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Chachakkasuttaṃ
6. 여섯씩 여섯 경
42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숲,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Evaṃ me sutaṃ –
나는 이렇게 들었다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bhikkhavo’’ti.
“비구들이여.”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비구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겠다. 이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 뜻을 갖추었고 표현도 갖추었다. 온전하고 완전하며 청정한 수행의 삶을 드러내 보이는 법이다. 그것은 이러하다. 여섯씩 여섯 묶음이다. 잘 듣고 마음에 새겨라. 이제 말하겠다.”[불확실]
‘‘dhammaṃ vo, bhikkhave, desessāmi ādikalyāṇaṃ majjhekalyāṇaṃ pariyosānakalyāṇaṃ sātthaṃ sabyañjanaṃ, kevalaparipuṇṇaṃ parisuddhaṃ brahmacariyaṃ pakāsessāmi, yadidaṃ –
“비구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겠다 —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뜻과 표현을 갖춘 법을. 온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그 삶을 드러내리라. 그것은 곧[불확실]
불확실 —
cha chakkāni.
여섯씩 여섯이다.
Taṃ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그것을 들어라, 마음을 잘 기울여라.
bhāsissāmī’’ti.
이제 말하리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세존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예,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안의 감각 영역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 밖의 감각 영역 여섯 가지도 알아야 한다. 인식의 무리, 접촉의 무리, 느낌의 무리, 갈애의 무리도 각각 여섯 가지씩 알아야 한다.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 cha phassakāyā veditabbā, cha vedanākāyā veditabbā,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접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421
“‘안의 감각 영역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의 영역, 귀의 영역, 코의 영역, 혀의 영역, 몸의 영역, 마음의 영역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여섯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여섯이다.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 —
iti kho panetaṃ vuttaṃ.
이렇게 말했다.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Cakkhāyatanaṃ, sotāyatanaṃ, ghānāyatanaṃ, jivhāyatanaṃ, kāyāyatanaṃ, manāyatanaṃ.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코의 감각장소, 혀의 감각장소, 몸의 감각장소, 마음의 감각장소이다.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Idaṃ paṭhamaṃ chakkaṃ.
이것이 첫 번째 여섯이다.
“‘밖의 감각 영역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형상의 영역, 소리의 영역, 냄새의 영역, 맛의 영역, 감촉의 영역, 마음의 대상의 영역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여섯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여섯이다.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 —
iti kho panetaṃ vuttaṃ.
이렇게 말했다.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Rūpāyatanaṃ, saddāyatanaṃ, gandhāyatanaṃ, rasāyatanaṃ, phoṭṭhabbāyatanaṃ, dhammāyatanaṃ.
형색의 감각장소, 소리의 감각장소, 냄새의 감각장소, 맛의 감각장소, 감촉의 감각장소, 법의 감각장소이다.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한다’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Idaṃ dutiyaṃ chakkaṃ.
이것이 두 번째 여섯이다.
“‘인식의 무리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인식이 생긴다.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인식이 생기고,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인식이 생긴다.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인식이 생기고,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인식이 생긴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 인식이 생긴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여섯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여섯이다.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kho panetaṃ vuttaṃ.
이렇게 말했다.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고,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기고,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생기고,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생기고,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긴다.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의식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Idaṃ tatiyaṃ chakkaṃ.
이것이 세 번째 여섯이다.
“‘접촉의 무리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인식이 생긴다.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도 접촉이다.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인식이 생긴다. 이 셋이 만나는 것도 접촉이다.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도 접촉이다.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인식이 생긴다. 이 셋이 만나는 것도 접촉이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도 접촉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여섯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네 번째 여섯이다.
‘‘‘Cha phassa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접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kho panetaṃ vuttaṃ.
이렇게 말했다.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Cha phassa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접촉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Idaṃ catutthaṃ chakkaṃ.
이것이 네 번째 여섯이다.
“‘느낌의 무리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여섯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여섯이다.
‘‘‘Cha vedanā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kho panetaṃ vuttaṃ.
이렇게 말했다.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Cha vedanā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느낌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Idaṃ pañcamaṃ chakkaṃ.
이것이 다섯 번째 여섯이다.
“‘갈애의 무리 여섯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을 두고 한 말인가?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그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귀, 코, 혀, 몸의 경우도 같다. 각각 그 대상을 조건으로 인식이 생기고, 접촉과 느낌을 거쳐 갈애에 이른다.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마음의 인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 접촉이 된다. 그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그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여섯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것이 여섯 번째 여섯이다.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kho panetaṃ vuttaṃ.
