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Yuttihāravibhaṅgo
3. 맞음의 전달 분석[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18
그러면 합치 방식이란 무엇인가? ‘모든 방식의’라는 구절이 곧 합치 방식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맞추어 잇는가?
Tattha katamo yuttihāro?
거기서 맞음의 전달이란 무엇인가?
‘‘Sabbesaṃ hārāna’’nti, ayaṃ yuttihāro.
‘모든 전달들의’라고 한 것, 이것이 맞음의 전달이다.
Kiṃ yojayati?
무엇을 맞추는가?
네 가지 큰 근거가 있다. 붓다를 근거로 삼는 것, 승가를 근거로 삼는 것이 있다. 여러 장로를 근거로 삼는 것, 한 장로를 근거로 삼는 것도 있다. 이 네 가지 큰 근거로 그 구절과 문자들을 살펴야 한다. 경에 대어 보고, 율에 견주어 보고, 법의 이치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Cattāro mahāpadesā buddhāpadeso saṅghāpadeso sambahulattherāpadeso ekattherāpadeso.
네 가지 큰 근거이니, 붓다를 든 근거, 승가를 든 근거, 여러 장로를 든 근거, 한 장로를 든 근거이다.
Ime cattāro mahāpadesā, tāni padabyañjanāni sutte otārayitabbāni, vinaye sandassayitabbāni, dhammatāyaṃ upanikkhipitabbāni.
이 네 가지 큰 근거에서, 그 말과 글자들은 경에 견주어 보아야 하고,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하고, 법다움에 놓아 보아야 한다.
어떤 경에 대어 보는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어 본다. 어떤 율에 견주어 보는가? 탐욕을 다스리는 율, 성냄을 다스리는 율,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율에 견준다. 어떤 법의 이치에 비추어 보는가? 연기에 비추어 본다.
Katamasmiṃ sutte otārayitabbāni?
어떤 경에 견주어 보아야 하는가?
Catūsu ariyasaccesu.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다.
Katamasmiṃ vinaye sandassayitabbāni?
어떤 율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가?
Rāgavinaye dosavinaye mohavinaye.
탐욕의 다스림에서, 성냄의 다스림에서, 어리석음의 다스림에서다.
Katamissaṃ dhammatāyaṃ upanikkhipitabbāni?
어떤 법다움에 놓아 보아야 하는가?
Paṭiccasamuppāde.
연기에서다.
구절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들어맞는다. 번뇌를 다스리는 율에서도 확인되고, 법의 이치와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네 가지 큰 근거 가운데 어느 것에든 들어맞는 것이 있으면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점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렇다.
Yadi catūsu ariyasaccesu avatarati, kilesavinaye sandissati, dhammatañca na vilometi, evaṃ āsave na janeti.
만약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들어맞고, 오염원의 다스림에 드러나며, 법다움을 거스르지 않으면, 그렇게 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Catūhi mahāpadesehi yaṃ yaṃ yujjati, yena yena yujjati, yathā yathā yujjati, taṃ taṃ gahetabbaṃ.
네 가지 큰 근거로 무엇 무엇이 맞으면, 무엇 무엇으로 맞으면, 어떻게 어떻게 맞으면, 그것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19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 질문이 몇 개의 구절로 이루어졌는지 살펴야 하는가? 구절마다 깊이 살피고 가려내야 하는가?
Pañhaṃ pucchitena kati padāni pañheti padaso pariyogāhitabbaṃ vicetabbaṃ?
질문을 받은 이는 ‘질문에 몇 개의 구(句)가 있는가’ 하고 구절 하나하나로 파고들어 가려내야 하는가?
모든 구절이 하나의 뜻을 말한다면 질문은 하나다. 네 구절이 하나의 뜻을 말해도 질문은 하나다. 세 구절이 그래도, 두 구절이 그래도, 한 구절이 하나의 뜻을 말해도 질문은 하나다.
Yadi sabbāni padāni ekaṃ atthaṃ abhivadanti, eko pañho.
만약 모든 구가 한 가지 뜻을 말한다면, 하나의 질문이다.
