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Catubyūhahāravibhaṅgo
6. 네 겹 배열의 전달법에 대한 분석[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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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네 가지 배열'이라는 해석 방식은 무엇인가?
Tattha katamo catubyūho hāro?
거기서 네 겹 배열의 전달법이란 무엇인가?
'어원과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Neruttamadhippāyo’’ti ayaṃ.
‘어원 풀이와 의도’라고 한 이것이다.
경의 말씀을 따라 어원 풀이와 의도를 찾아야 한다. 인연이 된 사건과 앞뒤의 이음새도 찾아야 한다.
Byañjanena suttassa neruttañca adhippāyo ca nidānañca pubbāparasandhi ca gavesitabbo.
문자를 통해 경의 어원 풀이와 의도와 인연과 앞뒤의 이음을 찾아야 한다.
그중 어원 풀이란 무엇인가? 말을 짜 맞추는 어법이며, 사물의 이름을 아는 앎이다.
Tattha katamaṃ neruttaṃ, yā niruttipadasaṃhitā, yaṃ dhammānaṃ nāmaso ñāṇaṃ.
거기서 어원 풀이란 무엇인가, 곧 언어 표현의 낱말을 갖춘 것, 법들을 이름으로 아는 앎인 것이다.
비구가 뜻의 이름과 법의 이름을 알면, 그때그때 알맞게 풀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Yadā hi bhikkhu atthassa ca nāmaṃ jānāti, dhammassa ca nāmaṃ jānāti, tathā tathā naṃ abhiniropeti.
참으로 비구가 뜻의 이름을 알고 법의 이름도 알 때, 그는 그때그때 그렇게 그것을 세워 붙인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불린다. 뜻에 밝고, 법에 밝고, 표현에 밝고, 어원에 밝고, 앞뒤에 밝고, 가르침에 밝은 사람이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가리키는 말에 밝다. 여성, 남성, 중성을 가리키는 말에 밝고, 단수와 복수에도 밝다. 이렇게 각 지방의 모든 언어 표현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Ayañca vuccati atthakusalo dhammakusalo byañjanakusalo niruttikusalo pubbāparakusalo desanākusalo atītādhivacanakusalo anāgatādhivacanakusalo paccuppannādhivacanakusalo itthādhivacanakusalo purisādhivacanakusalo napuṃsakādhivacanakusalo ekādhivacanakusalo anekādhivacanakusalo, evaṃ sabbāni kātabbāni janapadaniruttāni sabbā ca janapadaniruttiyo.
그리고 이 사람을 일러 뜻에 능한 이, 법에 능한 이, 문자에 능한 이, 언어 표현에 능한 이, 앞뒤에 능한 이, 가르침에 능한 이, 과거를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미래를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현재를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여성을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남성을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중성을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하나를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 여럿을 가리키는 말에 능한 이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지방 말과 모든 지방 언어 표현을 다 다루어야 한다.
이것이 어원 풀이이다.
Ayaṃ niruttipadasaṃhitā.
이것이 언어 표현의 낱말을 갖춘 것이다.
26
그렇다면 의도란 무엇인가?
Tattha katamo adhippāyo?
거기서 의도란 무엇인가?
법이야말로 법 따라 사는 이를 지켜 주네 / 비 오는 철 큰 우산이 감싸 주듯이
‘‘Dhammo have rakkhati dhammacāriṃ, chattaṃ mahantaṃ yatha vassakāle;
‘법을 행하는 이를 법이 참으로 지켜 준다, 비 올 때의 큰 우산처럼.
법을 잘 닦으면 이런 이로움이 있어 / 법 따라 사는 이는 나쁜 곳에 가지 않네
Esānisaṃso dhamme suciṇṇe, na duggatiṃ gacchati dhammacārī’’ti.
법을 잘 행했을 때 이런 이로움이 있으니, 법을 행하는 이는 나쁜 곳에 가지 않는다.’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Idha bhagavato ko adhippāyo?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악처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법답게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이다.
Ye apāyehi parimuccitukāmā bhavissanti, te dhammacārino bhavissantīti ayaṃ ettha bhagavato adhippāyo.
‘괴로운 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은 법을 행하는 이가 될 것이다’ —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다.
도둑이 담을 뚫다 붙들리면 / 제가 지은 업으로 맞고 묶이듯이
‘‘Coro yathā sandhimukhe gahīto, sakammunā haññati bajjhate ca;
‘도둑이 담을 뚫은 구멍에서 붙잡혀, 제 행위로 매를 맞고 또 묶이듯이.
이처럼 이 중생도 죽어 저세상에서 / 제가 지은 업으로 맞고 묶이네
Evaṃ ayaṃ pecca pajā parattha, sakammunā haññati bajjhate cā’’ti.
이와 같이 이 사람들도 죽은 뒤 저세상에서, 제 행위로 매를 맞고 또 묶인다.’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Idha bhagavato ko adhippāyo?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의도를 갖고 지어 쌓은 업 가운데 괴로운 느낌을 낳는 것이 있다. 그런 업은 원치 않고 달갑지 않은 과보로 돌아온다.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이다.
