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Mahānidānasuttaṃ
2. 마하니다나 경
95
연기Paṭiccasamuppādo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족의 땅에 머물고 계셨다. 꾸루족의 성읍 깜마사담마였다.[불확실]
Evaṃ me sutaṃ –
나는 이렇게 들었다[불확실]
불확실 —
ekaṃ samayaṃ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ṃ nāma kurūnaṃ nigamo.
한때 세존께서 꾸루 지방에 머무셨는데, 깜마사담마라는 꾸루 사람들의 성읍이었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가 절을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신기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연기는 참으로 깊고 깊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아주 얕고 쉬운 것처럼 보입니다.”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나아가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
한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acchariyaṃ, bhante, abbhutaṃ, bhante!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랍고 신기합니다.
Yāva gambhīro cāyaṃ, bhante,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atha ca pana me uttānakuttānako viya khāyatī’’ti.
세존이시여, 이 연기는 참으로 깊고 그 드러남도 깊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아주 분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연기는 깊고 깊어 보인다.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했기 때문에, 이 중생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되고 뒤얽힌 새 둥지처럼 되고 문자풀과 갈대 더미처럼 되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곳, 나쁜 세상, 파멸의 땅인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Mā hevaṃ, ānanda, avaca, mā hevaṃ, ānanda, avaca.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Gambhīro cāyaṃ, ānanda, paṭiccasamuppādo gambhīrāvabhāso ca.
아난다여, 이 연기는 깊고 그 드러남도 깊다.
Etassa, ānanda, dhammassa ananubodhā appaṭivedhā evamayaṃ pajā tantākulakajātā kulagaṇṭhikajātā muñjapabbajabhūt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saṃsāraṃ nātivattati.
아난다여,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에 이 사람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되고, 뒤엉킨 새둥지처럼 되고, 문자풀과 갈대처럼 얽혀, 괴로운 곳·나쁜 곳·파멸처와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96
아난다여, 누가 ‘늙음과 죽음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늙음과 죽음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태어남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누가 ‘태어남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태어남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존재를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누가 ‘존재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존재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집착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불확실]
‘‘‘Atthi idap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늙음과 죽음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Kiṃ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ce vadeyya,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jātī’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태어남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jātī’ti iti ce vadeyya, ‘bhavapaccayā jātī’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bhavo’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존재는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bhavo’ti iti ce vadeyya, ‘upādānapaccayā bhavo’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누가 ‘집착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집착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갈애를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누가 ‘갈애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갈애는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느낌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누가 ‘느낌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느낌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접촉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Atthi idappaccayā upādān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취착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upādāna’nti iti ce vadeyya,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취착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taṇhā’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갈애는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taṇhā’ti iti ce vadeyya, ‘vedanāpaccayā taṇhā’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vedanā’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느낌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vedanā’ti iti ce vadeyya, ‘phassapaccayā vedanā’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아난다여, 누가 ‘접촉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접촉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누가 ‘정신과 물질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정신과 물질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의식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누가 ‘의식에는 그 조건이 있는가?’ 하고 묻거든 ‘있다’고 답하라. ‘의식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하고 묻거든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한다’고 답하라.
‘‘‘Atthi idappaccayā phasso’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접촉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phasso’ti iti ce vadeyya,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nāmarūp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정신·물질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nāmarūpa’nti iti ce vadeyya,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Atthi idappaccayā viññāṇa’nti iti puṭṭhena satā, ānanda, atthītissa vacanīyaṃ.
“아난다여, ‘의식은 이것을 조건으로 있는가?’라고 물음을 받으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Kiṃpaccayā viññāṇa’nti iti ce vadeyya,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ccassa vacanīyaṃ.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97
아난다여,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이 있다.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과 탄식, 괴로움과 근심과 절망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이 온전한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난다.[불확실]
‘‘Iti kho, ānanda,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비탄·괴로움·근심·고뇌가 생겨난다.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이렇게 하여 이 괴로움 무더기 전체의 일어남이 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98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어떻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태어남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신들이 신으로 태어나지 않고, 간답바들이 간답바로, 야차들이 야차로, 귀신들이 귀신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자. 사람들이 사람으로, 네발짐승이 네발짐승으로, 새들이 새로, 기어 다니는 것들이 기어 다니는 것으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자. 곧 모든 중생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일이 없다고 하자. 이렇게 태어남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늙음과 죽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늙음과 죽음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태어남이다.”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Jāti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태어남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devānaṃ vā devattāya, gandhabbānaṃ vā gandhabbattāya, yakkhānaṃ vā yakkhattāya, bhūtānaṃ vā bhūtattāya, manussānaṃ vā manussattāya, catuppadānaṃ vā catuppadattāya, pakkhīnaṃ vā pakkhittāya, sarīsapānaṃ vā sarīsapattāya, tesaṃ tesañca hi, ānanda, sattānaṃ tadattāya jāti nābhavissa.
신들에게 신의 상태로, 간답바들에게 간답바의 상태로, 약카들에게 약카의 상태로, 부따들에게 부따의 상태로, 사람들에게 사람의 상태로, 네발짐승들에게 네발짐승의 상태로, 새들에게 새의 상태로, 뱀들에게 뱀의 상태로 — 아난다여, 그 각각의 중생들에게 그 상태로 태어남이 없다면,
Sabbaso jātiyā asati jātinirodhā api nu kho jarāmaraṇaṃ paññāyethā’’ti?
태어남이 전혀 없고 태어남이 소멸했는데도 늙음과 죽음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jarāmaraṇassa, yadidaṃ jāti’’.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태어남이다.”
99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존재를 조건으로 어떻게 태어남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존재가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욕계의 존재도, 색계의 존재도, 무색계의 존재도 없다고 하자. 이렇게 존재가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태어남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태어남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존재이다.”
‘‘‘Bhavapaccayā jātī’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bhavapaccayā jāti.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Bhav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존재가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kāmabhavo vā rūpabhavo vā arūpabhavo vā, sabbaso bhave asati bhavanirodhā api nu kho jāti paññāyethā’’ti?