Atha cattāri padāni ekaṃ atthaṃ abhivadanti, eko pañho.
또 네 구가 한 가지 뜻을 말한다면, 하나의 질문이다.
Atha tīṇi padāni ekaṃ atthaṃ abhivadanti, eko pañho.
또 세 구가 한 가지 뜻을 말한다면, 하나의 질문이다.
Atha dve padāni ekaṃ atthaṃ abhivadanti, eko pañho.
또 두 구가 한 가지 뜻을 말한다면, 하나의 질문이다.
Atha ekaṃ padaṃ ekaṃ atthaṃ abhivadati, eko pañho.
또 한 구가 한 가지 뜻을 말한다면, 하나의 질문이다.
이를 살피는 사람은 이 법들이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지 알아야 한다. 아니면 뜻은 하나인데 표현만 다른지도 알아야 한다. 어떤 경우가 그러한가? 저 천신이 세존께 질문하는 경우와 같다.
Taṃ upaparikkhamānena aññātabbaṃ kiṃ ime dhammā nānatthā nānābyañjanā, udāhu imesaṃ dhammānaṃ eko attho byañjanameva nānanti.
그것을 살피는 이는 ‘이 법들이 뜻도 다르고 글자도 다른가, 아니면 이 법들의 뜻은 하나이고 글자만 다른가’ 하고 알아야 한다.
Yathā kiṃ bhave?
이를테면 어떤 경우인가?
Yathā sā devatā bhagavantaṃ pañhaṃ pucchati.
그 천신이 세존께 질문을 여쭌 것과 같다.
세상은 무엇에 얻어맞았는가 / 무엇에 에워싸여 있는가
‘‘Kenassubbhāhato loko, kenassu parivārito;
“무엇에 세상은 얻어맞았고, 무엇에 에워싸였습니까;
어떤 화살에 꿰뚫렸는가 / 무엇 때문에 늘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Kena sallena otiṇṇo, kissa dhūpāyito sadā’’ti.
어떤 화살에 찔렸으며, 무엇으로 늘 연기 납니까?”
이 네 구절이 질문된 것이다. 그런데 그 질문이 셋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세존께서 천신에게 대답해 주시기 때문이다.
Imāni cattāri padāni pucchitāni.
이 네 구를 물었다.
Te tayo pañhā kathaṃ ñāyati?
그 세 질문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Bhagavā hi devatāya visajjeti.
세존께서 그 천신에게 답해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죽음에 얻어맞았다 / 늙음에 에워싸여 있다
‘‘Maccunābbhāhato loko, jarāya parivārito;
“죽음에 세상은 얻어맞았고, 늙음에 에워싸였다;
갈애의 화살에 꿰뚫렸다 / 바라는 마음 때문에 늘 연기가 피어오른다
Taṇhāsallena otiṇṇo, icchādhūpāyito sadā’’ti.
갈애의 화살에 찔렸고, 바람으로 늘 연기 난다.”
20
여기서 늙음과 죽음, 이 둘은 지어진 것이 지닌 지어진 것의 특징이다. 늙음은 머물러 있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고, 죽음은 스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늙음과 죽음은 뜻으로 보면 서로 다르다. 무슨 까닭인가. 모태에 든 이들도 죽지만 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신들에게도 죽음은 있지만 그들의 몸은 늙지 않는다. 늙음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손을 쓸 수 없다. 신통을 지닌 이들의 신통 영역만은 예외이다.
Tattha jarā ca maraṇañca imāni dve saṅkhatassa saṅkhatalakkhaṇāni.
거기서 늙음과 죽음, 이 둘은 형성된 것이 지닌 형성됨의 특징이다.
Jarāyaṃ ṭhitassa aññathattaṃ, maraṇaṃ vayo.
늙음에서는 머무는 것의 달라짐이 있고, 죽음은 무너짐이다.
Tattha jarāya ca maraṇassa ca atthato nānattaṃ.
거기서 늙음과 죽음은 뜻으로 보면 다르다.
Kena kāraṇena, gabbhagatāpi hi mīyanti, na ca te jiṇṇā bhavanti.
