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
(9)
주 이 경에는 대응 후보(팔리·산스크리트 증언)가 투입되지 않았다. 아래 모든 좌표의 대응은 「아직 안 잡음」(unaligned)이며, 없음이 확인된 것(absent)이 아니다. 제목 자리는 번호 「九」뿐이다.
聞如是:
이와 같이 들었다.
주 聞如是는 이 아함 전권 453회 나오는 개경 정형구다. 如是는 「이와 같이」로 풀고 따로 부사를 얹지 않는다.
一時,佛在波羅㮈鹿野園中,與大比丘眾五百人俱。
한때 부처님께서 바라내 녹야원 안에서 큰 비구 대중 오백 사람과 함께 계셨다.
주 (1) 波羅㮈는 음역(波羅 + 㮈)이므로 한자 독음 「바라내」(한국 불교계 정착형)로 적는다. 㮈는 奈의 이체자(이문: 宋·元·明·聖 奈). 3분할 표의 `波羅`→`Sāla` 행은 波羅㮈의 앞 두 글자를 따로 잘라 걸린 기계 오적중으로 보여 따르지 않았다(저본이 이김). 도시 이름이며 뜻을 풀 글자가 아니다. (2) 鹿野園은 정착형 「녹야원」(사슴 들판 동산). 慧琳 0738c01(善見律)은 사슴 왕이 사람 왕에게 목숨을 구한 일로 그 숲을 사슴에게 베풀어 「鹿野」라 했다고 전한다. 園은 동산. (3) 大比丘眾五百人은 「큰 비구 대중 오백 사람」. 俱는 「함께」. (4) 佛은 [구속] 「부처님」. 이 경은 0.3·0724b27.1에서 佛, 0724a08.1에서 世尊을 같은 분에게 쓴다 — 한역이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다. [불확실:고유명·표기_유형]은 波羅㮈가 음역임은 서나 3분할 표가 이 이름에 대해 다른 행을 걸었기 때문에 남긴다.
爾時,世尊告諸比丘:「當思惟無常想,廣布無常想,以思惟無常想,廣布無常想,便斷欲愛、色愛、無色愛,盡斷憍慢、無明。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덧없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고 덧없다는 생각을 널리 펴라. 덧없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고 널리 폄으로써 곧 욕망의 애착, 색의 애착, 색 없음의 애착을 끊고, 교만과 무명을 모두 끊는다.
주 (1) 世尊 [구속] 「세존」, 比丘 [구속] 「비구」. 같은 분을 0.3은 佛로 부른다(한자 흔들림). 전거표: 比丘 ← 팔리 bhikkhu / 근대 범어 Bhikṣu — 두 계통이 선다(⚠판정하지 않음). 慧琳 0482a20: 苾蒭의 다섯 뜻(怖魔·乞士·淨命·淨戒·破惡). (2) 思惟: 3분할 표가 「의역」으로 분류하므로 음독(사유)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다」로 옮기며 이 경 안에서 통일한다(사전 思惟 ① 증일 349회·123경). (3) 無常想: 「덧없다는 생각」(의역). 想은 확정역이 없어 「생각」으로 옮겼다 — 술어로서의 想(인식 작용)인지 보통 「생각」인지는 저본만으로 닫히지 않는다. 無常想 ① 증일 33회·6경, 「廣布」와 짝을 이룬다(14회). (4) 廣布는 「널리 펴다」. (5) 欲愛·色愛·無色愛: 欲愛는 3분할 「의역」이므로 「욕망의 애착」, 같은 틀로 「색의 애착」·「색 없음의 애착」(色은 정착어 「색」)으로 옮긴다. 愛는 「애착」. (6) 憍慢은 정착어 「교만」(慧琳 0793b09는 憍/驕 표기만 푼다). (7) 無明: 3분할 표는 「음의합벽」으로 걸지만 이 말은 음역 글자 없이 전부 뜻 글자라 정착어 「무명」으로 둔다(전거표 팔리 Avijjā ← 범어 당대 ābidyā가 갈리나 이 경 본문에 쓰지 않는다). (8) 이문: 以는 宋·元·明에 已(이미) — 본문은 大正의 以 「…로써」. (9) 當은 「-라」 어미가 진다. 諸는 「-들」이 진다. 便은 「곧」.
何以故?
무슨 까닭인가?
주 何以故의 以는 「까닭」 안에 흡수된다(앵커 以: 수단·이유, 흡수). 의문은 어미 「-인가」가 진다.