감각적 욕망의 존재나 물질의 존재나 비물질의 존재가 — 존재가 전혀 없고 존재가 소멸했는데도 태어남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jātiyā, yadidaṃ bhav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태어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존재다.”
100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집착을 조건으로 어떻게 존재가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집착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도, 견해에 대한 집착도 없다고 하자.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도, 자아를 주장하는 집착도 없다고 하자. 이렇게 집착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존재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존재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집착이다.”
‘‘‘Upādānapaccayā bhav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upādānapaccayā bhavo.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Upādān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취착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kāmupādānaṃ vā diṭṭhupādānaṃ vā sīlabbatupādānaṃ vā attavādupādānaṃ vā, sabbaso upādāne asati upādānanirodhā api nu kho bhavo paññāyethā’’ti?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이나 견해에 대한 취착이나 계율과 의례에 대한 취착이나 자아 이론에 대한 취착이 — 취착이 전혀 없고 취착이 소멸했는데도 존재가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bhavassa, yadidaṃ upādānaṃ’’.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존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취착이다.”
101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갈애를 조건으로 어떻게 집착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갈애가 전혀 없다고 해 보자. 형색과 소리와 냄새에 대한 갈애가 없고, 맛과 감촉과 마음의 대상에 대한 갈애도 없다고 하자. 이렇게 갈애가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집착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집착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갈애이다.”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갈애가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rūpataṇhā saddataṇhā gandhataṇhā rasataṇhā phoṭṭhabbataṇhā dhamm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upādānaṃ paññāyethā’’ti?
형색에 대한 갈애, 소리에 대한 갈애, 냄새에 대한 갈애, 맛에 대한 갈애, 감촉에 대한 갈애, 법에 대한 갈애가 — 갈애가 전혀 없고 갈애가 소멸했는데도 취착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upādānassa, yadidaṃ taṇhā’’.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취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갈애다.”
102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느낌을 조건으로 어떻게 갈애가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느낌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눈과 귀와 코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 없고, 혀와 몸과 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도 없다고 하자. 이렇게 느낌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갈애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갈애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느낌이다.”
‘‘‘Vedanāpaccayā taṇh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edanāpaccayā taṇhā.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Vedan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느낌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cakkhusamphassajā vedanā sotasamphassajā vedanā ghānasamphassajā vedanā jivhāsamphassajā vedanā kāyasamphassajā vedanā manosamphassajā vedanā,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ṇhā paññāyethā’’ti?
눈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귀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코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혀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몸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 마음의 접촉에서 생긴 느낌이 — 느낌이 전혀 없고 느낌이 소멸했는데도 갈애가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taṇhāya, yadidaṃ vedanā’’.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갈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느낌이다.”
103
아난다여, 이렇게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고,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얻음을 조건으로 판단이 있다. 판단을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이,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몰두가 있다. 몰두를 조건으로 소유가,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이, 인색을 조건으로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드는 일이 벌어진다. 다툼과 싸움과 언쟁이 일어나고, ‘네가 그랬다, 네가 그랬다’ 하는 말다툼이 오간다. 이간질과 거짓말까지 생겨난다. 이렇게 해롭고 좋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생겨난다.[불확실]
‘‘Iti kho panetaṃ, ānanda, vedanaṃ paṭicca taṇhā,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 vinicchayaṃ paṭicca chandarāgo,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ṃ, 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 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ṃ,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
“아난다여, 이와 같이 느낌을 의지하여 갈애가 있고, 갈애를 의지하여 추구가 있고, 추구를 의지하여 얻음이 있고, 얻음을 의지하여 따져 가림이 있고, 따져 가림을 의지하여 욕망과 탐욕이 있고, 욕망과 탐욕을 의지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의지하여 거머쥠이 있고, 거머쥠을 의지하여 인색이 있고, 인색을 의지하여 지킴이 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Ārakkhādhikaraṇ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지킴을 이유로 몽둥이를 잡음, 칼을 잡음, 다툼, 언쟁, 분쟁, 너나 나나 하는 말다툼, 이간질, 거짓말 등 여러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104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드는 일, 다툼과 싸움과 언쟁, 말다툼, 이간질과 거짓말 같은 해롭고 좋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어떻게 그런 것들이 생겨나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지키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지키려는 마음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드는 일, 다툼과 싸움과 언쟁, 말다툼, 이간질과 거짓말 같은 해롭고 좋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생겨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 해롭고 좋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생겨나는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지키려는 마음이다.”
‘‘‘Ārakkhādhikaraṇ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ī’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ārakkhādhikaraṇ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지킴을 이유로 몽둥이를 잡음, 칼을 잡음, 다툼, 언쟁, 분쟁, 너나 나나 하는 말다툼, 이간질, 거짓말 등 여러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난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지킴을 이유로 몽둥이를 잡음, 칼을 잡음, 다툼, 언쟁, 분쟁, 너나 나나 하는 말다툼, 이간질, 거짓말 등 여러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Ārakkh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ārakkhe asati ārakkhanirodhā api nu kho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eyyu’’nti?
아난다여, 만일 지킴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지킴이 전혀 없고 지킴이 소멸했는데도 몽둥이를 잡음, 칼을 잡음, 다툼, 언쟁, 분쟁, 너나 나나 하는 말다툼, 이간질, 거짓말 등 여러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naṃ anekes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sambhavāya yadidaṃ ārakkh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몽둥이를 잡음, 칼을 잡음, 다툼, 언쟁, 분쟁, 너나 나나 하는 말다툼, 이간질, 거짓말 등 여러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지킴이다.
105
‘인색을 조건으로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인색을 조건으로 어떻게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인색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인색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지키려는 마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지키려는 마음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인색이다.”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
“‘인색을 의지하여 지킴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인색을 의지하여 지킴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Macchariy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macchariye asati macchariyanirodhā api nu kho ārakkh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인색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인색이 전혀 없고 인색이 소멸했는데도 지킴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ārakkhassa, yadidaṃ macchariyaṃ’’.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지킴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인색이다.”