Sañcetanikānaṃ katānaṃ kammānaṃ upacitānaṃ dukkhavedanīyānaṃ aniṭṭhaṃ asātaṃ vipākaṃ paccanubhavissatīti ayaṃ ettha bhagavato adhippāyo.
‘의도를 지니고 지어서 쌓은, 괴로움으로 느껴질 업들의 원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과보를 겪게 될 것이다’ —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다.
즐거움을 바라는 뭇 생명을 / 몽둥이로 해치는 사람은
‘‘Sukhakāmāni bhūtāni, yo daṇḍena vihiṃsati;
‘즐거움을 바라는 존재들을 몽둥이로 해치는 자는,
제 즐거움을 찾으면서도 / 죽어서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네
Attano sukhamesāno, pecca so na labhate sukha’’nti.
제 즐거움을 구하면서도, 죽은 뒤에 그는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Idha bhagavato ko adhippāyo?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은 나쁜 업을 짓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이다.
Ye sukhena atthikā bhavissanti, te pāpakammaṃ na karissantīti ayaṃ ettha bhagavato adhippāyo.
‘즐거움을 바라는 이들은 나쁜 업을 짓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다.
해태와 혼침에 빠져 많이 먹고 / 졸다가 이리저리 뒹굴며 자는 자
‘‘Middhī yadā hoti mahagghaso ca, niddāyitā samparivattasāyī;
‘혼침에 빠지고 많이 먹으며, 잠에 겨워 이리저리 뒹굴며 눕는 자는,
사료로 살찐 큰 돼지처럼 / 미련한 자는 거듭거듭 모태에 드네
Mahāvarāhova nivāpapuṭṭho, punappunaṃ gabbhamupeti mando’’ti.
먹이로 살찌운 큰 멧돼지처럼, 어리석어 거듭거듭 모태에 든다.’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Idha bhagavato ko adhippāyo?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늙음과 죽음에 시달려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게 될 것이다. 음식에서 알맞은 양을 알고,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며, 초저녁과 새벽에 깨어 있기를 꾸준히 닦는다. 통찰하고, 좋은 법을 존중한다. 함께 청정하게 사는 도반인 장로, 신참, 중견도 공경한다.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이다.
Ye jarāmaraṇena aṭṭiyitukāmā bhavissanti, te bhavissanti bhojane mattaññuno indriyesu guttadvārā pubbarattāpararattaṃ jāgariyānuyogamanuyuttā vipassakā kusalesu dhammesu sagāravā ca sabrahmacārīsu theresu navesu majjhimesūti ayaṃ ettha bhagavato adhippāyo.
‘늙음과 죽음을 싫어하고자 하는 이들은, 음식에 알맞은 양을 아는 이, 감각 기능들에서 문을 지키는 이, 초저녁과 새벽에 깨어 있음의 닦음에 힘쓰는 이, 유익한 법들을 꿰뚫어 보는 이, 그리고 함께 청정한 삶을 사는 이들, 곧 장로와 신참과 중진에게 공경을 갖춘 이가 될 것이다’ —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다.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요 / 방일은 죽음의 길이니
‘‘Appamādo amatapadaṃ, pamādo maccuno padaṃ;
‘불방일은 불사의 자리요, 방일은 죽음의 자리다.
방일하지 않는 이는 죽지 않고 / 방일한 이는 이미 죽은 이와 같네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ti.
방일하지 않는 이들은 죽지 않고, 방일한 이들은 죽은 것과 같다.’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Idha bhagavato ko adhippāyo?
여기서 세존의 의도는 무엇인가?
불사를 찾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않고 지낼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이다.
Ye amatapariyesanaṃ pariyesitukāmā bhavissanti, te appamattā viharissantīti ayaṃ ettha bhagavato adhippāyo.
‘불사를 찾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방일하지 않고 머물 것이다’ — 이것이 여기서 세존의 의도다.
이것이 의도이다.
Ayaṃ adhippāyo.
이것이 의도다.
27
그렇다면 인연이 된 사건이란 무엇인가?
Tattha katamaṃ nidānaṃ?
거기서 인연이란 무엇인가?
소치기 다니야가 세존께 이렇게 말한 경우가 그렇다.
Yathā so dhaniyo gopālako bhagavantaṃ āha –
저 소치기 다니야가 세존께 말씀드린 것과 같다 —
아들 둔 이는 아들로 기뻐하고 / 소 가진 이는 소로 그렇게 기뻐하네
‘‘Nandati puttehi puttimā, gomā gohi tatheva nandati;
‘아들을 둔 이는 아들로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도 소로 그처럼 기뻐합니다.
집착거리가 사람의 기쁨이라 / 집착거리 없는 이는 기뻐할 일이 없네
Upadhī hi narassa nandanā, na hi so nandati yo nirūpadhī’’ti.