이렇게 말했다.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pe…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1.49에서 되살렸습니다.
‘Cha taṇhākāyā veditabbā’ti –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를 알아야 한다’ —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Idaṃ chaṭṭhaṃ chakkaṃ.
이것이 여섯 번째 여섯이다.
422
“‘눈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눈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눈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눈은 자아가 아니다.
‘‘‘Cakkhu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눈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Cakkhu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눈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cakkhu attā’ti yo vadeyya.
‘눈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cakkhu anattā.
이와 같이 눈은 자아가 아니다.
“‘형상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형상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형상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눈도, 형상도 자아가 아니다.
‘‘‘Rūp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형색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Rūpānaṃ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형색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rūpā attā’ti yo vadeyya.
‘형색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이와 같이 눈도 자아가 아니고, 형색도 자아가 아니다.
“‘눈의 인식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눈의 인식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눈의 인식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눈도, 형상도, 눈의 인식도 자아가 아니다.
‘‘‘Cakkhu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눈의 의식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Cakkhuviññāṇ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눈의 의식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cakkhu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눈의 의식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이와 같이 눈도 자아가 아니고, 형색도 자아가 아니며, 눈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다.
“‘눈의 접촉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눈의 접촉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눈의 접촉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눈도, 형상도, 눈의 인식도, 눈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다.
‘‘‘Cakkhusamphasso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눈의 접촉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Cakkhusamphass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눈의 접촉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cakkhusamphasso attā’ti yo vadeyya.
‘눈의 접촉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이와 같이 눈도 자아가 아니고, 형색도 자아가 아니며, 눈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고, 눈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다.
“‘느낌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느낌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느낌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눈도, 형상도, 눈의 인식도, 눈의 접촉도, 느낌도 자아가 아니다.
‘‘‘Vedan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느낌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Vedan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느낌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vedanā attā’ti yo vadeyya.
‘느낌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이와 같이 눈도 자아가 아니고, 형색도 자아가 아니며, 눈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고, 눈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며, 느낌도 자아가 아니다.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눈도, 형상도, 눈의 인식도, 눈의 접촉도, 느낌도, 갈애도 자아가 아니다.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갈애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갈애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갈애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cakkhu anattā, rūpā anattā, cakkhuviññāṇaṃ anattā, cakkhu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이와 같이 눈도 자아가 아니고, 형색도 자아가 아니며, 눈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고, 눈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며, 느낌도 자아가 아니고, 갈애도 자아가 아니다.
423
“‘귀가 자아다’, ‘코가 자아다’, ‘혀가 자아다’, ‘몸이 자아다’, ‘마음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모든 말은 타당하지 않다. 마음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Sotaṃ attā’ti yo vadeyya…pe… ‘ghānaṃ attā’ti yo vadeyya… ‘jivhā attā’ti yo vadeyya… ‘kāyo attā’ti yo vadeyya… ‘mano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귀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코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혀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몸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음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2.1에서 되살렸습니다.
Man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마음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mano attā’ti yo vadeyya.
‘마음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mano anattā.
이와 같이 마음은 자아가 아니다.
“‘마음의 대상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마음의 대상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의 대상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자아가 아니다.
‘‘‘Dhamm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법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Dhammānaṃ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법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dhammā attā’ti yo vadeyya.
‘법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이와 같이 마음도 자아가 아니고, 법도 자아가 아니다.
“‘마음의 인식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마음의 인식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의 인식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마음의 인식도 자아가 아니다.
‘‘‘Mano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마음의 의식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Manoviññāṇ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마음의 의식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manoviññāṇaṃ attā’ti yo vadeyya.
‘마음의 의식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이와 같이 마음도 자아가 아니고, 법도 자아가 아니며, 마음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다.
“‘마음의 접촉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마음의 접촉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마음의 접촉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마음의 인식도, 마음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다.
‘‘‘Manosamphasso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마음의 접촉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Manosamphassass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마음의 접촉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manosamphasso attā’ti yo vadeyya.
‘마음의 접촉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이와 같이 마음도 자아가 아니고, 법도 자아가 아니며, 마음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고, 마음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다.
“‘느낌이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느낌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느낌이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마음의 인식도, 마음의 접촉도, 느낌도 자아가 아니다.
‘‘‘Vedan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느낌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Vedan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느낌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vedanā attā’ti yo vadeyya.
‘느낌이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이와 같이 마음도 자아가 아니고, 법도 자아가 아니며, 마음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고, 마음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며, 느낌도 자아가 아니다.
