기 머금은 젖은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1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aggi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불을 얻는 바른 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와 같이 그릇된 견해에서 그릇된 삼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릇되게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결실을 바라고 청정한 삶을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바라지 않고 살아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살아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micchādiṭṭhino…pe… micch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꼭 이와 같이,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릇된 견해를 지니고, 그릇된 사유를 지니고, 그릇된 말을 지니고, 그릇된 행위를 지니고, 그릇된 생계를 지니고, 그릇된 정진을 지니고, 그릇된 마음챙김을 지니고, 그릇된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9에서 되살렸습니다.
anāsañcepi karitvā…pe…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a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20 ~ PN:mn126/226.2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를 지닌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결실을 바라고 청정한 삶을 살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지 않고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Ye hi keci, bhūmija,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sammādiṭṭhino sammāsaṅkappā sammāvācā sammākammantā sammāājīvā sammāvāyāmā sammāsatī samm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사유를 지니고, 바른 말을 지니고, 바른 행위를 지니고, 바른 생계를 지니고, 바른 정진을 지니고, 바른 마음챙김을 지니고, 바른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227
부미자여, 기름을 바라고 기름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참깨 가루를 통에 쏟고 물을 조금씩 뿌려 가며 짠다. 기름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하든, 얻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든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있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기름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telatthiko telagavesī telapariyesanaṃ caramāno tilapiṭṭh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부미자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기름을 원하고 기름을 찾아 기름을 구하러 다니면서, 참깨 가루를 나무 통에 부어 넣고 물을 거듭거듭 뿌려 가며 짠다고 하자.
Āsañcepi karitvā tilapiṭṭh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bhabbo te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고서 참깨 가루를 나무 통에 부어 넣고 물을 거듭거듭 뿌려 가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있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tilapiṭṭhaṃ doṇiyā ākiritvā udakena paripphosakaṃ paripphosakaṃ pīḷeyya, bhabbo te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참깨 가루를 나무 통에 부어 넣고 물을 거듭거듭 뿌려 가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참깨 가루를 나무 통에 부어 넣고 물을 거듭거듭 뿌려 가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참깨 가루를 나무 통에 부어 넣고 물을 거듭거듭 뿌려 가며 짜더라도, 그는 기름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7.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te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기름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와 같이 바른 견해에서 바른 삼매에 이르기까지 갖춘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결실을 바라고 청정한 삶을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지 않고 살아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살아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sammādiṭṭhino…pe… samm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꼭 이와 같이,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사유를 지니고, 바른 말을 지니고, 바른 행위를 지니고, 바른 생계를 지니고, 바른 정진을 지니고, 바른 마음챙김을 지니고, 바른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9에서 되살렸습니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20 ~ PN:mn126/226.2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우유를 바라고 우유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어린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의 젖을 잡아당긴다. 우유를 얻고 싶은 마음으로 하든, 얻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든 그는 우유를 얻을 수 있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우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khīratthiko khīragavesī khīrapariyesanaṃ caramāno gāviṃ taruṇavacchaṃ thanato āviñcheyya.
“부미자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젖을 원하고 젖을 찾아 젖을 구하러 다니면서, 갓 난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의 젖통을 당겨 짠다고 하자.
Āsañcepi karitvā gāviṃ taruṇavacchaṃ thanato āviñcheyya, bhabbo khīr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고서 갓 난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의 젖통을 당겨 짜더라도, 그는 젖을 얻을 수 있다;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gāviṃ taruṇavacchaṃ thanato āviñcheyya, bhabbo khīr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갓 난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의 젖통을 당겨 짜더라도, 그는 젖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갓 난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의 젖통을 당겨 짜더라도, 그는 젖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갓 난 송아지를 거느린 암소의 젖통을 당겨 짜더라도, 그는 젖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7.11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khīr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젖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와 같이 바른 견해에서 바른 삼매에 이르기까지 갖춘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청정한 삶을 살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는 마음이든, 바라지 않는 마음이든 마찬가지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이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sammādiṭṭhino…pe… samm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pe… anāsañcepi karitvā…pe…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pe…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꼭 이와 같이,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사유를 지니고, 바른 말을 지니고, 바른 행위를 지니고, 바른 생계를 지니고, 바른 정진을 지니고, 바른 마음챙김을 지니고, 바른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고,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9 ~ PN:mn126/226.2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228
부미자여, 버터를 바라고 버터를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응유를 항아리에 붓고 막대로 휘젓는다. 버터를 얻고 싶은 마음으로 하든, 얻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든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있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버터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navanītatthiko navanītagavesī navanītapariyesanaṃ caramāno dadhiṃ kalase āsiñcitvā matthena āviñcheyya.