재생 바탕이야말로 사람의 기쁨거리이니, 재생 바탕이 없는 이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Bhagavā āha –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아들 둔 이는 아들로 슬퍼하고 / 소 가진 이는 소로 그렇게 슬퍼하네
‘‘Socati puttehi puttimā, gopiko gohi tatheva socati;
‘아들을 둔 이는 아들로 슬퍼하고, 소치는 이도 소로 그처럼 슬퍼한다.
집착거리가 사람의 슬픔이라 / 집착거리 없는 이는 슬퍼할 일이 없네
Upadhī hi narassa socanā, na hi so socati yo nirūpadhī’’ti.
재생 바탕이야말로 사람의 슬픔거리이니, 재생 바탕이 없는 이는 슬퍼하지 않는다.’
이 일과 이 인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존은 바깥의 소유물이 집착의 바탕이라고 말씀하셨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bāhiraṃ pariggahaṃ upadhi āhā’’ti.
이 사연으로, 이 인연으로 이렇게 알려진다 — ‘여기서 세존께서는 바깥의 소유물을 재생 바탕이라 말씀하셨다.’
또 악마 빠삐만이 깃자꾸따 산에서 큰 바위를 굴렸을 때,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 ca māro pāpimā gijjhakūṭā pabbatā puthusilaṃ pātesi, bhagavā āha –
그리고 사악한 자 마라가 독수리봉 산에서 넓적바위를 굴려 떨어뜨렸을 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그대가 설령 온 힘을 다해 / 독수리봉을 통째로 흔든다 해도
‘‘Sacepi kevalaṃ sabbaṃ, gijjhakūṭaṃ calessasi;
‘설령 네가 독수리봉 산 전부를 온통 뒤흔든다 해도,
바르게 해탈한 부처님들께는 / 조금의 흔들림도 없네
Neva sammāvimuttānaṃ, buddhānaṃ atthi iñjitaṃ.
바르게 해탈하신 부처님들께는 흔들림이 없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 뭇 생명이 모두 떨며 두려워하고
Nabhaṃ phaleyyappathavī caleyya, sabbeva pāṇā uda santaseyyuṃ;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며, 모든 생명이 다 떨더라도,
창이 가슴을 찔러 뒤흔든대도 / 부처님들은 집착거리를 의지처로 삼지 않네
Sallampi ce urasi kampayeyyuṃ, upadhīsu tāṇaṃ na karonti buddhā’’ti.
가슴에 창을 꽂아 흔든다 해도, 부처님들은 재생 바탕들에서 피난처를 만들지 않는다.’
이 일과 이 인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존은 몸이 집착의 바탕이라고 말씀하셨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kāyaṃ upadhiṃ āhā’’ti.
이 사연으로, 이 인연으로 이렇게 알려진다 — ‘여기서 세존께서는 몸을 재생 바탕이라 말씀하셨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 cāha –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슬기로운 이들은 굳센 속박이라 하지 않네 / 쇠로 만든 것, 나무와 풀로 엮은 것을
‘‘Na taṃ daḷhaṃ bandhanamāhu dhīrā, yadāyasaṃ dārujapabbajañca;
‘쇠로 된 것도, 나무나 갈대로 된 것도, 지혜로운 이들은 그것을 단단한 묶음이라 하지 않는다.
구슬 귀고리에 깊이 물들어 / 자식과 아내를 돌아보는 그 마음을
Sārattarattā maṇikuṇḍalesu, puttesu dāresu ca yā apekkhā’’ti.
보석 귀걸이에 짙게 물든 애착, 아들과 아내에 대해 품는 미련 —’
이 일과 이 인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존은 바깥 대상에 대한 갈애를 말씀하셨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bāhiresu vatthūsu taṇhaṃ āhā’’ti.
이 사연으로, 이 인연으로 이렇게 알려진다 — ‘여기서 세존께서는 바깥 대상들에 대한 갈애를 말씀하셨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 cāha –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슬기로운 이들은 이것을 굳센 속박이라 하네 / 아래로 끌어내려 느슨해도 풀기 어려운 것
‘‘Etaṃ daḷhaṃ bandhanamāhu dhīrā, ohārinaṃ sithilaṃ duppamuñcaṃ;
‘지혜로운 이들은 이것을 단단한 묶음이라 하니, 아래로 끌어내리고 느슨하되 풀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마저 끊고 길을 떠나네 / 돌아봄 없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서
Etampi chetvāna paribbajanti, anapekkhino kāmasukhaṃ pahāyā’’ti.
이것마저 끊고서 그들은 떠돌아다니니, 미련 없이 감각 즐거움을 버리고서.’
이 일과 이 인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존은 바깥 대상에 대한 갈애를 버리는 일을 말씀하셨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bāhiravatthukāya taṇhāya pahānaṃ āhā’’ti.
이 사연으로, 이 인연으로 이렇게 알려진다 — ‘여기서 세존께서는 바깥 대상을 가진 갈애의 버림을 말씀하셨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 cāha –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병들고 깨끗지 못하고 썩어 / 악취 나며 몸에 기댄 것
‘‘Āturaṃ asuciṃ pūtiṃ, duggandhaṃ dehanissitaṃ;
‘병들고 더럽고 썩었으며, 악취 나고 몸에 기댄 것,
밤낮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이것을 / 미련한 자들만 좋아하네
Paggharantaṃ divā rattiṃ, bālānaṃ abhinandita’’nti.
