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넷)
주 경 번호표다(大正 4). 교감주에 [No. 131]이 달려 있다. 이 경에는 팔리·산스크리트 증언이 투입물로 주어지지 않아 모든 좌표의 대응을 「아직 잡지 않음(미대응)」으로 둔다. 없음을 확인한 것이 아니다.
聞如是:
이렇게 들었다.
주 `如是我聞`에서 `我`가 없는 증일아함 개경형이다(정형구 표: 전권 453, 이 경 1). 앵커 `如`는 비유·가정이 아니라 지시어 `如是`로 읽었다. 증언 미제공.
一時,佛在羅閱城迦蘭陀竹園所,與大比丘眾五百人俱。
한때 부처님께서 라열성 가란타 대나무 동산 처소에서 큰 비구 대중 오백 사람과 함께 계셨다.
주 `羅閱城`은 3분할 표가 의역으로 분류했으나 慧琳 0356c04가 「羅閱祇(Rājagṛha류)…晉言王舍城」으로 소리 옮김과 뜻풀이(斷理)를 함께 적어, 저본에서 소리로 읽고 독음 「라열성」으로 적었다. 왕사성(정착형)으로 바꾸지 않았다. 전거표는 팔리형 Rājagaha를 싣고 범어 칸은 비어 있다. [불확실:고유명·표기_유형] `迦蘭陀`는 음역 → 독음 「가란타」(팔리형 Kalandaka, 근대 범어 비정 Kāraṁḍava/Karaṁḍa로 갈리는 확인된 두 계통 — 전거표 인용, 판정하지 않음). 慧琳 0601c04는 새 이름·竹林과 함께 풀이한다. `竹園`은 뜻으로 「대나무 동산」, 앞 `迦蘭陀`와 합쳐 「가란타 대나무 동산」. `所`는 앵커의 「~하는 바」가 아니라 처소를 뜻하는 접미로 보아 「처소」로 옮겼다. `大比丘眾五百人俱`는 사전 大比丘 ①·眾 ①(「眾五百」62회) 정형구. `佛`=부처님 [구속], `比丘`=비구 [구속]. 이문: 閱=越【明】(app 0668013).
爾時,四梵志皆得五通,修行善法,普集一處,作是論議:「此伺命來時不避豪強,各共隱藏,使伺命不知來處。」
그때 네 청정을 지향하는 이가 모두 다섯 신통을 얻고 착한 법을 닦아 행하며 두루 한곳에 모여 이러한 논의를 하였다. 「이 목숨을 엿보는 이는 올 때 권세 있고 강한 이도 피하지 않으니, 저마다 함께 숨어서 목숨을 엿보는 이가 찾아올 곳을 알지 못하게 하자.」
주 이 조각은 직역단독이라 팔리·산스크리트 증언이 투입되지 않았다. 대응 줄은 「아직 안 잡음(미대응)」이다. 梵志는 3분할표가 의역(팔리 Brāhmaṇa 대역, 다른 부 MA의 대역 표시)으로 분류해 뜻으로 옮겼다. 사전 梵志 ⑥(丁福保)이 「志求於梵」, 곧 범(梵)을 지향하는 이로 풀기에 「청정을 지향하는 이」로 적었고, 梵을 寂靜으로 푼 것은 사전 ⑥이 인용한 瑜伽倫記의 풀이다(梵을 범천으로 읽을 여지도 남는다). 사성(四姓)의 바라문을 가리키는 자리가 아니므로 확정역 바라문은 적용하지 않았다. 이 경 안에서 이 표기로 통일한다. 伺命은 伺(엿보다)+命(목숨)으로 풀었다. 사전 伺 ⑥은 心所 vicāra를 들지만 이 자리와 맞지 않는다. 司命(목숨을 맡은 이)과의 관계는 투입물로 정해지지 않는다. 四梵志·五通·皆得의 得은 획득이다. 善法은 3분할표가 Sudhammā(혼합)로 분류했으나 이 자리는 교리어 「착한 법」이다(표의 기계 분류보다 저본이 이긴다). 五通은 神足 판별 원칙에 따라 「신통」으로 옮겼다. 使는 사역(…하게 하다)으로 옮겼다. 직접 인용 안의 문말은 동배 사이의 청유로 읽어 「-하자」로 했다(한문에 청유 표지는 없다). 저본 이문: 是(大)/此(宋元明聖), 議(大)/義(聖) — 저본(大正)의 是·議를 따랐다. 世尊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발화다.