무슨 까닭인가? 모태에 든 것들도 죽지만, 그것들이 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Atthi ca devānaṃ maraṇaṃ, na ca tesaṃ sarīrāni jīranti.
또 신들에게도 죽음은 있지만, 그들의 몸은 늙지 않는다.
Sakkateva jarāya paṭikammaṃ kātuṃ, na pana sakkate maraṇassa paṭikammaṃ kātuṃ aññatreva iddhimantānaṃ iddhivisayā.
늙음에는 손을 쓸 수 있지만, 죽음에는 손을 쓸 수 없다 — 신통을 지닌 이들의 신통 영역만은 예외다.
또 ‘갈애의 화살에 꿰뚫렸다’고 말한 것을 보자. 탐욕을 떠난 이들도 늙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 보인다. 늙음과 죽음이 그렇듯 갈애도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젊음을 잃은 이는 누구나 갈애를 떠난 이가 될 것이다. 또 갈애가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이듯 늙음과 죽음도 그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면 갈애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늙음과 죽음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이 아니다. 갈애가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이다. 또 갈애가 도로써 끊어 내야 할 것이듯 늙음과 죽음도 도로써 끊어 내야 할 것이 될 것이다.
Yaṃ panāha taṇhāsallena otiṇṇoti dissanti vītarāgā jīrantāpi mīyantāpi.
그런데 ‘갈애의 화살에 찔렸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탐욕이 사라진 이들도 늙고 죽는 것이 보인다.
Yadi ca yathā jarāmaraṇaṃ, evaṃ taṇhāpi siyā.
또 만약 늙음·죽음과 같이 갈애도 그러하다면.
Evaṃ sante sabbe yobbanaṭṭhāpi vigatataṇhā siyuṃ.
그렇다면 젊음에 있는 이들도 모두 갈애가 사라진 이들이어야 할 것이다.
Yathā ca taṇhā dukkhassa samudayo, evaṃ jarāmaraṇampi siyā dukkhassa samudayo, na ca siyā taṇhā dukkhassa samudayo, na hi jarāmaraṇaṃ dukkhassa samudayo, taṇhā dukkhassa samudayo.
또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인 것처럼 늙음·죽음도 괴로움의 일어남이어야 하고, 갈애는 괴로움의 일어남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늙음·죽음이 괴로움의 일어남인 것이 아니라, 갈애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Yathā ca taṇhā maggavajjhā, evaṃ jarāmaraṇampi siyā maggavajjhaṃ.
또 갈애가 도로써 없애지는 것처럼 늙음·죽음도 도로써 없애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치로 서로 다른 근거들을 가지고 찾아보아야 한다. 이치에 들어맞는데도 뜻으로는 다르게 보인다면 표현으로도 찾아보아야 한다. ‘화살’이라는 말과 ‘연기 피움’이라는 말은 뜻으로 보면 같은 법이다. 바람과 갈애가 뜻으로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갈애가 바라는 바가 채워지지 않으면 아홉 가지 원한의 근거를 두고 분노와 앙심이 일어난다. 이런 이치로 늙음과 죽음과 갈애는 뜻으로 서로 다르다.[불확실]
Imāya yuttiyā aññamaññehi kāraṇehi gavesitabbaṃ.
이 맞음으로 서로 다른 까닭들을 통해 찾아보아야 한다.
Yadi ca sandissati yuttisamārūḷhaṃ atthato ca aññattaṃ, byañjanatopi gavesitabbaṃ.
만약 맞음에 오른 것이 드러나고 뜻으로도 다름이 있다면, 글자로도 찾아보아야 한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alloti vā dhūpāyananti vā imesaṃ dhammānaṃ atthato ekattaṃ.
‘화살’이라 하든 ‘연기 남’이라 하든, 이 법들은 뜻으로 보면 하나다.
Na hi yujjati icchāya ca taṇhāya ca atthato aññattaṃ.
바람과 갈애가 뜻으로 다르다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Taṇhāya adhippāye aparipūramāne navasu āghātavatthūsu kodho ca upanāho ca uppajjati.