밤낮으로 흘러내리는 것, 미련한 자들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 일과 이 인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존은 안의 대상에 대한 갈애를 버리는 일을 말씀하셨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ajjhattikavatthukāya taṇhāya pahānaṃ āhā’’ti.
이 사연으로, 이 인연으로 이렇게 알려진다 — ‘여기서 세존께서는 안의 대상을 가진 갈애의 버림을 말씀하셨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 cāha –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제 애착을 끊어 버리게 / 가을 연꽃을 손으로 꺾듯이
‘‘Ucchinda sinehamattano, kumudaṃ sāradikaṃva pāṇinā;
‘가을 연꽃을 손으로 꺾듯이, 제 애착을 끊어라.
오로지 고요에 이르는 길만 키우게 / 온전히 이루신 분이 설하신 열반이니
Santimaggameva brūhaya, nibbānaṃ sugatena desita’’nti.
고요함의 길만을 닦아라, 열반은 온전히 이루신 분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이 일과 이 인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존은 안의 대상에 대한 갈애를 버리는 일을 말씀하셨다.
Iminā vatthunā iminā nidānena evaṃ ñāyati ‘‘idha bhagavā ajjhattikavatthukāya taṇhāya pahānaṃ āhā’’ti.
이 사연으로, 이 인연으로 이렇게 알려진다 — ‘여기서 세존께서는 안의 대상을 가진 갈애의 버림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인연이 된 사건이다.
Idaṃ nidānaṃ.
이것이 인연이다.
그렇다면 앞뒤의 이음새란 무엇인가?
Tattha katamo pubbāparasandhi.
거기서 앞뒤의 이음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말씀하신 경우가 그렇다.
Yathāha –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욕망에 눈멀고 그물에 덮여 / 갈애의 덮개에 가려진 채
‘‘Kāmandhā jālasañchannā, taṇhāchadanachāditā;
‘감각 욕망에 눈멀고, 그물에 덮이고, 갈애의 덮개로 덮이고,
방일의 속박에 묶여 / 통발 어귀의 물고기처럼
Pamattabandhanā baddhā, macchāva kumināmukhe;
방일이라는 묶음에 묶인 이들은, 통발 입구의 물고기처럼,
늙음과 죽음을 뒤따라 가네 / 어미 젖을 먹는 송아지처럼
Jarāmaraṇamanventi, vaccho khīrapakova mātara’’nti.
젖 먹는 송아지가 어미를 따르듯, 늙음과 죽음을 따라간다.’
이것은 욕망에 대한 갈애를 말한 것이다.
Ayaṃ kāmataṇhā vuttā.
여기서는 감각 욕망에 대한 갈애가 말해졌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앞뒤와 이어지는가?
Sā katamena pubbāparena yujjati?
그것은 어떤 앞뒤와 맞아 들어가는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ha –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물든 이는 이로움을 알지 못하고 / 물든 이는 법을 보지 못하네
‘‘Ratto atthaṃ na jānāti, ratto dhammaṃ na passati;
‘물든 이는 뜻을 알지 못하고, 물든 이는 법을 보지 못한다.
탐욕이 사람을 사로잡을 때 / 그때는 눈먼 어둠이 되고 마네
Andhantamaṃ tadā hoti, yaṃ rāgo sahate nara’’nti.
탐욕이 사람을 짓누를 때, 그때는 눈먼 어둠이 된다.’
이처럼 눈멂과 뒤덮임이라는 두 면에서 말한 것도 바로 그 갈애이다.
Iti andhatāya ca sañchannatāya ca sāyeva taṇhā abhilapitā.
이와 같이 눈멂으로도 덮임으로도 바로 그 갈애가 말해졌다.
'욕망에 눈멀고 그물에 덮여, 갈애의 덮개에 가려졌다'는 말씀도 그렇다.
Yañcāha kāmandhā jālasañchannā, taṇhāchadanachāditāti.
그리고 ‘감각 욕망에 눈멀고, 그물에 덮이고, 갈애의 덮개로 덮이고’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다.
'탐욕에 물든 자는 뜻을 알지 못하고, 탐욕에 물든 자는 법을 보지 못한다'는 말씀도 그렇다. 이 구절들이 말하는 사로잡힘도 바로 그 갈애를 가리킨다.
Yañcāha ratto atthaṃ na jānāti, ratto dhammaṃ na passatīti, imehi padehi pariyuṭṭhānehi sāyeva taṇhā abhilapitā.
그리고 ‘물든 이는 뜻을 알지 못하고, 물든 이는 법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 사로잡음인 이 낱말들로 바로 그 갈애가 말해졌다.
어둠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다시 태어남으로 이끄는 것이 갈애이다. '욕망'은 번뇌인 욕망을 가리킨다.