昔者過去久遠世時,有辟支佛名善目,顏貌端政,面如桃華色,視瞻審諦,口作優鉢華香,身作栴檀香。
옛날 지나간 아주 오랜 세상 때에, 이름이 좋은 눈이라는 벽지불이 있었는데, 얼굴 모습이 단정하고 얼굴은 복숭아꽃 빛깔 같았으며 바라보는 눈길이 살피어 분명했고, 입은 우발 꽃 향기를 내고 몸은 전단 향기를 냈다.
주 (1) 辟支佛: 3분할 표는 「의역(뜻으로)」으로 걸지만 慧琳 0484b07은 「辟支迦此云獨, 佛陀云覺」으로 풀어 辟支(迦)는 소리, 佛은 뜻(覺)으로 옮긴 말이다 — 한 이름 안에 음과 뜻이 섞였다. 한국 불교계 정착어 「벽지불」(독각)로 적는다. 전거표 팔리 Paccekabuddha. [구속] 佛(저본 출현 10)은 이 중 8이 辟支佛 안의 글자이므로, 복합 호칭 안의 佛에는 「부처님」을 끼우지 않았다 — 저본이 이긴 자리로 신고한다. (2) 善目: 이름이 뜻 글자(善·目)로 되어 있어 의역으로 보고 음독(선목)하지 않고 「좋은 눈」으로 옮겼다(판별 근거: 이 이름은 표·전거표에 없어 스스로 판별). 이 경에서 눈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아 다른 뜻으로 풀지 않는다. (3) 優鉢華: 優鉢은 소리(優鉢羅의 줄임, 사전 優鉢 ① 증일 19회·13경, 파란 연꽃 이름은 ⑥ 후대 풀이), 華는 뜻 「꽃」 — 「우발 꽃」. 栴檀은 慧琳 0499c05 「梵語香木名也, 唐無正譯, 即白檀香」·0324b22 — 소리로 옮긴 말이므로 한자 독음 「전단」(3분할은 「유형이 갈린다」로 걸었다). 香은 「향기」. (4) 顏貌端政: 政은 宋·元·明·聖에 正 — 본문은 大正의 政 「단정」(端正). 面如桃華色의 如는 「같다」, 桃華는 「복숭아꽃」. 視瞻審諦는 「바라보는 눈길이 살피어 분명하다」로 읽었으나 審諦의 諦가 「분명」인지 「살핌」인지 저본만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이문: 瞻은 大正 원문이 贍(CBETA가 瞻으로 교정), 優는 聖에 憂, 身은 宋·元·明·聖에 體, 栴은 聖에 旃. (5) 者(昔者)는 「옛날」에 흡수. 有辟支佛名善目은 「이름이 …라는 벽지불이 있었는데」. 作은 「내다」.
「是時,善目辟支佛到時,著衣持鉢,入波羅㮈城乞食。
「이때 좋은 눈 벽지불이 때가 되자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바라내성에 들어가 걸식했다.
주 著衣는 「옷을 입다」, 持鉢은 「발우를 들다」(鉢=발우, 정착어), 乞食은 정착어 「걸식」. 到時의 時는 때(공양 때)로 읽어 「때가 되자」. 이문: 㮈는 宋·元·明·聖에 奈. 慧琳은 이 말을 따로 풀지 않는다.
漸漸至大長者家,在門外默然而立。
차츰차츰 큰 장자의 집에 이르러 문 밖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주 長者는 [구속] 「장자」(慧琳 0451c02 「年長德艾事長於人」, 0496c01 「天竺國俗多以商估為業」 — 호칭·신분 풀이는 문헌마다 갈린다). 大長者는 「큰 장자」. 漸漸은 「차츰차츰」(慧琳 0361a12 「猶稍稍」). 默然은 「말없이」(慧琳 0428c16 「不言也」). 而는 흡수.
是時,長者女遙見有道士在門外立,端政無雙,顏貌殊特,世之希有,口作優鉢華香,體作栴檀香,便起欲心,向彼比丘所,便作是說:『汝今端政,面如桃華色,世之希有!我今雖處女人,亦復端政,可共合會。
이때 장자의 딸이 멀리서 문 밖에 도 닦는 이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단정하기가 짝이 없고 얼굴 모습이 특별하여 세상에 드문 이였다. 입은 우발 꽃 향기를 내고 몸은 전단 향기를 냈으므로, 곧 욕망의 마음을 일으켜 그 비구가 있는 곳을 향하여 곧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지금 단정하고 얼굴이 복숭아꽃 빛깔 같아 세상에 드문 분입니다! 나는 지금 비록 여인으로 있으나 또한 단정하니, 함께 합하여 모일 수 있습니다.