爾時,一梵志飛在空中,欲得免死,然不免其死,即在空中而命終。
그때 한 청정을 지향하는 이는 날아서 공중에 있으며 죽음을 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곧 공중에서 목숨이 다하였다.
주 梵志 표기는 0668b15.1과 같다. 欲得免死의 得은 가능을 나타내나 「-고자」 어미가 그 기능을 지므로 따로 옮기지 않았다. 然은 앞뒤를 거스르는 접속이 한문에 실려 있어 「그러나」로 남겼다. 即은 즉시·동일의 곧이다. 而는 흡수했다.
第二梵志復入大海水底,欲得免死,即於彼命終。
두 번째 청정을 지향하는 이는 다시 큰 바다의 물 밑으로 들어가 죽음을 면하고자 하였는데, 곧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였다.
주 梵志 표기는 0668b15.1과 같다. 復은 앵커대로 「다시」로 옮겼다. 앞의 사람과 이어지는 「또」의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나 한문에는 반복 표지만 있다. 第二는 서수 「두 번째」로 옮겼다. 即於彼命終의 於는 조사 「에서」가 진다.
彼第三梵志欲得免死,入須彌山腹中,復於中死。
저 세 번째 청정을 지향하는 이는 죽음을 면하고자 하여 수미산의 배 속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그 안에서 죽었다.
주 梵志 표기는 0668b15.1과 같다. 須彌山은 3분할표(須彌)가 음역/의역이 갈린다고 분류했고 전거표는 팔리 Sinerupabbatarāja(MA 대역)를 든다. 수미산은 한국 불교계 정착형이라 그대로 쓴다(정착어). 須彌는 산의 이름을 소리로 옮긴 것으로 읽으며(판별 근거: 한자 須彌 자체에 뜻으로 풀 만한 문맥이 없다), 이름의 뜻은 세계의 중심에 선 산이다. 이 뜻풀이는 투입물의 근거가 아니고 일반 지식이다. 復於中死의 於는 조사가 지고 復은 「다시」다. 腹中은 산의 배 속, 곧 산 안쪽이다.
彼第四梵志入地至金剛際,欲得免死,復即彼而命終。
저 네 번째 청정을 지향하는 이는 땅으로 들어가 금강의 끝에 이르러 죽음을 면하고자 하였는데, 다시 곧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였다.
주 梵志 표기는 0668b15.1과 같다. 際는 宋元明聖본이 剎로 적는다(교감주 際=剎). 저본(大正)의 際를 따라 「끝」으로 옮겼다. 剎이면 땅 밑 어느 한 곳의 이름이 되나 이 투입물로는 가를 수 없다. 金剛은 정착어 「금강」이며 단단함을 뜻하는 말이다(사전 金剛 ⑥, 음의 金剛: 最堅). 金剛際는 땅 밑 가장 깊은 곳의 경계로 읽히나, 이 경 안에서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은 없다. 復卽彼而命終에서 卽은 「곧」, 而는 흡수, 彼는 앞의 땅 밑을 가리키는 「그곳」이다.
爾時,世尊以天眼觀見四梵志,各各避死,普共命終。
그때 세존께서는 하늘눈으로 네 청정을 지향하는 이가 저마다 죽음을 피하다가 두루 함께 목숨이 다하는 것을 살펴보셨다.
주 世尊=세존, [구속] 확정역. 梵志 표기는 0668b15.1과 같다. 天眼은 「하늘눈」으로 옮겼다(사전 天眼 ⑥은 五眼의 하나). 觀見은 觀(살피다)+見(보다)의 연결 동사로 「살펴보셨다」로 옮겼다. 以는 조사 「-으로」가 진다. 普는 「두루」로 옮겼다(0668b15.1의 普集과 같다). 各各은 「저마다」다. 세존에 대한 높임은 내레이션의 -시-로 두었다.
爾時,世尊便說此偈:
그때 세존께서는 곧 이 게송을 설하셨다.
주 世尊=세존, [구속] 확정역. 便은 「곧」, 偈는 정착어 「게송」이다. 다음 두 좌표가 그 게송의 행이다.
「非空非海中,非入山石間,
「공중도 아니고 바다 가운데도 아니며, 산의 바위 사이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주 게송 행을 유지했다. 非空非海中은 「空」을 하늘이 아니라 공중으로 읽었다(앞 0668b18.1의 在空中과 같은 자리). 非入山石間의 山石은 「산의 바위」로 읽었으나 「산과 바위」의 병렬로 읽을 여지도 있다. 〔불확실〕은 달지 않았고 이 읽기 차이로 뜻이 바뀌지는 않는다.