“‘갈애가 자아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타당하지 않다. 갈애에는 생겨남도 사라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드러난다면 이런 결론이 되고 만다. ‘나의 자아가 생기고 또 사라진다.’ 그러므로 갈애가 자아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마음도, 마음의 대상도, 마음의 인식도, 마음의 접촉도, 느낌도, 갈애도 자아가 아니다.
‘‘‘Taṇhā attā’ti yo vadeyya taṃ na upapajjati.
“‘갈애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Taṇhāy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갈애의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난다.
Yassa kho pana uppādopi vayopi paññāyati, ‘attā me uppajjati ca veti cā’ti iccassa evamāgataṃ hoti.
그런데 일어남도 사라짐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나의 자아가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결론이 이렇게 따라 나온다.
Tasmā taṃ na upapajjati –
그러므로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
‘taṇhā attā’ti yo vadeyya.
‘갈애가 자아다’라고 누가 말한다면.
Iti mano anattā, dhammā anattā, manoviññāṇaṃ anattā, manosamphasso anattā, vedanā anattā, taṇhā anattā.
이와 같이 마음도 자아가 아니고, 법도 자아가 아니며, 마음의 의식도 자아가 아니고, 마음의 접촉도 자아가 아니며, 느낌도 자아가 아니고, 갈애도 자아가 아니다.
424
“비구들이여, 자기 존재의 생겨남으로 이끄는 길은 이러하다. 눈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 나이며,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본다. 형상, 눈의 인식, 눈의 접촉, 느낌, 갈애도 하나하나 그렇게 본다. 귀, 코, 혀, 몸도 각각 그렇게 본다. 마음, 마음의 대상, 마음의 인식, 마음의 접촉, 느낌, 갈애도 각각 그렇게 본다.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samudayagāminī paṭipadā –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것이 존재더미의 일어남으로 이끄는 도닦음이다 —
cakkh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rūp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형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cakkhuviññāṇ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눈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cakkhusamphass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눈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ved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taṇ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sot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pe… ghā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pe… jiv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pe… kāy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pe… m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dhamme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manoviññāṇ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manosamphass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vedan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taṇha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samanupassati.
귀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소리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귀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귀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코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냄새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코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코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혀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맛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혀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혀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몸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감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몸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몸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마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고, 법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며, 마음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고, 마음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며,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기고,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여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4.2 ~ PN:mn148/424.7에서 되살렸습니다.
“비구들이여, 자기 존재의 사라짐으로 이끄는 길은 이러하다. 눈을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본다. 형상, 눈의 인식, 눈의 접촉, 느낌, 갈애도 하나하나 그렇게 본다. 귀, 코, 혀, 몸도 각각 그렇게 본다. 마음, 마음의 대상, 마음의 인식, 마음의 접촉, 느낌, 갈애도 각각 그렇게 본다.
‘‘Ayaṃ kho pana, bhikkhave, sakkāyanirodhagāminī paṭipadā –
“그런데 비구들이여, 이것이 존재더미의 소멸로 이끄는 도닦음이다 —
cakkhu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Rūpe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형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Cakkhu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눈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Cakkhusamphass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눈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Ved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Taṇh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So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pe… ghā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jivh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kāy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m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귀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소리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귀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귀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코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냄새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코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코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혀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맛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혀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혀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몸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감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몸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몸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마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4.10 ~ PN:mn148/424.15에서 되살렸습니다.
Dhamme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법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Manoviññāṇ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마음의 의식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Manosamphass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마음의 접촉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Vedan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느낌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Taṇh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samanupassati.
갈애를 두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긴다.
425
비구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식이 생겨난다.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난다. 즐거운 느낌일 수도, 괴로운 느낌일 수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 수도 있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반기며 거기에 매달려 머문다. 그러면 탐욕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으면 슬퍼하고 지쳐서 탄식한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정신을 잃고 헤맨다. 그러면 적의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으면 그 느낌이 어떻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달콤함과 허물,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면 무명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는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자. 괴로운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을 몰아내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게 무명을 버리지 않고 밝은 앎을 일으키지 않은 채, 바로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끝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비구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은 채로 기뻐하고 반기고 붙들어 머문다.
Tassa rāgānusayo anuseti.
그에게 탐욕의 잠재 성향이 잠재한다.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괴로운 느낌에 닿은 채로 슬퍼하고 지치고 비탄하며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혼미에 빠진다.
Tassa paṭighānusayo anuseti.
그에게 적의의 잠재 성향이 잠재한다.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은 채로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Tassa avijjānusayo anuseti.