주 (1) 같은 분을 여기서는 道士, 곧이어 彼比丘, 앞에서는 辟支佛이라 부른다 — 한역이 같은 대상에 다른 한자를 쓴다. 比丘는 [구속] 「비구」. 道士는 확정역이 없고 사전 道士 ①(증일 15회·11경: 「沙門·道士」 짝)은 출가 수행자를 가리키는 쓰임을 보여 주므로 「도 닦는 이」로 옮겼다(⑥ 丁福保의 道教 쪽 풀이는 후대라 버린다). (2) 我今雖處女人: 處女人을 「처녀(處女)+人」으로도, 「處(있다)+女人」으로도 끊을 수 있다. 사전이 處와 女人을 따로 세운 점에 기대 「여인으로 있으나」로 읽었으나 저본만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3) 長者女는 「장자의 딸」(長者 [구속] 「장자」). 有道士在門外立의 有는 새 인물의 등장을 서술하는 자리라 「도 닦는 이가 …서 있는 것을 보니」로 주어화했다. 向彼比丘所의 所는 「곳」(處所). (4) 汝今은 청자(벽지불)가 윗사람이므로 존댓말로 통일(§⑦), 「그대」. (5) 可共合會는 「함께 합하여 모일 수 있습니다」 — 合會를 뜻 그대로 옮겼고 뒤의 合會因緣(0724b12.1)과 같은 낱말로 통일한다. (6) 이문: 政→正, 優→憂, 華→蓮華(宋·元·明), 體→身(宋·元·明), 栴→旃, 起→興(宋·元·明). 본문은 大正대로. 希有는 「드물다」(慧琳 0326a11 「希罕也」).
然我家中饒多珍寶,資財無量;然作沙門,甚為不易。』
그러나 나의 집안에는 진귀한 보배가 넉넉히 많고 재물이 한량없습니다. 그러나 사문이 되는 것은 매우 쉽지 않습니다.』
주 沙門은 음역(3분할)이므로 한자 독음 「사문」(정착어). 慧琳 0420a16 「梵語訛也, 正梵音云室囉末拏, 唐云勤懇」·0439c20·0477b19 「此云勤勞」 인용. 전거표: 팔리 Samaṇa / 근대 범어 Śramaṇa(⚠다른 부 MA의 대역) — 두 계통이 선다, 판정하지 않는다. 然이 두 번 나온다: 앞의 然은 「그러나」로 읽되 이어지는 문맥(권유)에서는 첨가 어세로도 읽힌다 — 저본대로 둘 다 「그러나」. 饒多는 「넉넉히 많다」, 資財(慧琳 0363a18 「資貨」)는 「재물」, 無量은 「한량없다」. 為(甚為不易)는 계사 「-이다」 꼴 서술. 이문: 多珍→財多(聖). 존댓말(청자가 벽지불).
「是時,辟支佛問曰:『大妹!今為染著何處?』
「이때 벽지불이 물었다. 『큰 누이여! 지금 어디에 물들어 집착하는가?』
주 大妹는 확정역이 없는 호칭이다. 妹(손아래 누이)에 大가 붙은 말이며, 높임인지 단순 호칭인지 저본이 말하지 않아 글자대로 「큰 누이」로 옮기고 이 경 안에서 통일한다. 染著(사전 染著 ① 증일 55회·28경)은 「물들어 집착하다」. 今為染著何處의 為는 의문 「어디」를 받는 서술 자리로 「…하는가」에 흡수한다(為…所 피동이 아니다). 벽지불이 청자(재가 여인)에게 하는 말이므로 평서 어미.