無有地方所,脫止不受死。」
땅의 어느 방향 어느 곳에도, 벗어나 머물러 죽음을 받지 않을 곳은 없다.」
주 게송 행을 유지했다. 止는 宋元明본이 之로 적는다(교감주 止=之). 저본(大正)의 止를 따라 「머물러」로 옮겼다. 之이면 「벗어나 가서」로 읽혀 뜻이 갈린다. 無有地方所에서 有는 존재를 서술하나 「곳은 없다」로 주어화해 「~이 있어」를 피했다. 方所는 사전상 방향과 장소(丁福保: 方角與所處)이며, 地方所를 地+方所로 끊었다. 地方+所(지방)로 끊는 읽기도 한문만으로는 배제되지 않는다. 所는 「곳」으로 풀어 「~하는 바」를 피했다. 脫止不受死가 곳을 꾸미는 관형절인지 별개의 서술인지도 한문만으로 정해지지 않아 앞의 읽기를 택했다. 受死는 「죽음을 받다」로 옮겼다.
爾時,世尊告諸比丘:「於是,比丘!有梵志四人集在一處,欲得免死,各歸所奔,故不免死。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에, 비구들이여! 청정을 지향하는 이 네 사람이 한곳에 모여 죽음을 면하고자 하여, 저마다 달려간 곳으로 돌아갔으나 그러므로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주 世尊=세존, 比丘=비구, [구속] 확정역. 諸는 「비구들」의 복수 -들로 흡수했다. 於是는 처소 조사가 아니라 호격 앞의 「이에」로 옮겼다. 有梵志四人의 有는 존재 서술이나 「이 네 사람이」로 주어화했다. 集在一處는 「한곳에 모여」, 欲得免死는 「면하고자 하여」다. 各歸所奔의 所는 「달려간 곳」으로 관형절로 풀었다. 歸는 「돌아가다」로 옮겼으며 달려간 곳에 의지한다는 뜻으로 읽을 가능성은 한문만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故는 앞 구절의 결과를 잇는 「그러므로」다. 붓다의 발화이므로 평서다.
一人在空,一人入海水,一人入山腹中,一人入地,皆共同死。
한 사람은 공중에 있고, 한 사람은 바닷물에 들어가고, 한 사람은 산의 배 속으로 들어가고, 한 사람은 땅으로 들어갔으나 모두 함께 같이 죽었다.
주 皆共同死는 皆(모두)·共(함께)·同(같이)를 모두 남겼다. 한 사람씩 앞 네 좌표(0668b18.1·b19.1·b21.1·b22.1)를 요약해 되풀이하는 붓다의 발화다.
是故,諸比丘!欲得免死者,當思惟四法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죽음을 면하고자 하는 이는 네 가지 법의 근본을 생각하라.
주 比丘=비구, [구속] 확정역. 是故는 「그러므로」, 者는 「이」로 명사화했다. 當은 어미 「-라」가 지므로 따로 옮기지 않았다. 思惟는 3분할표가 의역으로 분류했고 팔리 Bhāvana(MA 대역)를 든다. 이 경에서는 「생각하다」로 옮겼다(사전 思惟 ⑥은 思量對境而分別). 이 경 안의 다섯 곳을 같은 말로 통일한다. 法本은 「법의 근본」으로 풀었다(사전 法本 ⑥은 法性의 이명이라 했으나 이 자리는 아래 네 항목을 가리키는 「네 가지 법의 근본」이다). 四法本은 四法+本의 끊음을 택했다.
云何為四?
무엇이 넷인가?
주 云何為四는 의문사구로 어미 의문형이 지므로 「무엇이 넷인가」로 옮겼다. 為는 「이다」로 흡수했다(為…所 피동이 아니다).
一切行無常,是謂初法本,當念修行。
모든 행은 무상하다. 이를 일러 첫째 법의 근본이라 한다. 생각하고 닦아 행하라.
주 一切行無常: 無常은 정착어 「무상」이며 뜻은 항상하지 않음이다(사전 無常 ⑥은 生滅遷流). 行은 지어진 것을 뜻하는 말로(사전 行 ⑥은 造作) 「행」으로 두었다. 확정역은 투입물에 없다. 一切는 「모든」이다. 是謂는 「이를 일러 ~라 한다」다. 當念修行에서 當은 어미 「-라」가 진다. 念은 「생각하고」로 옮겼다(마음에 두어 새긴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修行은 「닦아 행하라」다(음의 修行: 行造修).