106
‘소유를 조건으로 인색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소유를 조건으로 어떻게 인색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소유가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소유가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인색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인색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소유이다.”
‘‘‘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ṃ.
“‘거머쥠을 의지하여 인색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거머쥠을 의지하여 인색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Pariggah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pariggahe asati pariggahanirodhā api nu kho macchariyaṃ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거머쥠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거머쥠이 전혀 없고 거머쥠이 소멸했는데도 인색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macchariyassa, yadidaṃ pariggah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인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거머쥠이다.”
107
‘몰두를 조건으로 소유가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몰두를 조건으로 어떻게 소유가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몰두가 전혀 없다고 해 보자. 몰두가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소유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소유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몰두이다.”
‘‘‘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
“‘집착을 의지하여 거머쥠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집착을 의지하여 거머쥠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Ajjhosān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ajjhosāne asati ajjhosānanirodhā api nu kho pariggah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집착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집착이 전혀 없고 집착이 소멸했는데도 거머쥠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ggahassa –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거머쥠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
yadidaṃ ajjhosānaṃ’’.
곧 집착이다.”
108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몰두가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욕망과 탐욕을 조건으로 어떻게 몰두가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욕망과 탐욕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욕망과 탐욕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몰두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몰두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욕망과 탐욕이다.”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ṃ.
“‘욕망과 탐욕을 의지하여 집착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욕망과 탐욕을 의지하여 집착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Chandarāg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chandarāge asati chandarāganirodhā api nu kho ajjhosānaṃ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욕망과 탐욕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욕망과 탐욕이 전혀 없고 욕망과 탐욕이 소멸했는데도 집착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ajjhosānassa, yadidaṃ chandarāg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집착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욕망과 탐욕이다.”
109
‘판단을 조건으로 욕망과 탐욕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판단을 조건으로 어떻게 욕망과 탐욕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판단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판단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욕망과 탐욕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욕망과 탐욕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판단이다.”
‘‘‘Vinicchayaṃ paṭicca chandarāg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nicchayaṃ paṭicca chandarāgo.
“‘따져 가림을 의지하여 욕망과 탐욕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따져 가림을 의지하여 욕망과 탐욕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Vinicchay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vinicchaye asati vinicchayanirodhā api nu kho chandarāg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따져 가림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따져 가림이 전혀 없고 따져 가림이 소멸했는데도 욕망과 탐욕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chandarāgassa, yadidaṃ vinicchay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욕망과 탐욕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따져 가림이다.”
110
‘얻음을 조건으로 판단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얻음을 조건으로 어떻게 판단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얻음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얻음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판단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판단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얻음이다.”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
“‘얻음을 의지하여 따져 가림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얻음을 의지하여 따져 가림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Lābh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lābhe asati lābhanirodhā api nu kho vinicchay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얻음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얻음이 전혀 없고 얻음이 소멸했는데도 따져 가림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nicchayassa, yadidaṃ lābh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따져 가림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얻음이다.”
111
‘추구를 조건으로 얻음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추구를 조건으로 어떻게 얻음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추구가 전혀 없다고 해 보자. 추구가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얻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얻음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추구이다.”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
“‘추구를 의지하여 얻음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추구를 의지하여 얻음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Pariyesan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abbaso pariyesanāya asati pariyesanānirodhā api nu kho lābh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추구가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추구가 전혀 없고 추구가 소멸했는데도 얻음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lābhassa, yadidaṃ pariyesanā’’.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얻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추구다.”
112
‘갈애를 조건으로 추구가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갈애를 조건으로 어떻게 추구가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갈애가 전혀 없다고 해 보자.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도, 존재에 대한 갈애도, 존재의 소멸에 대한 갈애도 없다고 하자. 이렇게 갈애가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추구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추구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갈애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이 두 가지는 둘로 갈라지지만 느낌에서 하나로 모인다.”[불확실]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
“‘갈애를 의지하여 추구가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갈애를 의지하여 추구가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갈애가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pariyesanā paññāyethā’’ti?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 갈애가 전혀 없고 갈애가 소멸했는데도 추구가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yesanāya, yadidaṃ taṇhā.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추구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갈애다.
Iti kho, ānanda, ime dve dhammā dvayena vedanāya ekasamosaraṇā bhavan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이 두 가지 법은 둘로 나뉘어 있다가 느낌에서 하나로 만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113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접촉을 조건으로 어떻게 느낌이 있는지 보자. 어떤 존재에게든 어느 곳에서든 접촉이 전혀 없다고 해 보자. 눈과 귀와 코의 접촉이 없고, 혀와 몸과 마음의 접촉도 없다고 하자. 이렇게 접촉이 완전히 없어서 소멸했다면, 그래도 느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느낌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접촉이다.”
‘‘‘Phassapaccayā veda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phassapaccayā vedanā.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Phass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아난다여, 만일 접촉이 온통 모조리,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없다면, 곧 —
cakkhusamphasso sotasamphasso ghānasamphasso jivhāsamphasso kāyasamphasso manosamphasso, sabbaso phasse asati phassanirodhā api nu kho vedanā paññāyethā’’ti?
눈의 접촉, 귀의 접촉, 코의 접촉, 혀의 접촉, 몸의 접촉, 마음의 접촉이 — 접촉이 전혀 없고 접촉이 소멸했는데도 느낌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edanāya, yadidaṃ phasso’’.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느낌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접촉이다.”