「長者女報曰:『我今正著眼色,又復口中作優鉢華香,身作栴檀香。』
「장자의 딸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 바로 눈의 색에 집착합니다. 또 입 안에서는 우발 꽃 향기를 내고 몸에서는 전단 향기를 냅니다.』
주 眼色을 「눈의 색」(눈의 모습)으로 옮겼다. 뒤(0724b05.1)에 `眼、色`이 쉼표로 갈려 「눈과 색」으로 나오는 점과 다르므로 같은 풀이인지는 저본만으로 닫히지 않는다. 又復口中作優鉢華香, 身作栴檀香은 주어가 비어 있다 — 앞 좌표(0724a11.2·0724a16.1)에서 벽지불의 특징으로 나온 점에 비추어 「입 안에서는…」을 글자대로 두고 주어를 보충하지 않았다. 正著의 正은 「바로」, 又復는 「또」. 報는 「대답하다」. 이문: 優→憂(聖), 栴→旃(聖). 존댓말.
「是時,辟支佛舒左手,以右手挑眼著掌中,而告之曰:『所愛眼者,此之謂也。
「이때 벽지불이 왼손을 펴고 오른손으로 눈을 후벼 내어 손바닥 가운데 놓고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눈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다.
주 挑眼은 「눈을 후벼 내다」(慧琳 0338c09 「挑抉」, 0384a19 「撥也, 剔除也」). 著掌中은 「손바닥 가운데 놓고」. 所愛眼者, 此之謂也는 관형절 「사랑하는 눈」과 주제 표지 「-라는 것은」, 판단종결 也는 평서 어미가 진다. 告之의 之는 앞의 여인. 以右手의 以는 「-로」, 而는 흡수. 사전 愛眼은 이 구절을 기계가 끊은 것이라 ⑥(華嚴經의 「佛慈愛之眼」)은 쓰지 않았다.
大妹!今日為著何處?
큰 누이여! 오늘은 어디에 집착하는가?
주 0724a22.1의 물음과 같은 꼴(今→今日)이다. 今日은 「오늘」, 為著何處는 「어디에 집착하는가」.
猶如癰瘡,無一可貪,然此眼中,亦漏不淨。
종기와 같아서 하나도 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눈 속에서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새어 나온다.
주 癰瘡은 「종기」(慧琳 0400a13·0580b22 「腫也」). 無一可貪은 「하나도 탐할 만한 것이 없다」. 漏는 [정형구 행] 59번의 漏(번뇌)와 달리 여기서는 눈에서 더러운 것이 흘러나온다는 동사 「새다」로 읽었다 — 같은 한자가 다른 뜻으로 쓰인 자리라 확정역을 쓰지 않고 신고한다. 然은 「그런데」(전환), 亦은 「-도」가 진다. 不淨은 「깨끗하지 않은 것」. 이문: 漏→漏淨亦漏(宋·元·明·聖).
大妹當知,眼如浮泡,亦不牢固,幻偽非真,誑惑世人;眼、耳、鼻、口、身、意皆不牢固,欺詐不真。
큰 누이여, 알라. 눈은 물 위에 뜬 거품 같아 견고하지도 않고, 허깨비 같고 거짓이어서 참이 아니며,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하게 한다. 눈·귀·코·입·몸·뜻이 모두 견고하지 않고 속이는 것이어서 참되지 않다.
주 浮泡는 「물 위에 뜬 거품」(慧琳 0409b03 「水上浮漚也」). 牢固는 「견고하다」(慧琳 0382a01 「牢堅也」). 幻偽非真의 幻은 「허깨비」, 誑惑은 「속여 미혹하게 하다」(慧琳 0326a20은 앞 권을 가리킬 뿐 풀이를 싣지 않는다). 當知는 「알라」. 亦不牢固의 亦은 「-도」. 여섯 감관 열거에서 혀 자리에 口가 선다(저본 글자대로 「입」) — 0724b21.1은 같은 열거에서 舌을 쓴다. 이문: 眼은 宋·元·明에 둘째 열거에 없다(〔眼〕-).