Yaṃ andhakāraṃ, ayaṃ dukkhasamudayo, yā ca taṇhā ponobhavikā, yañcāha kāmāti ime kilesakāmā.
어둠인 것,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그리고 다시 태어남으로 이끄는 갈애인 것, 그리고 ‘감각 욕망들’이라고 말씀하신 것, 이것들은 오염의 감각 욕망들이다.
'그물에 덮여'는 그 욕망들이 작용하여 사로잡히게 됨을 보이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번뇌의 면에서도, 사로잡힘의 면에서도 갈애의 속박을 말씀하신 것이다.
Yañcāha jālasañchannāti tesaṃ yeva kāmānaṃ payogena pariyuṭṭhānaṃ dasseti, tasmā kilesavasena ca pariyuṭṭhānavasena ca taṇhābandhanaṃ vuttaṃ.
그리고 ‘그물에 덮이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감각 욕망들의 작용으로 인한 사로잡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오염의 측면으로도 사로잡음의 측면으로도 갈애라는 묶음이 말해졌다.
이런 사람들은 늙음과 죽음을 따라간다. 세존께서 앞서 놓아 두신 게송의 힘으로, 이렇게 보이신 것이다.
Ye edisikā, te jarāmaraṇaṃ anventi, ayaṃ bhagavatā yathānikkhittagāthābalena dassitā jarāmaraṇamanventīti.
그러한 이들, 그들은 늙음과 죽음을 따라간다. 이것을 세존께서는 놓인 그대로의 게송의 힘으로 ‘늙음과 죽음을 따라간다’고 보이셨다.
희론도 머묾도 없고 / 밧줄과 빗장을 넘어선 이
‘‘Yassa papañcā ṭhitī ca natthi, sandānaṃ palighañca vītivatto;
‘희론도 머묾도 없고, 얽어매는 줄과 빗장을 완전히 넘어선 이,
갈애 없이 다니는 그 성인을 / 신들을 거느린 세상도 알지 못하네
Taṃ nittaṇhaṃ muniṃ carantaṃ, na vijānāti sadevakopi loko’’ti.
갈애 없이 다니는 그 성자를, 신을 포함한 세상도 알아보지 못한다.’
번뇌의 부풀림이란 갈애, 견해, 교만, 그리고 그것들이 지어낸 형성작용이다.
Papañcā nāma taṇhādiṭṭhimānā, tadabhisaṅkhatā ca saṅkhārā.
희론이란 갈애와 견해와 자만이며, 그것들로 지어진 형성작용들이다.
머묾이란 잠재된 번뇌 성향이다.
Ṭhiti nāma anusayā.
머묾이란 잠재 성향들이다.
이어줌이란 갈애에 사로잡힘이다. 갈애의 그물이 서른여섯 갈래로 펼쳐진 것이다.
Sandānaṃ nāma taṇhāya pariyuṭṭhānaṃ, yāni chattiṃsataṇhāya jāliniyā vicaritāni.
얽어매는 줄이란 갈애의 사로잡음이니, 곧 그물 같은 갈애의 서른여섯 가지 돌아다님들이다.
빗장이란 어리석음이다.
Paligho nāma moho.
빗장이란 어리석음이다.
이 부풀림과 형성작용, 머묾, 이어줌, 빗장을 모두 뛰어넘은 사람을 갈애가 없는 이라고 한다.
Ye ca papañcā saṅkhārā yā ca ṭhiti yaṃ sandānañca yaṃ palighañca yo etaṃ sabbaṃ samatikkanto, ayaṃ vuccati nittaṇho iti.
희론들인 것과 형성작용들인 것과 머묾인 것과 얽어매는 줄인 것과 빗장인 것, 이 모두를 완전히 넘어선 이, 이 사람을 갈애 없는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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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사로잡힘에서 비롯된 형성작용은 세 때에 걸쳐 겪는다. 이 생에서, 다음 생에서, 아니면 그 뒤 여러 생에 걸쳐 겪는다. 이렇게 갈애는 이 생, 다음 생, 그 뒤의 생에서 세 가지 결실을 준다.
Tattha pariyuṭṭhānasaṅkhārā diṭṭhadhammavedanīyā vā upapajjavedanīyā vā aparāpariyavedanīyā vā, evaṃ taṇhā tividhaṃ phalaṃ deti diṭṭhe vā dhamme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거기서 사로잡음의 형성작용들은 지금 여기서 느껴질 것이거나, 다시 태어나서 느껴질 것이거나, 그 뒤 언젠가 느껴질 것이다. 이와 같이 갈애는 세 가지 열매를 준다 — 지금 여기서, 또는 다시 태어나서, 또는 그 뒤 다른 때에.
그래서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탐욕에서 나온 업을 몸이나 말이나 마음으로 짓는다면, 그 과보를 겪는다. 이 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 뒤의 생에서든 겪는다."
Evaṃ bhagavā āha ‘‘yaṃ lobhapakataṃ kammaṃ karoti kāyena vā vācāya vā manasā vā, tassa vipākaṃ anubhoti diṭṭhe vā dhamme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ti.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 ‘탐욕으로 지어진 업을 몸으로나 말로나 마음으로 지으면, 그는 그 과보를 지금 여기서, 또는 다시 태어나서, 또는 그 뒤 다른 때에 겪는다.’