114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어떻게 접촉이 있는지 보자. 아난다여, 정신의 무리를 나타내는 모습과 특징과 표지와 가리킴이 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그래도 물질의 무리에 ‘이름의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물질의 무리를 나타내는 모습과 특징과 표지와 가리킴이 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그래도 정신의 무리에 ‘부딪힘의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정신의 무리와 물질의 무리를 함께 나타내는 모습과 특징과 표지와 가리킴이 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그래도 이름의 접촉이나 부딪힘의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정신과 물질을 나타내는 모습과 특징과 표지와 가리킴이 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그래도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접촉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정신과 물질이다.”[불확실]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접촉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어떤 특징들로, 어떤 표시들로, 어떤 표상들로, 어떤 지목들로 정신의 무리를 일컫게 되는데, 그 특징들과 그 표시들과 그 표상들과 그 지목들이 없다면, 물질의 무리에서 이름 붙임의 접촉이 드러나겠느냐?”[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rūp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nāmakāye paṭighasamphass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어떤 특징들로, 어떤 표시들로, 어떤 표상들로, 어떤 지목들로 물질의 무리를 일컫게 되는데, 그 특징들과 그 표시들과 그 표상들과 그 지목들이 없다면, 정신의 무리에서 부딪침의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15:114.2에서 되살렸습니다.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pe… yehi uddesehi nāmakāyassa ca rūpakāyassa c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adhivacanasamphasso vā paṭighasamphasso vā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어떤 특징들로, 어떤 표시들로, 어떤 표상들로, 어떤 지목들로 정신의 무리와 물질의 무리를 일컫게 되는데, 그 특징들과 그 표시들과 그 표상들과 그 지목들이 없다면, 이름 붙임의 접촉이나 부딪침의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15:114.2에서 되살렸습니다.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Yehi, ānanda, ākārehi…pe… yehi uddesehi nāmarūp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pe…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phass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어떤 특징들로, 어떤 표시들로, 어떤 표상들로, 어떤 지목들로 정신·물질을 일컫게 되는데, 그 특징들과 그 표시들과 그 표상들과 그 지목들이 없다면, 접촉이 드러나겠느냐?”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15:114.2에서 되살렸습니다.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hassassa, yadidaṃ nāmarūpaṃ’’.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접촉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정신·물질이다.”
115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의식을 조건으로 어떻게 정신과 물질이 있는지 보자.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정신과 물질이 어머니의 태에서 모양을 갖추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들어왔다가 도로 나가 버린다면, 그래도 정신과 물질이 이 몸으로 태어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어린 사내아이나 계집아이일 때 끊어져 버린다면, 그래도 정신과 물질이 자라나고 무르익고 커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정신과 물질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의식이다.”[불확실]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mātukucchismiṃ samuccissathā’’ti?
아난다여, 만일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들어서지 않는다면, 정신·물질이 어머니의 태에서 뭉쳐지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아난다여, 만일 의식이 어머니의 태에 들어섰다가 벗어나 버린다면, 정신·물질이 이 세상으로 태어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ṃ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issathā’’ti?
“아난다여, 만일 어린 사내아이나 여자아이일 때 의식이 끊어져 버린다면, 정신·물질이 자라고 늘고 커지겠느냐?”[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 –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정신·물질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
yadidaṃ viññāṇaṃ’’.
곧 의식이다.”
116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고 말했다. 아난다여, 이 말도 이런 방식으로 알아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어떻게 의식이 있는지 보자. 아난다여, 만약 의식이 정신과 물질에서 발판을 얻지 못한다면, 그래도 앞으로 올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곧 괴로움이 일어나 생겨남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의식의 원인, 근원, 일어남, 조건은 바로 이것, 곧 정신과 물질이다. 아난다여, 여기까지가 태어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고 다시 나는 범위이다. 여기까지가 이름의 길이고, 말의 길이며, 개념의 길이다. 여기까지가 지혜가 미치는 영역이고, 윤회가 돌아가는 범위이다. 의식과 함께하는 정신과 물질이 서로를 조건으로 하여 이 존재를 알려 주며 돌아가는 것이다.”[불확실]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고 말했는데, 아난다여,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의식이 어떻게 있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있다.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ṃ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dukkhasamudayasambhav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만일 의식이 정신·물질에서 발판을 얻지 못한다면, 앞으로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의 일어남과 생겨남이 드러나겠느냐?”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ṃ nāmarūpaṃ.
“아난다여,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의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일어남이고 조건이니, 곧 정신·물질이다.
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아난다여, 이만큼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죽거나 옮겨 가거나 다시 태어난다.
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ṃ, ettāvatā vaṭṭaṃ vattati itthattaṃ paññāpanāya yadidaṃ nāmarūpaṃ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이만큼이 이름 붙임의 길이고, 이만큼이 말의 길이고, 이만큼이 일컬음의 길이고, 이만큼이 지혜가 다니는 범위이며, 이만큼에서 굴레가 굴러 이 세상의 상태를 드러낸다 — 곧 정신·물질이 의식과 함께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 되어 이어지는 것이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자아를 내세움Attapaññatti
117
아난다여, 어느 만큼에서 자아를 내세운다고 하는가? 형상을 가진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을 가졌고 한정되어 있다.’ 하고 말이다.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을 가졌고 무한하다.’ 하고 말이다. 형상이 없는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이 없고 한정되어 있다.’ 하고 말이다. 형상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이 없고 무한하다.’ 하고 말이다.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얼마만큼으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는가?
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운다 —
‘‘rūpī me parit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녔고 제한되어 있다’라고.
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운다 —
‘rūpī me anan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녔고 무한하다’라고.
A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운다 —
‘arūpī me parit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이 없고 제한되어 있다’라고.
A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운다 —
‘arūpī me anan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이 없고 무한하다’라고.
118
아난다여, 형상을 가진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거나,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운다. 혹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을 가진 한정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Tatrānanda, yo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그는 지금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parit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거나,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운다. 혹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Tatrānanda, yo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그는 지금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anan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형상이 없는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거나,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운다. 혹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이 없는 한정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Tatrānanda, yo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그는 지금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parit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형상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거나,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운다. 혹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이 없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이만큼이 자아를 내세운다고 하는 경우이다.
‘‘Tatrānanda, yo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hoti.
그는 지금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우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anantattānudiṭṭhi a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Ettāvatā kho, ānanda, attānaṃ paññapento paññapeti.