口是唾器,出不淨之物;純含白骨,身為苦器,為磨滅之法,恒盛臭處,諸虫所擾;亦如畫瓶,內盛不淨。
입은 침 뱉는 그릇이어서 깨끗하지 않은 것을 내놓는다. 온통 흰 뼈를 머금고 있으며, 몸은 괴로움의 그릇이 되고 닳아 없어지는 법이 되며, 늘 냄새나는 곳을 담고 있고 여러 벌레에게 시달린다. 또한 그림 그린 병과 같아 안에 깨끗하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
주 唾器는 「침 뱉는 그릇」. 純含白骨은 「온통 흰 뼈를 머금다」. 磨滅(사전 磨滅 ① 증일 13회·11경)은 「닳아 없어지다」. 恒盛臭處의 盛은 뒤의 內盛不淨과 같은 낱말로 「담다」로 통일했다(臭處를 「담는다」로 읽는 것이 어색하여 「냄새나는 곳」이 신체 내부인지 몸이 있는 곳인지는 단정하지 않는다). 臭處는 慧琳 0486c17 「惡氣息居止·穢惡之所」. 諸虫所擾는 為…所가 없는 所擾 꼴로 피동 「시달린다」(「하는 바」 회피), 諸는 「여러」(수가 실림). 畫瓶은 「그림 그린 병」, 亦如의 亦은 새 비유를 잇는 「또한」으로 세웠다. 為(身為苦器·為磨滅之法)는 계사. 이문: 磨→摩(宋·元). 사전 畫瓶 ⑥은 후대 주해라 참고만.
大妹!今日為著何處?
큰 누이여! 오늘은 어디에 집착하는가?
주 0724a26.1과 같은 물음 정형이다.
是故,大妹!當專其心,思惟此法幻偽不真。
그러므로 큰 누이여! 그 마음을 오롯이 하고, 이 법이 허깨비 같고 거짓이어서 참되지 않음을 깊이 생각하라.
주 專其心은 「그 마음을 오롯이 하다」(ea340의 專念과 같은 專). 當은 「-라」 어미가 진다. 幻偽不真의 不真은 앞(0724a28.1)의 非真과 한자가 다르나(非/不) 같은 뜻으로 읽혀 「참되지 않다」로 옮겼다. 是故는 「그러므로」.
如妹思惟眼、色無常,所有著欲之想自消滅。
누이가 눈과 색이 덧없다고 깊이 생각하면, 욕망에 집착하는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주 如妹思惟: 如를 「…하는 대로(비유)」로도 「…하면(가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뒤에 `所有…自消滅`이 결과로 이어지므로 「-면」으로 읽었으나 단정하지 않는다. 所有著欲之想은 「욕망에 집착하는 모든 생각」(所有 = 있는 모든). 自消滅의 自는 사라짐이 저절로 일어난다는 뜻인데 「사라진다」가 이미 그 뜻을 지므로 흡수했다(이문: 便自). 眼、色은 쉼표로 갈려 있어 「눈과 색」.
耳、鼻、口、身、意皆悉無常。
귀·코·입·몸·뜻이 모두 덧없다.
주 앞 좌표의 열거를 이어 나머지 다섯을 센다. 皆悉은 「모두」.
思惟此已,所有欲意自當消除;思惟六入,便無欲想。』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나면 있는 모든 욕망의 뜻이 없어질 것이다. 육입을 깊이 생각하면 곧 욕망의 생각이 없다.』
주 自當消除의 當은 미래 어미 「-ㄹ 것이다」가 지고, 自는 흡수한다. 六入은 정착어 「육입」(ea340과 통일). 便無欲想은 「곧 욕망의 생각이 없다」. 所有欲意는 「있는 모든 욕망의 뜻」.
「是時,長者女便懷恐懼,即前禮辟支佛足,白辟支佛言:『自今已去,改過修善,更不興欲想。
「이때 장자의 딸이 곧 두려움을 품고 곧 앞으로 나아가 벽지불의 발에 절하고 벽지불에게 아뢰어 말했다. 『지금부터는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으며 다시는 욕망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주 即前禮辟支佛足의 禮足은 「발에 절하다」. 白…言은 「아뢰어 말하다」. 自今已去의 自는 「-부터」, 已去는 「이후」. 更不興欲想의 更은 「다시는」, 興은 「일으키다」. 존댓말(청자가 벽지불). 便과 即을 둘 다 「곧」으로 옮겼다 — 한 문장에 두 번 나오므로 앞뒤 순서만 구별된다.
唯願受悔過,如是再三修行。』
바라건대 허물을 뉘우침을 받아 주십시오. 이와 같이 두세 번 닦아 행합니다.』
주 唯願은 「바라건대」로 唯(한정)를 흡수한다. 悔過는 「허물을 뉘우침」(사전 悔過 ① 증일 39회·18경: 「受汝悔過」·「受我悔過」). 如是再三修行은 「이와 같이 두세 번 닦아 행합니다」로 읽었으나, 再三이 뉘우침을 되풀이하는 말인지 수행을 되풀이하는 말인지, 그리고 이 구가 청원인지 다짐인지는 저본만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사전의 표제 「三修」는 `再三修行`을 기계가 끊은 것이라 ⑥(三修 名數)은 쓰지 않았다. 존댓말.