갈애의 의도가 채워지지 않을 때, 아홉 가지 원한의 근거에서 분노와 앙심이 일어난다.
Imāya yuttiyā jarāya ca maraṇassa ca taṇhāya ca atthato aññattaṃ.
이 맞음으로 보면 늙음과 죽음과 갈애는 뜻으로 다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바람’이라고도 ‘갈애’라고도 두 이름으로 말씀하셨다. 바깥 대상들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두 이름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갈애는 달라붙어 집착한다는 특징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Yaṃ panidaṃ bhagavatā dvīhi nāmehi abhilapitaṃ icchātipi taṇhātipi, idaṃ bhagavatā bāhirānaṃ vatthūnaṃ ārammaṇavasena dvīhi nāmehi abhilapitaṃ icchātipi taṇhātipi, sabbā hi taṇhā ajjhosānalakkhaṇena ekalakkhaṇā.
그런데 세존께서 두 이름으로 ‘바람’이라고도 ‘갈애’라고도 말씀하신 이것은, 세존께서 바깥 사물들을 대상으로 삼는 데 따라 두 이름으로 ‘바람’이라고도 ‘갈애’라고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갈애는 거머쥠의 특징으로 보면 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는 불과 같다. 모든 불은 뜨겁다는 특징 하나를 가진다. 그러나 타는 재료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이름을 얻는다. 장작불, 풀불, 나뭇조각불, 쇠똥불, 겨불, 쓰레기불이라고 하지만 모든 불은 뜨겁다는 특징일 뿐이다.
Yathā sabbo aggi uṇhattalakkhaṇena ekalakkhaṇo, api ca upādānavasena aññamaññāni nāmāni labhati, kaṭṭhaggītipi tiṇaggītipi sakalikaggītipi gomayaggītipi thusaggītipi saṅkāraggītipi, sabbo hi aggi uṇhattalakkhaṇova.
모든 불이 뜨거움의 특징으로 보면 한 특징이지만 연료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이름을 얻어 ‘장작불’이라고도 ‘풀불’이라고도 ‘나뭇조각불’이라고도 ‘쇠똥불’이라고도 ‘왕겨불’이라고도 ‘쓰레기불’이라고도 하는 것과 같으니, 모든 불은 뜨거움의 특징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갈애는 달라붙어 집착한다는 특징 하나를 가진다. 그러나 대상과 붙잡는 재료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바람이라고도, 갈애라고도, 화살이라고도, 연기 피움이라고도, 흐름이라고도, 얽어맴이라고도, 끈적함이라고도 한다. 지침이라고도, 덩굴이라고도, 헤아림이라고도, 속박이라고도, 희망이라고도, 목마름이라고도, 즐김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모든 갈애는 달라붙어 집착한다는 특징 하나를 가지고 있다. 또 동의어를 말한 곳에서 이르신 대로이다.
Evaṃ sabbā taṇhā ajjhosānalakkhaṇena ekalakkhaṇā, api tu ārammaṇaupādānavasena aññamaññehi nāmehi abhilapitā icchāitipi taṇhāitipi salloitipi dhūpāyanāitipi saritāitipi visattikāitipi sinehoitipi kilamathoitipi latāitipi maññanāitipi bandhoitipi āsāitipi pipāsāitipi abhinandanāitipi, iti sabbā taṇhā ajjhosānalakkhaṇena ekalakkhaṇā.
이와 같이 모든 갈애는 거머쥠의 특징으로 보면 한 특징이지만, 대상을 취하는 데 따라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바람’이라고도 ‘갈애’라고도 ‘화살’이라고도 ‘연기 남’이라고도 ‘흐름’이라고도 ‘얽힘’이라고도 ‘애착’이라고도 ‘지침’이라고도 ‘덩굴’이라고도 ‘여김’이라고도 ‘묶임’이라고도 ‘기대’라고도 ‘목마름’이라고도 ‘기뻐함’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모든 갈애는 거머쥠의 특징으로 보면 한 특징이다.
Yathā ca vevacane vuttā.
또 동의어에서 말한 것과 같다.