아난다여, 이만큼으로 자아를 내세우면서 내세운다.
자아를 내세우지 않음Naattapaññatti
119
아난다여, 어느 만큼에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는가? 형상을 가진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을 가졌고 한정되어 있다.’ 하고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을 가졌고 무한하다.’ 하고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형상이 없는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이 없고 한정되어 있다.’ 하고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형상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의 자아는 형상이 없고 무한하다.’ 하고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얼마만큼으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가?
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다 —
‘rūpī me parit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녔고 제한되어 있다’라고.
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다 —
‘rūpī me anan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을 지녔고 무한하다’라고.
Arūpiṃ vā hi, ānanda,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다 —
‘arūpī me parit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이 없고 제한되어 있다’라고.
Arūpiṃ vā hi, ānanda,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다 —
‘arūpī me ananto attā’ti.
‘나의 자아는 물질이 없고 무한하다’라고.
120
아난다여, 형상을 가진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는 생각도 그에게는 없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을 가진 한정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지 않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Tatrānanda, yo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그는 지금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고,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도 그에게 없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parit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을 지닌 제한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는 생각도 그에게는 없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을 가진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지 않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Tatrānanda, yo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그는 지금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고,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도 그에게 없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rūpiṃ anan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을 지닌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형상이 없는 한정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는 생각도 그에게는 없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이 없는 한정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지 않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Tatrānanda, yo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parit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그는 지금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고,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도 그에게 없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parit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이 없는 제한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형상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그런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다음 생에 그렇게 되리라고 보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가겠다.’ 하는 생각도 그에게는 없다. 아난다여, 그렇다면 형상이 없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그에게 잠복해 있지 않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아난다여, 이만큼이 자아를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이다.
‘‘Tatrānanda, yo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 이가 있다.
Etarahi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tattha bhāviṃ vā so arūpiṃ anantaṃ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atathaṃ vā pana santaṃ tathattāya upakappessāmī’ti iti vā panassa na hoti.
그는 지금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고, 거기서 장차 있을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상태가 되도록 내가 마련하리라’라는 생각도 그에게 없다.
Evaṃ santaṃ kho, ānanda, arūpiṃ anantattānudiṭṭhi nānusetīti iccālaṃ vacanāya.
아난다여, 그러할 때 ‘물질이 없는 무한한 자아라는 견해가 잠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Ettāvatā kho, ānanda, attānaṃ na paññapento na paññapeti.
아난다여, 이만큼으로 자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내세우지 않는다.
자아를 여김Attasamanupassanā
121
아난다여, 어느 만큼에서 자아를 관찰한다고 하는가? 느낌을 자아로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자아는 느낌이다.’ 하고 말이다. 또 이렇게 자아를 관찰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 말이다. 또 이렇게 자아를 관찰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고 말이다.
‘‘Kittāvatā ca,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그런데 아난다여, 얼마만큼으로 자아를 여기면서 여기는가?
Vedanaṃ vā hi,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
아난다여, 느낌을 자아로 여기면서 여긴다 —
‘vedanā me attā’ti.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또는 아난다여, ‘느낌이 나의 자아인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낌을 겪지 못한다’라고, 자아를 여기면서 여긴다.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ṃ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iti vā hi, ānanda,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또는 아난다여, ‘느낌이 나의 자아인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가 느낌을 겪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자아를 여기면서 여긴다.
122
아난다여, 그중에서 ‘나의 자아는 느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벗이여,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당신은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자아로 관찰합니까?’
‘‘Tatrānanda, yo so evamāha –
“그런데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
‘vedanā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그런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tisso kho imā, āvuso, vedanā –
‘벗이여, 이 세 가지 느낌이 있다 —
sukhā vedanā dukkhā vedanā adukkhamasukhā vedanā.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Imāsaṃ kho tvaṃ tissannaṃ vedanānaṃ katamaṃ attato samanupassasī’ti?
그대는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자아로 여기는가?’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에는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 그때에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 느낀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 그때에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에는 즐거운 느낌도 느끼지 않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 그때에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 느낀다.
Yasmiṃ, ānanda, samaye sukhaṃ vedanaṃ vedeti, neva tasmiṃ samaye dukkhaṃ vedanaṃ vedeti, na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eti;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때에는, 그때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
sukhaṃyeva tasmiṃ samaye vedanaṃ vedeti.
그때는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느낀다.
Yasmiṃ, ānanda, samaye dukkhaṃ vedanaṃ vedeti, neva tasmiṃ samaye sukhaṃ vedanaṃ vedeti, na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eti;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을 느끼는 때에는, 그때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
dukkhaṃyeva tasmiṃ samaye vedanaṃ vedeti.
그때는 오직 괴로운 느낌만을 느낀다.
Yasmiṃ, ānanda, samaye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eti, neva tasmiṃ samaye sukhaṃ vedanaṃ vedeti, na dukkhaṃ vedanaṃ vedeti;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는 때에는, 그때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 않고, 괴로운 느낌도 느끼지 않는다.
adukkhamasukhaṃyeva tasmiṃ samaye vedanaṃ vedeti.
그때는 오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느낀다.
123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은 무상하다.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다하고 사라지고 퇴색하고 소멸하는 성질을 지녔다. 괴로운 느낌도 마찬가지로 무상하고, 만들어진 것이며,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그것도 다하고 사라지고 퇴색하고 소멸하는 성질을 지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또한 무상하고, 만들어진 것이며, 조건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이것도 다하고 사라지고 퇴색하고 소멸하는 성질을 지녔다.
‘‘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아난다여,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지어진 것이며, 조건에 기대어 함께 일어난 것이고, 다하는 성질이며, 스러지는 성질이고, 탐욕이 사라지는 성질이며, 소멸하는 성질이다.
Duk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아난다여, 괴로운 느낌도 무상하고, 지어진 것이며, 조건에 기대어 함께 일어난 것이고, 다하는 성질이며, 스러지는 성질이고, 탐욕이 사라지는 성질이며, 소멸하는 성질이다.