이것은 세존의 말씀과 앞뒤가 맞는다.
Idaṃ bhagavato pubbāparena yujjati.
이것은 세존의 앞뒤와 맞아 들어간다.
그중 사로잡힘은 업이 된다. 이 생에서 겪는 업이 되기도 하고, 다음 생이나 그 뒤의 생에서 겪는 업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업은 이 생, 다음 생, 그 뒤의 생에서 세 가지로 익는다.
Tattha pariyuṭṭhānaṃ diṭṭhadhammavedanīyaṃ vā kammaṃ upapajjavedanīyaṃ vā kammaṃ aparāpariyāyavedanīyaṃ vā kammaṃ, evaṃ kammaṃ tidhā vipaccati diṭṭhe vā dhamme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
거기서 사로잡음은 지금 여기서 느껴질 업이거나, 다시 태어나서 느껴질 업이거나, 그 뒤 언젠가 느껴질 업이다. 이와 같이 업은 세 가지로 익는다 — 지금 여기서, 또는 다시 태어나서, 또는 그 뒤 다른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Yathāha –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어리석은 이가 이 세상에서 산 생명을 죽이고, 그 밖에 …… 삿된 견해를 가진다면, 그는 그 과보를 겪는다. 이 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 뒤의 생에서든 겪는다."
‘‘Yañce bālo idha pāṇātipātī hoti…pe… micchādiṭṭhi hoti, tassa diṭṭhe vā dhamme vipākaṃ paṭisaṃvedeti upapajje vā apare vā pariyāye’’ti.
‘만약 미련한 자가 여기서 산 목숨을 죽이는 자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이고, 감각적 욕망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자이고, 거짓말하는 자이고, 이간하는 말을 하는 자이고, 거친 말을 하는 자이고,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이고, 욕심 많은 자이고, 악의에 찬 마음을 지닌 자이고, 삿된 견해를 지닌 자라면, 그는 그 과보를 지금 여기서, 또는 다시 태어나서, 또는 그 뒤 다른 때에 몸소 겪는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NE 12:31.24에서 되살렸습니다.
이것도 세존의 말씀과 앞뒤가 맞는다.
Idaṃ bhagavato pubbāparena yujjati.
이것은 세존의 앞뒤와 맞아 들어간다.
그중 사로잡힘은 숙고하는 힘으로 버려야 한다. 형성작용은 봄의 힘으로, 갈애가 서른여섯 갈래로 펼쳐진 것은 닦는 힘으로 버려야 한다. 이렇게 갈애도 세 가지로 버려진다.
Tattha pariyuṭṭhānaṃ paṭisaṅkhānabalena pahātabbaṃ, saṅkhārā dassanabalena, chattiṃsa taṇhāvicaritāni bhāvanābalena pahātabbānīti evaṃ taṇhāpi tidhā pahīyati.
거기서 사로잡음은 되살펴 봄의 힘으로 버려야 하고, 형성작용들은 봄의 힘으로, 서른여섯 가지 갈애의 돌아다님들은 닦음의 힘으로 버려야 한다. 이와 같이 갈애도 세 가지로 버려진다.
갈애가 없는 상태는 남음이 있는 열반의 영역이다.
Yā nittaṇhātā ayaṃ saupādisesā nibbānadhātu.
갈애 없음인 것, 이것이 남음이 있는 열반의 요소다.
몸이 무너지면 남음이 없는 열반의 영역이 된다.
Bhedā kāyassa ayaṃ anupādisesā nibbānadhātu.
몸이 무너지고 나서 있는 이것이 남음이 없는 열반의 요소다.
번뇌의 부풀림이란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을 말한다.
Papañco nāma vuccati anubandho.
희론이란 뒤따라 붙음이라 한다.
세존께서 "눈으로 알 수 있는 과거, 미래, 현재의 형상을 대상으로 부풀린다"고 하신 말씀도 그렇다.
Yañcāha bhagavā ‘‘papañceti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cakkhuviññeyyaṃ rūpaṃ ārabbhā’’ti.
그리고 세존께서 ‘눈으로 알 수 있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물질을 두고 희론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다.
세존께서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Yañcāha bhagavā –
그리고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
"라다여, 과거의 형상에 기대를 두지 말라. 미래의 형상을 반기지 말라. 현재의 형상에 대해서는 싫어하여 떠남, 탐욕이 사라짐, 소멸, 놓아 버림을 향해 나아가라."
‘‘atīte, rādha, rūpe anapekkho hohi, anāgataṃ rūpaṃ mā abhinandi, paccuppannassa rūp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nissaggāya paṭipajjā’’ti.
‘라다여, 과거의 물질에 미련을 두지 말라. 미래의 물질을 기뻐하지 말라. 현재의 물질에 대해서는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욕이 사라짐으로, 소멸로, 놓아버림으로 나아가라.’