그에게 무명의 잠재 성향이 잠재한다.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ap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ap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asamūhanitvā avijjaṃ appahāya vijjaṃ an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 성향을 버리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 성향을 몰아내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지 않고, 무명을 버리지 않고 명지를 일으키지 않고서 지금 여기서 괴로움을 끝내는 자가 되리라는 것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그런 도리는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식이 생겨난다.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식이,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식이,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식이 생겨난다.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식도 생겨난다.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난다. 즐거운 느낌일 수도, 괴로운 느낌일 수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 수도 있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반기며 거기에 매달려 머문다. 그러면 탐욕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으면 슬퍼하고 지쳐서 탄식한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으며 정신을 잃고 헤맨다. 그러면 적의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으면 그 느낌이 어떻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알지 못한다. 그 달콤함과 허물,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면 무명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는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자. 괴로운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을 몰아내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게 무명을 버리지 않고 밝은 앎을 일으키지 않은 채, 바로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끝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Sotañca, bhikkhave,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pe… ghānañca, bhikkhave,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pe… jivhañca, bhikkhave,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pe… kāyañca, bhikkhave,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pe… manañca, bhikkhave,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비구들이여,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5.1에서 되살렸습니다.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은 채로 기뻐하고 반기고 붙들어 머문다.
Tassa rāgānusayo anuseti.
그에게 탐욕의 잠재 성향이 잠재한다.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socati kilamati paridevati urattāḷiṃ kandati sammohaṃ āpajjati.
괴로운 느낌에 닿은 채로 슬퍼하고 지치고 비탄하며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혼미에 빠진다.
Tassa paṭighānusayo anuseti.
그에게 적의의 잠재 성향이 잠재한다.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은 채로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Tassa avijjānusayo anuseti.
그에게 무명의 잠재 성향이 잠재한다.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ap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ap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asamūhanitvā avijjaṃ appahāya vijjaṃ an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 성향을 버리지 않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 성향을 몰아내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지 않고, 무명을 버리지 않고 명지를 일으키지 않고서 지금 여기서 괴로움을 끝내는 자가 되리라는 것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그런 도리는 있지 않다.
426
비구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식이 생겨난다.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난다. 즐거운 느낌일 수도, 괴로운 느낌일 수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 수도 있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아도 기뻐하지 않고 반기지 않으며 거기에 매달려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탐욕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도 슬퍼하거나 지쳐 하거나 탄식하지 않는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지도, 정신을 잃고 헤매지도 않는다. 그러면 적의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지 않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으면 그 느낌이 어떻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안다. 그 달콤함과 허물,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러면 무명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렸다고 하자. 괴로운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을 몰아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았다고 하자. 그렇게 무명을 버리고 밝은 앎을 일으켜서, 바로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끝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다.[불확실]
‘‘Cakkhuñca, bhikkhave,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비구들이여,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은 채로 기뻐하지 않고 반기지 않고 붙들어 머물지 않는다.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그에게 탐욕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괴로운 느낌에 닿은 채로 슬퍼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비탄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혼미에 빠지지 않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Tassa paṭighānusayo nānuseti.
그에게 적의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은 채로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그에게 무명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samūhanitvā avijjaṃ pahāya vijjaṃ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 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 성향을 몰아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 여기서 괴로움을 끝내는 자가 되리라는 것 —
ṭhānametaṃ vijjati.
그런 도리는 있다.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식이 생겨난다. 이하는 앞에서와 같다. 비구들이여,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식이 생겨난다. 이하는 앞에서와 같다. 비구들이여,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식이 생겨난다. 이하는 앞에서와 같다. 비구들이여,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식이 생겨난다. 이하는 앞에서와 같다.
‘‘Sotañca, bhikkhave,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pe….
비구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6.1에서 되살렸습니다.
‘‘Ghānañca, bhikkhave,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ghānaviññāṇaṃ…pe….
비구들이여,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6.1에서 되살렸습니다.
‘‘Jivhañca, bhikkhave, paṭicca rase ca uppajjati jivhāviññāṇaṃ…pe….
비구들이여,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6.1에서 되살렸습니다.
‘‘Kāyañca, bhikkhave,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kāyaviññāṇaṃ…pe….
비구들이여,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6.1에서 되살렸습니다.