「辟支佛報曰:『止!止!大妹!此非汝咎,是我宿罪,受此形故,使人見起欲情意。
「벽지불이 대답했다. 『그치라! 그치라! 큰 누이여! 이것은 너의 허물이 아니라 나의 묵은 죄이다. 이 형체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서 욕정의 뜻을 일으키게 한다.
주 止止는 「그치라 그치라」. 宿罪는 「묵은 죄」(宿: 전부터). 受此形故는 「이 형체를 받았기 때문에」. 使人見起欲情意의 使는 「-게 하다」(앵커). 사전 표제 「人見」은 `使人見起`를 기계가 끊은 것이므로 ⑥(我見)은 쓰지 않았다. 欲情意는 「욕정의 뜻」.
當熟觀眼,此眼非我,我亦非彼有;亦非我造,亦非彼為,乃從無有中而生,已有便自壞敗;亦非往世、今世、後世,皆由合會因緣。
눈을 자세히 살펴보라. 이 눈은 내가 아니고, 나 또한 저것의 소유가 아니다. 내가 지은 것도 아니고 저것이 한 것도 아니며, 바로 없음 가운데서 생겨나서 이미 있으면 곧 무너져 부서진다. 또한 지난 세상의 것도 지금 세상의 것도 뒷세상의 것도 아니며, 모두 합하여 모이는 인연으로 말미암는다.
주 我亦非彼有: 彼有를 「저것의 소유」로 읽어 「나도 저것에 속하지 않는다」로 옮겼으나, 「저것이 나의 것이 아니다」로도 읽혀 주어·소유자가 저본만으로 닫히지 않는다. 이문: 둘째 我는 宋·元·明에 없다(〔我〕-). 亦非我造, 亦非彼為의 亦은 부정의 나열을 잇는 「-도」로 흡수. 乃從無有中而生의 乃는 「바로」, 無有는 「없음」. 已有便自壞敗: 自가 앞의 我造·彼為(남이 만듦)와 대조되는 「저절로」일 여지도 있으나 「무너져 부서진다」가 그 뜻을 지므로 흡수했다. 이문: 已→以(聖). 往世·今世·後世는 「지난 세상·지금 세상·뒷세상」. 由는 「말미암다」, 合會因緣은 「합하여 모이는 인연」(0724a16.1의 合會와 통일; 因緣은 사전 ① 증일 229회·85경). 熟觀은 「자세히 살피다」. 當은 「-라」 어미.
所謂合會因緣者,緣是有是,此起則起,此無則無,此滅則滅。
이른바 합하여 모이는 인연이라는 것은, 이것에 연하여 이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이것이 없으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사라진다.
주 緣是有是는 「이것에 연하여 이것이 있다」로 옮겼다(緣은 동사). 此起則起, 此無則無, 此滅則滅은 앞 「이것」과 뒤 「일어나는 것」의 주어가 저본에 비어 있어 글자대로 「이것이 일어나면 일어나고」로 두었다. 같은 꼴이 팔리의 연기 정형구(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와 닮았는지는 증언이 투입되지 않아 따지지 않는다. 所謂는 「이른바」, 則은 「-면」에 흡수, 者는 주제 표지 「-라는 것은」.
眼、耳、鼻、口、身、意亦復如是,皆悉空寂。
눈·귀·코·입·몸·뜻도 이와 같아서 모두 비어 고요하다.
주 亦復如是의 亦은 「도」가 진다(이 접기는 乃至·亦如是 같은 생략 표지 표에 실린 것이 아니다 — 같은 기능이므로 펴지 않고 두었다). 空寂(사전 空寂 ① 증일 6회·5경)은 「비어 고요하다」. 皆悉은 「모두」. 이문: 眼(宋·元·明 없음), 復(宋·元·明 없음).
是故,大妹!莫著眼色,以不著色,便至安隱之處,無復情欲。
그러므로 큰 누이여! 눈의 색에 집착하지 말라. 색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곧 편안한 곳에 이르러 다시는 정욕이 없다.
주 莫著는 「집착하지 말라」(앵커 莫). 安隱은 「편안」(安穩과 같은 말, 사전 安隱 ① 증일 46회·32경: 「安隱之處」). 無復情欲의 復는 「다시는」으로 뜻이 실려 세웠다. 情欲은 「정욕」. 以不著色의 以는 「-로써」.