이것도 세존의 말씀과 앞뒤가 맞는다.
Idaṃ bhagavato pubbāparena yujjati.
이것은 세존의 앞뒤와 맞아 들어간다.
부풀림이든 형성작용이든, 과거·미래·현재에 대한 반김이든 모두 같은 뜻이다.
Yo cāpi papañco ye ca saṅkhārā yā ca atītānāgatapaccuppannassa abhinandanā, idaṃ ekatthaṃ.
희론인 것도, 형성작용들인 것도,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기뻐함인 것도, 이것은 한 가지 뜻이다.
다만 세존께서는 서로 다른 말, 서로 다른 글자, 서로 다른 표현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Api ca aññamaññehi padehi aññamaññehi akkharehi aññamaññehi byañjanehi aparimāṇā dhammadesanā vuttā bhagavatā.
또한 세존께서는 서로 다른 낱말들로, 서로 다른 글자들로, 서로 다른 문자들로 헤아릴 수 없는 법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경과 경을 맞대어 보고 앞뒤와 함께 엮어 보아야 경이 밝혀진다.
Evaṃ suttena suttaṃ saṃsandayitvā pubbāparena saddhiṃ yojayitvā suttaṃ niddiṭṭhaṃ bhavati.
이와 같이 경으로 경을 맞대어 보고 앞뒤와 함께 이어 붙이면 경이 밝혀진 것이 된다.
이 앞뒤의 이음새에는 네 가지가 있다. 뜻의 이음새, 표현의 이음새, 가르침의 이음새, 지목의 이음새이다.
So cāyaṃ pubbāparo sandhi catubbidho atthasandhi byañjanasandhi desanāsandhi niddesasandhīti.
그리고 이 앞뒤의 이음은 네 가지다 — 뜻의 이음, 문자의 이음, 가르침의 이음, 해설의 이음이다.
그중 뜻의 이음새에는 여섯 가지 항목이 있다. 요약해 보임, 드러내 밝힘, 열어 보임, 나누어 풂, 쉽게 풀이함, 규정함이다.
Tattha atthasandhi chappadāni saṅkāsanā pakāsanā vivaraṇā vibhajanā uttānīkammatā paññattīti.
거기서 뜻의 이음은 여섯 낱말이다 — 간략히 보임, 드러냄, 열어 보임, 나누어 보임, 분명하게 함, 밝혀 세움이다.
표현의 이음새에도 여섯 가지 항목이 있다. 글자, 낱말, 표현, 양상, 어원, 지목이다.
Byañjanasandhi chappadāni akkharaṃ padaṃ byañjanaṃ ākāro nirutti niddesoti.
문자의 이음은 여섯 낱말이다 — 글자, 낱말, 문자, 형태, 언어 표현, 해설이다.
가르침의 이음새는 이러하다. 땅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 들며, 선정에 드는 이는 선정에 든다.
Desanāsandhi na ca pathaviṃ nissāya jhāyati jhāyī jhāyati ca.
가르침의 이음은 이렇다 — 땅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든다.
물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 들며, 선정에 드는 이는 선정에 든다. 불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 들며, 선정에 드는 이는 선정에 든다. 바람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 들며, 선정에 드는 이는 선정에 든다.
Na ca āpaṃ nissāya jhāyati jhāyī jhāyati ca, na ca tejaṃ nissāya jhāyati jhāyī jhāyati ca, na ca vāyuṃ nissāya jhāyati jhāyī jhāyati ca.
물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고, 불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며, 바람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든다.
공간이 끝없는 경지에도, 의식이 끝없는 경지에도,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인식도 아니고 인식 아님도 아닌 경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 들며, 선정에 드는 이는 선정에 든다.
Na ca ākāsānañcāyatanaṃ nissāya…pe… na ca viññāṇañcāyatanaṃ nissāya…pe… na ca ākiñcaññāyatanaṃ nissāya…pe… na c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nissāya…pe… na ca imaṃ lokaṃ nissāya…pe… na ca paralokaṃ nissāya jhāyati jhāyī jhāyati ca.
공간이 무한한 경지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며,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고,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며, 이 세상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들고, 저세상에 의지하여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든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NE 11:28.22 ~ PN:ne11/28.23에서 되살렸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얻고 찾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마음으로 곱씹은 것이 있다. 그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선정에 들며, 선정에 드는 이는 선정에 든다.
Yamidaṃ ubhayamantarena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vitakkitaṃ vicāritaṃ manasānucintitaṃ, tampi nissāya na jhāyati jhāyī jhāyati ca.
그 둘 사이에서 보이고 들리고 감지되고 알려지고 얻어지고 찾아지고 생각되고 헤아려지고 마음으로 곱씹어진 이것, 그것에 의지해서도 선정에 들지 않되, 선정을 닦는 이는 선정에 든다.
이 사람은 알려지지 않는다. 신들과 악마와 범천이 있는 세상,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마음으로 선정에 들기 때문이다.
Ayaṃ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issitena cittena na ñāyati jhāyanto.