바람과 부러움과 즐김이여 / 갖가지 세계에 갈애가 자리 잡았네[불확실]
‘‘Āsā ca pihā abhinandanā ca, anekadhātūsu sarā patiṭṭhitā;
“기대와 갈망과 기뻐함, 갖가지 요소에 화살들이 박혀 있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무명을 뿌리 삼아 일어나 뻗친 것들 / 나는 모두 뿌리째 끊어 버렸네
Aññāṇamūlappabhavā pajappitā, sabbā mayā byantikatā samūlakā’’ti.
무지의 뿌리에서 생겨나 애타게 바라던 것들, 그 모두를 나는 뿌리째 끝냈네.”
이것은 갈애의 동의어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이다. “띳사여, 물질에 대해 탐욕과 의욕과 애정과 목마름과 열뇌를 떠나지 못한 이에게는.” 느낌, 인식, 형성들, 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탐욕, 의욕, 애정, 목마름, 열뇌를 떠나지 못한 이에게 한다는 식으로 경 전체를 자세히 풀어야 한다. 이것은 갈애의 동의어이다. 이렇게 들어맞는다.
Taṇhāyetaṃ vevacanaṃ.
이것은 갈애의 동의어다.
Yathāha bhagavā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
rūpe tissa avigatarāgassa avigatacchandassa avigatapemassa avigatapipāsassa avigatapariḷāhassa.
띳사여, 물질에 대해 탐욕이 가시지 않고 열의가 가시지 않고 애정이 가시지 않고 목마름이 가시지 않고 애태움이 가시지 않은 이에게.
Evaṃ vedanāya saññāya saṅkhāresu viññāṇe avigatarāgassa avigatacchandassa avigatapemassa avigatapipāsassa avigatapariḷāhassa sabbaṃ suttaṃ vitthāretabbaṃ.
이와 같이 느낌에 대해, 인식에 대해, 형성작용들에 대해, 의식에 대해 탐욕이 가시지 않고 열의가 가시지 않고 애정이 가시지 않고 목마름이 가시지 않고 애태움이 가시지 않은 이에게 — 경 전체를 자세히 펼쳐야 한다.
Taṇhāyetaṃ vevacanaṃ.
이것은 갈애의 동의어다.
Evaṃ yujjati.
이렇게 맞는다.
21
모든 괴로움의 진행은 욕망의 갈애라는 형성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모든 싫어함의 진행이 욕망의 갈애라는 갖춤에 뿌리를 둔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런 이치로 서로 다른 근거들을 가지고 찾아보아야 한다. 세존께서는 탐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부정을, 성냄이 강한 사람에게는 자애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이 강한 사람에게는 연기를 가르치신다.[불확실]
Sabbo dukkhūpacāro kāmataṇhāsaṅkhāramūlako, na pana yujjati sabbo nibbidūpacāro kāmataṇhāparikkhāramūlako.
모든 괴로움의 다가섬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는 형성작용을 뿌리로 하지만, 모든 싫어하여 떠남의 다가섬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라는 자량을 뿌리로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Imāya yuttiyā aññamaññehi kāraṇehi gavesitabbaṃ.
이 맞음으로 서로 다른 까닭들을 통해 찾아보아야 한다.
Yathā hi bhagavā rāgacaritassa puggalassa asubhaṃ desayati, dosacaritassa bhagavā puggalassa mettaṃ desayati.
세존께서 탐욕의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는 부정함을 설하시고, 성냄의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는 세존께서 자애를 설하시는 것과 같다.
Mohacaritassa bhagavā puggalassa paṭiccasamuppādaṃ desayati.
어리석음의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세존께서는 연기를 설하신다.
세존께서 탐욕이 강한 사람에게 자애로 이루는 마음의 해탈을 가르치신다고 하자. 혹은 더디게 알게 되는 즐거운 길이나 빠르게 알게 되는 즐거운 길을, 혹은 위빠사나를 앞세운 버림을 가르치신다고 하자. 그러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이처럼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따라 버리는 방법이 무엇이든 그렇다. 그 모두를 가려냄의 방식으로 가려낸 뒤 합치 방식으로 맞추어야 한다. 지혜가 미치는 데까지가 그 영역이다.