Adukkhamasukhāpi kho, ānanda, vedanā aniccā saṅkhatā paṭiccasamuppannā khayadhammā vayadhammā virāgadhammā nirodhadhammā.
아난다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무상하고, 지어진 것이며, 조건에 기대어 함께 일어난 것이고, 다하는 성질이며, 스러지는 성질이고, 탐욕이 사라지는 성질이며, 소멸하는 성질이다.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사람은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바로 그 즐거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 하고 생각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끼는 사람도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바로 그 괴로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 하고 생각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는 사람도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바로 그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 하고 생각한다.
Tassa sukhaṃ vedanaṃ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있다.
Tassāyeva 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바로 그 즐거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있다.
Dukkhaṃ vedanaṃ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는 이에게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있다.
Tassāyeva duk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바로 그 괴로운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있다.
Adukkhamasukhaṃ vedanaṃ vediyamānassa ‘eso me attā’ti ho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있는 이에게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는 생각이 있다.
Tassāyeva adukkhamasukhāya vedanāya nirodhā ‘byagā me attā’ti hoti.
바로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소멸하면 ‘나의 자아가 사라졌다’라는 생각이 있다.
이처럼 ‘나의 자아는 느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자아로 관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삶에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느낌이다.’ 하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런 이유로도 ‘나의 자아는 느낌이다.’ 하고 관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자아를 관찰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Iti so diṭṭheva dhamme aniccasukhadukkhavokiṇṇaṃ uppādavayadhammaṃ attānaṃ samanupassamāno samanupassati, yo so evamāha –
이와 같이 그는 지금 여기서 무상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이며, 일어나고 스러지는 성질을 지닌 자아를 여기면서 여긴다. 이렇게 말한 그 사람이 —
‘vedanā me attā’ti.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ṃ nakkhamati –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런 까닭에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
‘vedanā me attā’ti samanupassituṃ.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는 것은.
124
아난다여, 그중에서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벗이여, 느끼는 것이 전혀 없는 곳에 ‘내가 있다.’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런 이유로도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 관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Tatrānanda, yo so evamāha –
“그런데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so evamassa vacanīyo –
‘느낌이 나의 자아인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낌을 겪지 못한다’라고. 그런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yattha panāvuso, sabbaso vedayitaṃ natthi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그런데 벗이여, 느껴지는 것이 전혀 없는 곳, 거기서 「내가 이것이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ṃ nakkhamati –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런 까닭에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appaṭisaṃvedano me attā’ti samanupassituṃ.
‘느낌이 나의 자아인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낌을 겪지 못한다’라고 여기는 것은.
125
아난다여, 그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벗이여, 느낌이 모든 면에서, 모든 방식으로, 남김없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고 해 봅시다. 이렇게 느낌이 전혀 없고 느낌이 소멸했는데도, 거기에 ‘내가 있다.’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런 이유로도 ‘나의 느낌은 자아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가 느끼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고 관찰하는 것은 옳지 않다.
‘‘Tatrānanda, yo so evamāha –
“그런데 아난다여, 이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ṃ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느낌이 나의 자아인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가 느낌을 겪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So evamassa vacanīyo –
그런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vedanā ca hi, āvuso,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aparisesā nirujjheyyuṃ.
‘벗이여, 느낌이 온통 남김없이, 모든 방식으로 모조리 소멸한다고 하자.
Sabbaso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ttha ‘ayamahamasmī’ti siyā’’ti?
느낌이 전혀 없어 느낌이 소멸한 그곳, 거기서 「내가 이것이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smātihānanda, etena petaṃ nakkhamati –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런 까닭에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
‘‘na heva kho me vedanā attā, nopi appaṭisaṃvedano me attā,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ituṃ.
‘느낌이 나의 자아인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가 느낌을 겪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126
아난다여, 어떤 비구가 느낌을 자아로 관찰하지 않는다고 하자. 느끼지 못하는 것을 자아로 관찰하지도 않고, ‘나의 자아가 느끼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느낌의 성질을 지녔다.’ 하고 관찰하지도 않는다고 하자. 그렇게 관찰하지 않는 그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니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으니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리고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다시는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고 안다.
‘‘Yato kho, ānanda, bhikkhu neva vedanaṃ attānaṃ samanupassati, nopi appaṭisaṃvedanaṃ attānaṃ samanupassati, nopi ‘attā me vediyati, vedanādhammo hi me attā’ti samanupassati.
“아난다여, 비구가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도 않고, 느낌을 겪지 못하는 것을 자아로 여기지도 않으며, ‘나의 자아는 느낀다. 나의 자아는 느끼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도 여기지 않을 때,
So evaṃ na samanupassanto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그는 이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세상에서 어떤 것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하지 않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다 살았으며, 할 일은 다 마쳤고, 다시는 이런 상태로 오지 않는다’라고 그는 안다.
아난다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비구를 두고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하고 말한다면 합당하지 않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하고 말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하고 말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하고 말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Evaṃ vimuttacittaṃ kho, ānanda, bhikkhuṃ yo evaṃ vadeyya –
아난다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비구를 두고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ṃ.
‘여래는 죽은 뒤에도 있다, 그에게 그런 견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ṃ.
‘여래는 죽은 뒤에 있지 않다, 그에게 그런 견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ṃ.
‘여래는 죽은 뒤에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하다, 그에게 그런 견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ṃ.