一切行苦,是謂第二法本,當共思惟。
모든 행은 괴로움이다. 이를 일러 둘째 법의 근본이라 한다. 함께 생각하라.
주 苦는 「괴로움」, 行은 0668c03.2와 같다. 行苦는 사전상 독립 표제(증일아함 2회)이나 이 자리는 「行은 苦」의 주술 구조로 읽었다. 當共思惟는 當이 어미로 지고 共은 「함께」다.
一切法無我,此第三法本,當共思惟。
모든 법은 무아다. 이것은 셋째 법의 근본이다. 함께 생각하라.
주 無我는 정착어 「무아」이며 뜻은 자기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이다(사전 無我 ⑥). 확정역은 투입물에 없다. 一切法의 法은 「법」이다. 앞 두 좌표와 달리 이 항목은 是謂 없이 此로 시작한다. 한문이 이렇게 쓴 대로 「이것은」으로 옮겼다.
滅盡為涅槃,是謂第四法本,當共思惟。
사라져 다함이 열반이다. 이를 일러 넷째 법의 근본이라 한다. 함께 생각하라.
주 涅槃은 한국 불교계 정착어 「열반」이다. 3분할표는 音義合璧(혼합)으로, 전거표는 팔리 Nibbāna·산스크리트 nirvāṇa로 분류한다. 음의(慧琳)는 「圓寂」으로 풀이한다. 정착형을 그대로 쓰고 이름의 뜻은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다(음의 涅槃은 圓寂을 든다). 滅盡은 「사라져 다함」으로 옮겼다. 為는 「~이다」로 흡수했고 為…所 피동이 아니다. 當共思惟는 0668c04.1과 같다.
如是,諸比丘!當共思惟此四法本。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법의 근본을 함께 생각하라.
주 比丘=비구, [구속] 확정역. 如是는 「이와 같이」, 諸는 「비구들」의 복수로 흡수했다. 當은 어미 「-라」가 진다.
所以然者,便脫生、老、病、死、愁、憂、苦、惱,此是苦之元本。
그러한 까닭은, 곧 태어남·늙음·병듦·죽음·시름·근심·괴로움·번민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이 괴로움의 원래 근본이다.
주 所以然者는 「그러한 까닭은」이다(所는 관형절로 풀어 「~하는 바」를 피했다). 便脫은 「곧 벗어나는 것이니」이다. 生은 태어남이다(정형구 행 生=jāti, 이 자리는 낱말 나열이라 판단했다). 愁와 憂는 각각 시름과 근심으로 갈랐고 惱는 번민이다. 此是苦之元本의 此가 가리키는 것은 「벗어남」인지 「네 가지 법의 근본」인지 한문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문자대로 「괴로움의 원래 근본」이라 옮겼고 「괴로움이 끝나는 근본」으로 읽는 해석은 본문에 들이지 않았다.
是故,諸比丘!當求方便,成此四法。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방편을 구하여 이 네 가지 법을 이루라.
주 比丘=비구, [구속] 확정역. 方便은 정착어 「방편」으로 두었다. 사전 方便 ①은 증일아함에서 當求 94회와 붙는 정형이고 ⑥丁福保는 Upāya(수단·방법)를 든다. 이 자리에서는 「힘써 찾는 방법」인지 「애씀」인지 한문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求는 「구하여」, 成은 「이루라」, 四法은 「네 가지 법」이다. 當은 어미 「-라」가 진다.
如是,諸比丘!當作是學。」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렇게 배우라.」
주 比丘=비구, [구속] 확정역. 作是學은 「이렇게 배우라」로 옮겼다(作은 흡수). 當은 어미 「-라」가 진다. 인용이 여기서 닫힌다.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그때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주 佛=부처님, 比丘=비구, [구속] 확정역. 이 경은 앞 좌표(0668b23.1·b24.1·b28.1)에서 世尊(세존)을 쓰고 여기서는 佛(부처님)을 쓴다. 한역이 같은 개념에 다른 한자를 쓴다. 두 말 모두 확정역이 있어 각각의 확정 문자열을 썼다. 所說은 「설하신 것」으로 풀어 「~하는 바」를 피했다. 歡喜는 「기뻐하며」, 奉行은 「받들어 행하였다」다(정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