“부미자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버터를 원하고 버터를 찾아 버터를 구하러 다니면서, 응유를 통에 붓고 젓개로 젓는다고 하자.
Āsañcepi karitvā dadhiṃ kalase āsiñcitvā matthena āviñcheyya, bhabbo navanīt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고서 응유를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있다;
anāsañcepi karitvā…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dadhiṃ kalase āsiñcitvā matthena āviñcheyya, bhabbo navanīt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응유를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응유를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응유를 통에 붓고 젓개로 젓더라도, 그는 버터를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8.2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navanīt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버터를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와 같이 바른 견해에서 바른 삼매에 이르기까지 갖춘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결실을 바라고 청정한 삶을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지 않고 살아도,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도,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살아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sammādiṭṭhino…pe… samm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꼭 이와 같이,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사유를 지니고, 바른 말을 지니고, 바른 행위를 지니고, 바른 생계를 지니고, 바른 정진을 지니고, 바른 마음챙김을 지니고, 바른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9에서 되살렸습니다.
anāsañcepi karitvā…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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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불을 바라고 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마르고 속이 빈 나무를 위쪽 부싯개로 삼아 비벼 댄다. 불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하든, 얻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하든 그는 불을 얻을 수 있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하든,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하든 마찬가지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불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불확실]
‘‘Seyyathāpi, bhūmija, puriso aggitthiko aggigavesī aggipariyesanaṃ caramāno sukkhaṃ kaṭṭhaṃ koḷāpaṃ uttarāraṇiṃ ādāya abhimantheyya;
“부미자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을 원하고 불을 찾아 불을 구하러 다니면서, 바싹 마른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댄다고 하자;
( ) āsañcepi karitvā… anāsañcepi karitvā.
기대를 짓고서 바싹 마른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지 않고서 바싹 마른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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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sukkha kaṭṭhaṃ koḷāpaṃ uttarāraṇiṃ ādāya abhimantheyya, bhabbo aggi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바싹 마른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있다;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바싹 마른 나무를 윗 부싯막대로 삼아 비벼 대더라도, 그는 불을 얻을 수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26:226.11에서 되살렸습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aggi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불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와 같이 바른 견해에서 바른 삼매에 이르기까지 갖춘 사문이나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가 결실을 바라고 청정한 삶을 살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지 않고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 마음으로 살아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왜 그런가? 부미자여, 그것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vameva kho, bhūmija, ye hi keci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sammādiṭṭhino…pe… sammāsamādhino te 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꼭 이와 같이,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바른 견해를 지니고, 바른 사유를 지니고, 바른 말을 지니고, 바른 행위를 지니고, 바른 생계를 지니고, 바른 정진을 지니고, 바른 마음챙김을 지니고, 바른 삼매를 지닌 이들은, 기대를 짓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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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지 않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āsañca a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nevāsaṃ nānāsañcepi karitvā brahmacariyaṃ caranti, bhabbā phalassa adhigamāya.
기대를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고서 청정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oni hesā, bhūmija, phalassa adhigamāya.
부미자여, 이것은 결실을 얻는 바른 방도이기 때문이다.
부미자여, 이 네 가지 비유가 그대에게 떠올라 자야세나 왕자에게 들려주었다면 어땠겠는가. 왕자가 그대에게 믿음을 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믿음을 낸 왕자는 그 믿음에 걸맞은 존경을 나타냈을 것이다.
‘‘Sace kho taṃ, bhūmija, jayasenassa rājakumārassa imā catasso upamā paṭibhāyeyyuṃ anacchariyaṃ te jayaseno rājakumāro pasīdeyya, pasanno ca te pasannākāraṃ kareyyā’’ti.
“부미자여, 만일 그대에게 자야세나 왕자를 두고 이 네 가지 비유가 떠올랐더라면, 자야세나 왕자가 그대에게 믿음을 내고, 믿음을 낸 그가 그대에게 믿음의 표시를 하였을 것이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어떻게 자야세나 왕자에게 들려줄 비유를 떠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전에 들어 본 적 없는 이토록 놀라운 네 가지 비유를 말입니다. 그것은 세존께서나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Kuto pana maṃ, bhante, jayasenassa rājakumārassa imā catasso upamā paṭibhāyissanti anacchariyā pubbe assutapubbā, seyyathāpi bhagavanta’’nti?
“세존이시여, 예전에 들어 본 적 없는 이 네 가지 비유가, 세존께 그러하듯, 자야세나 왕자를 두고 저에게 어디에서 저절로 떠오르겠습니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미자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부미자경이 끝났다. 여섯 번째이다.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o āyasmā bhūmij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부미자 존자는 마음이 흡족하여,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며 받들었다.
Bhūmijasuttaṃ niṭṭhitaṃ chaṭṭhaṃ.
부미자 경이 끝났다. 여섯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