‘여래는 죽은 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 그런 견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
왜 그런가? 아난다여, 이름이 미치는 데까지, 이름의 길이 닿는 데까지, 언어가 미치는 데까지, 언어의 길이 닿는 데까지, 개념이 미치는 데까지, 개념의 길이 닿는 데까지 있다고 하자. 통찰지가 미치는 데까지, 통찰지의 영역이 닿는 데까지, 윤회가 미치는 데까지, 윤회가 돌아가는 데까지도 있다고 하자. 비구는 그 모든 것을 곧바로 알아 해탈했다. 이렇게 곧바로 알아 해탈한 비구를 두고 ‘그는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하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불확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Yāvatā, ānanda, adhivacanaṃ yāvatā adhivacanapatho, yāvatā nirutti yāvatā niruttipatho, yāvatā paññatti yāvatā paññattipatho, yāvatā paññā yāvatā paññāvacaraṃ, yāvatā vaṭṭaṃ, yāvatā vaṭṭati, tadabhiññāvimutto bhikkhu, tadabhiññāvimuttaṃ bhikkhuṃ ‘na jānāti na passati itissa diṭṭhī’ti, tadakallaṃ.
아난다여, 이름이 미치는 데까지, 이름의 길이 미치는 데까지, 말이 미치는 데까지, 말의 길이 미치는 데까지, 개념이 미치는 데까지, 개념의 길이 미치는 데까지, 통찰지가 미치는 데까지, 통찰지가 다니는 영역이 미치는 데까지, 굴레가 미치는 데까지, 굴레가 굴러가는 데까지 — 그것을 스스로 알아 해탈한 비구다. 그렇게 스스로 알아 해탈한 비구를 두고 ‘그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에게 그런 견해가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일곱 가지 의식이 머무는 곳Satta viññāṇaṭṭhiti
127
아난다여, 의식이 머무는 곳이 일곱 가지 있고, 영역이 두 가지 있다. 일곱 가지란 무엇인가? 몸이 갖가지이고 인식도 갖가지인 중생들이 있다. 사람들과 일부 천신들, 일부 악처에 떨어진 이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첫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Satta kho, ānanda, viññāṇaṭṭhitiyo, dve āyatanāni.
“아난다여, 일곱 가지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고, 두 가지 경지가 있다.
Katamā satta?
그 일곱은 무엇인가?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아난다여, 갖가지 몸을 지니고 갖가지 인식을 지닌 중생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파멸처의 중생들이다.
Ayaṃ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첫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아난다여, 몸은 갖가지이지만 인식은 하나인 중생들이 있다. 처음 태어난 범중천의 천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두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불확실]
Santānanda, sattā nān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brahmakāyikā paṭhamābhinibbattā.
아난다여, 갖가지 몸을 지니고 한 가지 인식을 지닌 중생들이 있다. 이를테면 처음 태어난, 범천의 무리에 속한 신들이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yaṃ dutiyā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두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아난다여, 몸은 하나이지만 인식은 갖가지인 중생들이 있다. 광음천의 천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세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ābhassarā.
아난다여, 한 가지 몸을 지니고 갖가지 인식을 지닌 중생들이 있다. 이를테면 빛이 흐르는 신들이다.
Ayaṃ tatiyā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세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아난다여, 몸도 하나이고 인식도 하나인 중생들이 있다. 변정천의 천신들이 그러하다. 이것이 네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Santānanda, sattā ekattakāyā ekattasaññino, seyyathāpi devā subhakiṇhā.
아난다여, 한 가지 몸을 지니고 한 가지 인식을 지닌 중생들이 있다. 이를테면 온통 아름다움뿐인 신들이다.
Ayaṃ catutthī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네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아난다여, 형상에 대한 인식을 모두 넘어서고 부딪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진 중생들이 있다. 이들은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두지 않고 ‘허공은 끝이 없다.’ 하며 허공이 끝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이 다섯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Santānanda, sattā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ūpagā.
아난다여,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지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 쓰지 않아, ‘허공이 무한하다’며 허공이 무한한 경지에 이른 중생들이 있다.
Ayaṃ pañcamī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다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아난다여, 허공이 끝없는 경지를 모두 넘어서서 ‘의식은 끝이 없다.’ 하며 의식이 끝없는 경지에 이른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Santānanda, sattā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ūpagā.
아난다여, 허공이 무한한 경지를 완전히 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며 의식이 무한한 경지에 이른 중생들이 있다.
Ayaṃ chaṭṭhī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여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아난다여, 의식이 끝없는 경지를 모두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 하며 무소유처에 이른 중생들이 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두 가지 영역 가운데 하나는 무상유정처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이다.
Santānanda, sattā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ūpagā.
아난다여, 의식이 무한한 경지를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이른 중생들이 있다.
Ayaṃ sattamī viññāṇaṭṭhiti.
이것이 일곱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Asaññasattāyatan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meva dutiyaṃ.
인식이 없는 중생들의 경지와, 바로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 이것이 그 두 가지다.
128
아난다여, 첫 번째 의식이 머무는 곳을 보자. 몸이 갖가지이고 인식도 갖가지인 중생들, 곧 사람들과 일부 천신들, 일부 악처에 떨어진 이들의 경우이다. 그것을 알고, 그것이 생겨남을 알고, 그것이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나머지 여섯 가지에 대해서도 같은 문답이 이어졌다. 이어서 세존께서 무상유정처에 대해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이 무상유정처의 경우를 보자.
‘‘Tatrānanda, yāyaṃ paṭhamā viññāṇaṭṭhiti nānattakāyā nānattasaññino, seyyathāpi manussā, ekacce ca devā, ekacce ca vinipātikā.