이 사람은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무리에게, 의지하지 않는 마음으로 선정에 들 때 알려지지 않는다.
악마 빠삐만이 선남자 고디까의 의식을 찾아 헤맸지만,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것과 같다.
Yathā māro pāpimā godhikassa kulaputtassa viññāṇaṃ samanvesanto na jānāti na passati.
사악한 자 마라가 좋은 가문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두루 찾으면서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것과 같다.
고디까는 부풀림을 넘어섰고 갈애를 버렸으므로, 견해에 기대는 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So hi papañcātīto taṇhāpahānena diṭṭhinissayopissa natthi.
그는 갈애를 버림으로써 희론을 넘어섰고, 그에게는 견해에 의지함도 없기 때문이다.
고디까가 그랬듯이 왁깔리도 그러했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선정에 들어 있어도 알려지지 않는다. 신들과 악마와 범천이 있는 세상,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그렇다.
Yathā ca godhikassa, evaṃ vakkalissa sadevakena lokena samārakena sabrahmakena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issitacittā na ñāyanti jhāyamānā.
고디까에게 그러했듯이 왁깔리에게도 그러하니,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 의해서도, 사문과 바라문과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무리에 의해서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선정에 들 때 알려지지 않는다.
이것이 가르침의 이음새이다.
Ayaṃ desanāsandhi.
이것이 가르침의 이음이다.
그렇다면 지목의 이음새란 무엇인가?
Tattha katamā niddesasandhi?
거기서 해설의 이음이란 무엇인가?
의지하는 마음은 해로운 쪽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이로운 쪽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kusalapakkhen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kusalapakkhen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해로운 쪽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유익한 쪽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번뇌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정화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kilesen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vodānen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오염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깨끗해짐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윤회가 이어짐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윤회가 그침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saṃsārappavattiyā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saṃsāranivattiyā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윤회의 굴러감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윤회의 되돌아 그침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갈애와 무명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고요함과 통찰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taṇhāya ca avijjāy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samathena ca vipassanāy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갈애와 무명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부끄러움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hirikena ca anottapp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hiriyā ca ottapp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름과 두려워할 줄 모름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부끄러워함과 두려워함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마음챙김 없음과 알아차림 없음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satiyā ca asampajaññ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satiyā ca sampajaññ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마음챙김 없음과 알아차림 없음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이치에 맞지 않음과 이치에 맞지 않는 주의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이치에 맞음과 이치에 맞는 주의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yoniyā ca ayonisomanasikār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yoniyā ca yonisomanasikār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바른 근원이 아님과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 기울임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바른 근원과 이치에 맞게 마음 기울임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게으름과 말 안 듣는 성질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정진을 시작함과 말 잘 듣는 성질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kosajjena ca dovacass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vīriyārambhena ca sovacass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게으름과 말 듣기 어려움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정진을 일으킴과 말 듣기 쉬움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믿음 없음과 방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믿음과 방일하지 않음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ssaddhiyena ca pamād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saddhāya ca appamād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믿음 없음과 방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믿음과 불방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바른 법을 듣지 않음과 단속하지 않음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바른 법을 들음과 단속함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saddhammassavanena ca asaṃvaraṇ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saddhammassavanena ca saṃvar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바른 법을 듣지 않음과 단속하지 않음으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바른 법을 들음과 단속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탐냄과 악의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탐내지 않음과 악의 없음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abhijjhāya ca byāpādena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anabhijjhāya ca abyāpādena ca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간탐과 악의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간탐 없음과 악의 없음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장애와 속박으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탐욕이 사라짐에 따른 마음의 해탈, 무명이 사라짐에 따른 통찰의 해탈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nīvaraṇehi ca saṃyojaniyehi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rāgavirāgāya ca cetovimuttiyā avijjāvirāgāya ca paññāvimuttiyā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장애들과 족쇄에 매이게 하는 것들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탐욕이 사라짐에 따른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무명이 사라짐에 따른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는 마음은 단멸의 견해와 영속의 견해로 가리켜야 한다. 의지하지 않는 마음은 남음이 있는 열반의 영역과 남음이 없는 열반의 영역으로 가리켜야 한다.
Nissitacittā ucchedadiṭṭhiyā ca sassatadiṭṭhiyā ca niddisitabbā, anissitacittā saupādisesāya ca anupādisesāya ca nibbānadhātuyā niddisitabbā.
의지하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단멸의 견해와 상주의 견해로 가리켜야 하고,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이들은 남음이 있는 열반의 요소와 남음이 없는 열반의 요소로 가리켜야 한다.
이것이 지목의 이음새이다.
Ayaṃ niddesasandhi.
이것이 해설의 이음이다.
그래서 마하깟짜야나 존자가 "어원과 의도"라고 말했다.
Tenāha āyasmā mahākaccāyano ‘‘neruttamadhippāyo’’ti.
그래서 마하깟짜야나 존자는 ‘어원 풀이와 의도’라고 말했다.
'네 가지 배열'이라는 해석 방식이 끝났다.
Niyutto catubyūho hāro.
네 겹 배열의 전달법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