Yadi hi bhagavā rāgacaritassa puggalassa mettaṃ cetovimuttiṃ deseyya.
만약 세존께서 탐욕의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心解脫)을 설하신다면.
Sukhaṃ vā paṭipadaṃ dandhābhiññaṃ sukhaṃ vā paṭipadaṃ khippābhiññaṃ vipassanāpubbaṅgamaṃ vā pahānaṃ deseyya, na yujjati desanā.
혹은 더디게 아는 즐거운 도닦음이나 빠르게 아는 즐거운 도닦음이나 위빳사나를 앞세운 버림을 설하신다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는다.
Evaṃ yaṃ kiñci rāgassa anulomappahānaṃ dosassa anulomappahānaṃ mohassa anulomappahānaṃ.
이와 같이 무엇이든 탐욕에 알맞은 버림, 성냄에 알맞은 버림, 어리석음에 알맞은 버림.
Sabbaṃ taṃ vicayena hārena vicinitvā yuttihārena yojetabbaṃ.
그 모두를 가려냄의 전달로 가려낸 뒤 맞음의 전달로 맞추어야 한다.
Yāvatikā ñāṇassa bhūmi.
앎의 터가 미치는 데까지.
자애로 지내는 이에게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악의가 버려져 사라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연민으로 지내는 이에게 해치려는 마음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해치려는 마음이 버려져 사라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함께 기뻐함으로 지내는 이에게 불쾌함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불쾌함이 버려져 사라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평정으로 지내는 이에게 탐욕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탐욕이 버려져 사라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Mettāvihārissa sato byāpādo cittaṃ pariyādāya ṭhassatīti na yujjati desanā, byāpādo pahānaṃ abbhatthaṃ gacchatīti yujjati desanā.
자애에 머무는 이에게 악의가 마음을 사로잡고 머물 것이라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악의가 버려져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Karuṇāvihārissa sato vihesā cittaṃ pariyādāya ṭhassatīti na yujjati desanā, vihesā pahānaṃ abbhatthaṃ gacchatīti yujjati desanā.
연민에 머무는 이에게 해침이 마음을 사로잡고 머물 것이라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해침이 버려져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Muditā vihārissa sato arati cittaṃ pariyādāya ṭhassatīti na yujjati desanā, arati pahānaṃ abbhatthaṃ gacchatīti yujjati desanā.
함께 기뻐함에 머무는 이에게 싫증이 마음을 사로잡고 머물 것이라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싫증이 버려져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Upekkhāvihārissa sato rāgo cittaṃ pariyādāya ṭhassatīti na yujjati desanā, rāgo pahānaṃ abbhatthaṃ gacchatīti yujjati desanā.
평온에 머무는 이에게 탐욕이 마음을 사로잡고 머물 것이라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탐욕이 버려져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표상 없음으로 지내는 이에게 의식이 이런저런 표상을 따라 일어난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표상이 버려져 사라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Animittavihārissa sato nimittānusārī tena teneva viññāṇaṃ pavattatīti na yujjati desanā, nimittaṃ pahānaṃ abbhatthaṃ gacchatīti yujjati desanā.
표상 없음에 머무는 이에게 표상을 따라가며 이것저것으로 의식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표상이 버려져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 사라졌고, 나는 ‘이것이 나다’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에게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있는가’ 하는 의심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문다고 하자. 이 의심이 곧 의혹의 화살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의심과 의혹의 화살이 버려져 사라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불확실]
Asmīti vigataṃ ayamahamasmīti na samanupassāmi.
‘나는 있다’는 것은 사라졌고, ‘이것이 나다’라고 나는 여기지 않는다.
Atha ca pana me kismīti kathasmīti vicikicchā kathaṃkathāsallaṃ cittaṃ pariyādāya ṭhassatīti na yujjati desanā, vicikicchā kathaṃkathāsallaṃ pahānaṃ abbhatthaṃ gacchatīti yujjati desanā.