“그런데 아난다여, 갖가지 몸을 지니고 갖가지 인식을 지닌, 저 첫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파멸처의 중생들이다.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ā ca samudayaṃ pajānāti, tassā ca atthaṅgamaṃ pajānāti, tassā ca assādaṃ pajānāti, tassā ca ādīnavaṃ pajānāti, tassā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kallaṃ nu tena tadabhinanditu’’nti?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pe… ‘‘tatrānanda, yamidaṃ asaññasattāyatanaṃ.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갖가지 몸을 지니고 한 가지 인식을 지닌, 저 두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이를테면 처음 태어난, 범천의 무리에 속한 신들이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한 가지 몸을 지니고 갖가지 인식을 지닌, 저 세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이를테면 빛이 흐르는 신들이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한 가지 몸을 지니고 한 가지 인식을 지닌, 저 네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이를테면 온통 아름다움뿐인 신들이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지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 쓰지 않아, ‘허공이 무한하다’며 허공이 무한한 경지에 이른, 저 다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허공이 무한한 경지를 완전히 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며 의식이 무한한 경지에 이른, 저 여섯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의식이 무한한 경지를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이른, 저 일곱 번째로 의식이 머무는 곳이 있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아난다여, 인식이 없는 중생들의 이 경지가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15:127.5 ~ PN:dn15/128.2에서 되살렸습니다.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이 생겨남을 알고, 그것이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ṃ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ṃ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ṃ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ṃ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kallaṃ nu tena tadabhinanditu’’nti?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의 경우를 보자.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이 생겨남을 알고, 그것이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trānanda, yamid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그런데 아난다여,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이 경지가 있다.
Yo nu kho, ānanda, tañca pajānāti, tassa ca samudayaṃ pajānāti, tassa ca atthaṅgamaṃ pajānāti, tassa ca assādaṃ pajānāti, tassa ca ādīnavaṃ pajānāti, tassa ca nissaraṇaṃ pajānāti, kallaṃ nu tena tadabhinanditu’’nti?
아난다여, 그것을 알고, 그것의 일어남을 알고, 그것의 사라짐을 알고, 그것의 달콤함을 알고, 그것의 위험을 알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아는 이가,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비구가 이 일곱 가지 의식이 머무는 곳과 이 두 가지 영역의 생겨남, 사라짐, 달콤함, 위험,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고 하자. 그리하여 집착 없이 해탈하면, 아난다여, 이를 일러 통찰지로 해탈한 비구라 한다.
Yato kho, ānanda, bhikkhu imāsañca sattannaṃ viññāṇaṭṭhitīnaṃ imesañca dvinnaṃ āyatanānaṃ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 vimutto hoti, ayaṃ vuccatānanda, bhikkhu paññāvimutto.
아난다여, 비구가 이 일곱 가지 의식이 머무는 곳과 이 두 가지 경지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고서 취착 없이 해탈할 때, 아난다여, 이런 비구를 통찰지를 통해 해탈한 이라 한다.
여덟 가지 해탈Aṭṭha vimokkhā
129
아난다여, 이 해탈이 여덟 가지 있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형상을 지닌 채 형상들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으로 형상에 대한 인식이 없는 채 밖의 형상들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아름답다.’ 하는 데에만 마음이 쏠린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Aṭṭha kho ime, ānanda, vimokkhā.
“아난다여, 이 여덟 가지 해탈이 있다.
Katame aṭṭha?
그 여덟은 무엇인가?
Rūpī rūpāni passati ayaṃ paṭhamo vimokkho.
물질을 지닌 이가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Ajjhattaṃ arūpasaññī bahiddhā rūpāni passati, ayaṃ dutiyo vimokkho.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이가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Subhanteva adhimutto hoti, ayaṃ tatiyo vimokkho.
‘아름답다’고만 마음을 기울인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형상에 대한 인식을 모두 넘어서고 부딪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진다. 갖가지 인식에 마음을 두지 않고 ‘허공은 끝이 없다.’ 하며 허공이 끝없는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허공이 끝없는 경지를 모두 넘어서서 ‘의식은 끝이 없다.’ 하며 의식이 끝없는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의식이 끝없는 경지를 모두 넘어서서 ‘아무것도 없다.’ 하며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catuttho vimokkho.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지고, 갖가지 인식에 마음 쓰지 않아, ‘허공이 무한하다’며 허공이 무한한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ṃ samatikkamma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pañcamo vimokkho.
허공이 무한한 경지를 완전히 넘어 ‘의식이 무한하다’며 의식이 무한한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chaṭṭho vimokkho.
의식이 무한한 경지를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며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무소유처를 모두 넘어서서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인식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그 경지를 모두 넘어서서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가지 해탈이다.
Sabbaso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sattamo vimokkho.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완전히 넘어,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 ayaṃ aṭṭhamo vimokkho.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를 완전히 넘어,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Ime kho, ānanda, aṭṭha vimokkhā.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가지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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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여, 어떤 비구가 이 여덟 가지 해탈에 차례대로도 들고, 거꾸로도 들고, 차례대로와 거꾸로를 오가며도 든다고 하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들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고 하자. 그리고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통찰지의 해탈을 지금 이 삶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이루어 들어 머문다고 하자. 아난다여, 이를 일러 양면으로 해탈한 비구라 한다. 아난다여, 이 양면의 해탈보다 더 높거나 더 뛰어난 다른 양면의 해탈은 없다.
‘‘Yato kho, ānanda, bhikkhu ime aṭṭha vimokkhe anulomampi samāpajjati, paṭilomampi samāpajjati, anulomapaṭilomampi samāpajjati, yatthicchakaṃ yadicchakaṃ yāvaticchakaṃ samāpajjatipi vuṭṭhātipi.
“아난다여, 비구가 이 여덟 가지 해탈에 차례대로 들고, 거꾸로도 들고, 차례대로 또 거꾸로도 들며,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들기도 하고 나오기도 할 때,
Āsavānañca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ānanda, bhikkhu ubhatobhāgavimutto.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지금 여기서 스스로 깨달아 실현하고, 그것을 이루어 머문다. 아난다여, 이런 비구를 양쪽으로 해탈한 이라 한다.
Imāya ca ānanda ubhatobhāgavimuttiyā aññā ubhatobhāgavimutti uttaritarā vā paṇītatarā vā natthī’’ti.
아난다여, 이 양쪽으로 해탈함보다 더 높거나 더 뛰어난 다른 양쪽으로 해탈함은 없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겼다. 두 번째 큰 인연의 경이 끝났다.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o āyasmā ānand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아난다 존자는 마음이 흡족하여,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며 받들었다.
Mahānidānasuttaṃ niṭṭhitaṃ dutiyaṃ.
「마하니다나 경」이 끝났다. 두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