비구들이여,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식이 생겨난다.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난다. 즐거운 느낌일 수도, 괴로운 느낌일 수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일 수도 있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아도 기뻐하지 않고 반기지 않으며 거기에 매달려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탐욕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지 않는다. 괴로운 느낌에 닿아도 슬퍼하거나 지쳐 하거나 탄식하지 않는다. 가슴을 치고 울부짖지도, 정신을 잃고 헤매지도 않는다. 그러면 적의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지 않는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으면 그 느낌이 어떻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안다. 그 달콤함과 허물, 거기서 벗어나는 길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러면 무명의 잠재성향이 그를 따라붙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즐거운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을 버렸다고 하자. 괴로운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을 몰아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을 뿌리 뽑았다고 하자. 그렇게 무명을 버리고 밝은 앎을 일으켜서, 바로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끝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다.
‘‘Manañca, bhikkhave,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uppajjati vedayitaṃ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비구들이여, 마음과 법을 조건으로 마음의 의식이 생기고, 이 셋이 만나는 것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껴진 것이 생기니,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So 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은 채로 기뻐하지 않고 반기지 않고 붙들어 머물지 않는다.
Tassa rāgānusayo nānuseti.
그에게 탐욕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ḷiṃ kandati na sammohaṃ āpajjati.
괴로운 느낌에 닿은 채로 슬퍼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비탄하지 않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지 않고 혼미에 빠지지 않는다.
Tassa paṭighānusayo nānuseti.
그에게 적의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Adukkhamasu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tassā vedanāya samudayañca atthaṅgamañca assādañca ādīnavañca nissaraṇañca yathābhūtaṃ pajānā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은 채로 그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Tassa avijjānusayo nānuseti.
그에게 무명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지 않는다.
So vata, bhikkhave, sukhāya vedanāya rāgānusayaṃ pahāya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aṃ samūhanitvā avijjaṃ pahāya vijjaṃ uppādetvā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bhavissatīti –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 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 성향을 몰아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무명의 잠재 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켜서 지금 여기서 괴로움을 끝내는 자가 되리라는 것 —
ṭhānametaṃ vijjati.
그런 도리는 있다.
427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법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는 눈에 싫증을 낸다. 형색과 눈의식, 눈의 접촉에도 싫증을 낸다. 느낌에도, 갈애에도 싫증을 낸다. 귀에 싫증을 내고 소리에도 싫증을 낸다.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에도 마찬가지로 싫증을 낸다. 마음과 법에도 싫증을 낸다. 마음의식과 마음의 접촉에도 싫증을 낸다. 느낌에도, 갈애에도 싫증을 낸다. 이렇게 싫증을 내어 탐욕이 옅어지고, 탐욕이 사라져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앎이 생긴다. 그리하여 이렇게 안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마쳤고, 더는 이런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cakkhusmiṃ nibbindati, rūpesu nibbindati, cakkhuviññāṇe nibbindati, cakkhu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아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눈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색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눈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눈의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갈애를 싫어하여 떠난다.
Sotasmiṃ nibbindati, saddesu nibbindati…pe… ghānasmiṃ nibbindati, gandhesu nibbindati… jivhāya nibbindati, rasesu nibbindati… kāyasmiṃ nibbindati, phoṭṭhabbesu nibbindati… manasmiṃ nibbindati, dhammesu nibbindati, manoviññāṇe nibbindati, manosamphasse nibbindati, vedanāya nibbindati, taṇhāya nibbindati.
귀를 싫어하여 떠나고, 소리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귀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귀의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갈애를 싫어하여 떠난다. 코를 싫어하여 떠나고, 냄새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코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코의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갈애를 싫어하여 떠난다. 혀를 싫어하여 떠나고, 맛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혀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혀의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갈애를 싫어하여 떠난다. 몸을 싫어하여 떠나고, 감촉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몸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몸의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갈애를 싫어하여 떠난다. 마음을 싫어하여 떠나고, 법들을 싫어하여 떠나고, 마음의 의식을 싫어하여 떠나고, 마음의 접촉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갈애를 싫어하여 떠난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MN 148:427.1에서 되살렸습니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싫어하여 떠나 탐욕이 사라지고, 그 사라짐으로 해탈한다.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해탈할 때 ‘해탈했다’는 앎이 일어난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다 살았으며, 할 일은 마쳤고, 다시는 이런 상태로 오지 않는다’라고 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겼다. 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예순 명 남짓한 비구들의 마음이 집착 없이 번뇌에서 벗어났다. 여섯의 여섯 경이 끝났다. 여섯 번째.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ā te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비구들은 크게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받들었다.
Imasmiṃ kho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saṭṭhimatt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그리고 이 설명이 설해지는 동안 예순 명쯤 되는 비구들의 마음이 취착 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Chachakkasuttaṃ niṭṭhitaṃ chaṭṭhaṃ.
「여섯씩 여섯 경」이 끝났다. 여섯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