如是,大妹!當作是學。』
이와 같이, 큰 누이여! 이렇게 배우라.』
주 當作是學은 「이렇게 배우라」(當 → 「-라」). 如是는 「이와 같이」.
「爾時,辟支佛與彼女人,說四非常之法已,昇在虛空,現十八變,還歸所止。
「그때 벽지불이 그 여인에게 네 가지 항상하지 않은 법을 설하고 나서, 허공에 올라 열여덟 가지 변화를 나타내고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다.
주 四非常之法의 非常은 이 경의 다른 자리(無常想·眼色無常)에서는 無常으로 쓰인다 —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다. 無常은 「덧없다」, 非常은 한자 차이를 살려 「항상하지 않다」로 옮겨 통일하지 않았다(사전 非常 ⑥ 「猶言無常」은 후대 풀이). 「네 가지」(四)가 무엇인지 이 경 저본은 말하지 않는다 — 앞의 눈·색 등의 덧없음(0724b05.1 이하)과의 관계는 단정하지 않는다. 與彼女人說의 與는 「~에게」. 昇在虛空은 「허공에 오르다」. 十八變은 「열여덟 가지 변화」(사전 十八變 ① 증일 9회·6경: 「作十八變, 神足變化」). 所止는 「머물던 곳」.
「爾時,彼女人觀眼、耳、鼻、舌、身、意了無所有,便在閑靜之處,思惟此法。
「그때 그 여인이 눈·귀·코·혀·몸·뜻에 전혀 있는 것이 없음을 살피고, 곧 한가롭고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이 법을 깊이 생각했다.
주 여섯 감관의 다섯째 자리에서 앞(0724a28.1·0724b01.1·0724b06.1·0724b17.1)은 口를, 여기는 舌을 쓴다 — 한역이 같은 대상에 다른 한자를 쓴다(이문: 舌→口, 宋·元·明). 了無所有의 了는 「전혀」, 無所有는 「있는 것이 없다」. 閑靜之處는 「한가롭고 고요한 곳」. 이문: 之는 宋·元·明에 없다.
彼女人復更思惟六情無主,得四等心,身壞命終,生梵天上。
그 여인은 다시 더 여섯 정에 주인이 없음을 깊이 생각하여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얻었고,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여 범천 위에 태어났다.
주 梵天은 [구속] 「범천」(3분할 표의 「의역」 분류보다 확정역이 위, §⓪-2). 六情은 「여섯 정」(ea340과 통일, 사전 六情 ① 증일 16회·9경). 六情無主는 「여섯 정에 주인이 없다」. 四等心: 사전 四等 ③ 용례(ea10 「行四等心, 慈、悲、喜、…」)는 慈·悲·喜·捨 넷을 가리키는 쓰임을 보여 주나 ⑥ 丁福保의 四無量心은 후대 해설이라 본문에 싣지 않고 「네 가지 평등한 마음」으로 옮긴다. 復更은 「다시 더」. 身壞命終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다」. 生梵天上의 上은 「위」(천상 층)로 읽었다.
「比丘當知,若思惟無常想,廣布無常想,盡斷欲、色、無色愛,憍慢、無明皆悉除盡。
「비구여, 알라. 덧없다는 생각을 깊이 생각하고 덧없다는 생각을 널리 펴면, 욕망·색·색 없음의 애착을 모두 끊고 교만과 무명을 모두 없앤다.
주 比丘는 [구속] 「비구」, 단수 호격이라 「비구여」. 若는 연결어미 「-면」이 진다. 盡斷은 「모두 끊다」, 皆悉除盡은 「모두 없애 다하다」. 欲、色、無色愛는 0724a08.1의 세 애착을 한 번에 이름한 압축형이다(저본이 접은 꼴이며 생략 표지 표의 표지는 아니다).
是故,比丘!當作是學。」
그러므로 비구여! 이렇게 배우라.」
주 當作是學은 「이렇게 배우라」. 是故는 「그러므로」.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그때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
주 佛은 [구속] 「부처님」(0.3과 같은 한자), 世尊(0724a08.1)과 한 경 안에서 갈린다 — 한역이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다. 所說은 관형절 「말씀하신 것」. 歡喜(慧琳 0753a01 「悅也」)는 「기뻐하다」, 奉行은 「받들어 행하다」. 諸는 「-들」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