그런데도 나에게 ‘무엇에 있는가’, ‘어떻게 있는가’ 하는 의심과 망설임의 화살이 마음을 사로잡고 머물 것이라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의심과 망설임의 화살이 버려져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맞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첫째 선정에 든 이에게 욕망의 탐욕과 악의가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사유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둘째 선정에 든 이에게 사유와 숙고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평정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셋째 선정에 든 이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평정과 마음챙김의 청정이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Yathā vā pana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sato kāmarāgabyāpād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또는 초선에 든 이에게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과 악의가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Vitakk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일으킨 생각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Du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sato vitakkavicār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제2선에 든 이에게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Upekkhāsukh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평온과 즐거움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Tatiyaṃ jhānaṃ samāpannassa sato pītisukh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upekkhāsatipārisuddhi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제3선에 든 이에게 희열과 즐거움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으며, 혹은 평온과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넷째 선정에 든 이에게 평정이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허공이 끝없는 경지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허공이 끝없는 경지에 든 이에게 물질이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의식이 끝없는 경지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의식이 끝없는 경지에 든 이에게 허공이 끝없는 경지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Catutthaṃ jhānaṃ samāpannassa sato upekkhā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제4선에 든 이에게 평온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Ākāsānañcāyatan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허공이 무한한 경지를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Ākāsānañcāyatanaṃ samāpannassa sato rūp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허공이 무한한 경지에 든 이에게 물질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Viññāṇañcāyatan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의식이 무한한 경지를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Viññāṇañcāyatanaṃ samāpannassa sato ākāsānañc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의식이 무한한 경지에 든 이에게 허공이 무한한 경지를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아무것도 없는 경지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든 이에게 의식이 끝없는 경지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인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경지가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인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경지에 든 이에게 인식의 영역이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 인식과 느낌의 소멸이 함께하는 인식과 마음기울임이 퇴보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불확실]
Ākiñcaññāyatan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Ākiñcaññāyatanaṃ samāpannassa sato viññāṇañcāyatanasahagatā saññāmanasik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든 이에게 의식이 무한한 경지를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를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āpannassa sato saññūpacār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hān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든 이에게 인식의 다가섬이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sahagatā vā saññāmanasikārā hānāya saṃvattantīti na yujjati desanā, visesāya saṃvattantīti yujjati desanā.
혹은 인식과 느낌의 소멸을 지닌 인식과 마음 기울임이 물러남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향상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은 맞는다.
마음이 유연함에 익숙한데도 향해 기울임을 견디지 못한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지 않다. 마음이 유연함에 익숙하며 또 향해 기울임을 견딘다고 하면 그 가르침은 맞다.[불확실]
Kallatāparicitaṃ cittaṃ na ca abhinīhāraṃ khamatīti na yujjati desanā, kallatāparicitaṃ cittaṃ atha ca abhinīhāraṃ khamatīti yujjati desanā.
다루기 좋게 익은 마음이 지향을 견디지 못한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고, 다루기 좋게 익은 마음이 그러고도 지향을 견딘다는 가르침은 맞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이처럼 아홉 경 모두를 법대로, 율대로, 스승의 가르침대로, 모든 면에서 가려냄의 방식으로 가려낸다. 그런 뒤 합치 방식으로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마하깟짜야나 존자는 ‘모든 방식의 터전이 되는 것과 활동 범위는 …’이라고 말했다. 합치 방식을 마친다.
Evaṃ sabbe navasuttantā yathādhammaṃ yathāvinayaṃ yathāsatthusāsanaṃ sabbato vicayena hārena vicinitvā yuttihārena yojetabbāti.
이와 같이 아홉 갈래 경 모두를 법에 맞게, 율에 맞게, 스승의 가르침에 맞게, 온갖 면에서 가려냄의 전달로 가려낸 뒤 맞음의 전달로 맞추어야 한다.
Tenāha āyasmā mahākaccāyano ‘‘sabbesaṃ hārānaṃ yā bhūmi yo ca gocaro tesa’’nti.
그래서 마하깟짜야나 존자는 “모든 전달들의 터가 되는 것과 그것들의 영역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Niyutto yutti hāro.
맞음의 전달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