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Pāsādikasuttaṃ
6. 빠사디까 경
164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사꺄족의 땅에 머물고 계셨다. 베단냐라는 사꺄 사람들의 망고 숲 누각이었다.
Evaṃ me sutaṃ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
ekaṃ samayaṃ bhagavā sakkesu viharati vedhaññā nāma sakyā, tesaṃ ambavane pāsāde.
한때 세존께서 사꺄족들 가운데 머무셨으니, 웨단냐라는 이름의 사꺄족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망고 숲에 있는 저택에서였다.
니간타 나타뿟따의 죽음Nigaṇṭhanāṭaputtakālaṅkiriyā
그때 니간타 나따뿟따가 빠와에서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죽자 니간타들은 둘로 갈라졌다. 그들은 다투고 싸우고 말다툼을 벌이며 서로 말의 창으로 찔러 댔다.
Tena kho pana samayena nigaṇṭho nāṭaputto pāvāyaṃ adhunākālaṅkato hoti.
그 무렵 니간타 나타뿟따가 빠와에서 얼마 전에 죽었다.
Tassa kālaṅkiriyāya bhinnā nigaṇṭhā dvedhikajātā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ṃ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anti –
그가 죽자 니간타들은 갈라져 둘로 나뉘었고, 다툼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논쟁에 빠져, 서로를 입의 창으로 찌르며 지냈다 —
“너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네가 어찌 이 법과 율을 알겠는가? 너는 그릇된 길을 가고 있고,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 내 말은 앞뒤가 맞고, 네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먼저 말할 것을 나중에 말하고, 나중에 말할 것을 먼저 말했다.
‘‘na tvaṃ imaṃ dhammavinayaṃ ājānāsi, ahaṃ imaṃ dhammavinayaṃ ājānāmi, kiṃ tvaṃ imaṃ dhammavinayaṃ ājānissasi?
“너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네가 어떻게 이 법과 율을 알겠는가?
Micchāpaṭipanno tvamasi, ahamasmi sammāpaṭipanno.
너는 그릇되게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Sahitaṃ me, asahitaṃ te.
내 말은 조리 있고, 네 말은 조리 없다.
Purevacanīyaṃ pacchā avaca, pacchāvacanīyaṃ pure avaca.
먼저 말해야 할 것을 너는 나중에 말했고, 나중에 말해야 할 것을 너는 먼저 말했다.
네가 오래 익힌 것은 뒤집혔다. 네 주장에는 흠이 잡혔다. 너는 논박당했다. 어서 가서 그 주장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라. 할 수 있다면 풀어 보아라.” 나따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 사이에서는 오직 서로를 해치는 일만 벌어지는 듯했다.
Adhiciṇṇaṃ te viparāvattaṃ, āropito te vādo, niggahito tvamasi, cara vādappamokkhāya, nibbeṭhehi vā sace pahosī’’ti.
네가 익혀 온 것은 뒤집혔고, 네 주장은 논박당했고, 너는 제압당했다. 네 주장을 구해 내려거든 돌아다녀라, 아니면 할 수 있거든 풀어 보아라.”
Vadhoyeva kho maññe nigaṇṭhesu nāṭaputtiyesu vattati.
생각건대 나타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 사이에서는 오직 살육만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따뿟따의 재가 제자인 흰옷 입은 사람들도 니간타 나따뿟따의 무리에게 싫증을 내고 정이 떨어져 등을 돌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은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했다.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었다. 탑이 무너진 듯 의지할 곳도 없었다.
Yepi nigaṇṭhassa nāṭaputtassa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tepi nigaṇṭhesu nāṭaputtiyesu nibbinnarūpā virattarūpā paṭivānarūpā, yathā taṃ durakkhāte dhammavinaye duppavedite aniyyānike anupasamasaṃvattanike asammāsambuddhappavedite bhinnathūpe appaṭisaraṇe.
니간타 나타뿟따의 제자들 가운데 흰옷 입은 재가자들까지도 나타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에게 넌더리를 내고 마음이 떠나고 등을 돌렸으니,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고 탑이 무너지고 의지할 곳 없는 법과 율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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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빠와에서 안거를 마친 사미 춘다가 사마마을로 아난다 존자를 찾아갔다. 그는 아난다 존자에게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아 말씀드렸다.
Atha kho cundo samaṇuddeso pāvāyaṃ vassaṃvuṭṭho yena sāmagāmo, yenāyasmā ānando tenupasaṅkami;
그때 빠와에서 안거를 지낸 사미 쭌다가 사마가마로, 아난다 존자께로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āyasmantaṃ ānand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다가가서 아난다 존자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o kho cundo samaṇuddeso āyasmantaṃ ānandaṃ etadavoca –
한쪽에 앉은 사미 쭌다는 아난다 존자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
“존자님, 니간타 나따뿟따가 얼마 전 빠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자 니간타들은 둘로 갈라져 다투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탑이 무너진 듯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nigaṇṭho, bhante, nāṭaputto pāvāyaṃ adhunākālaṅkato.
“존자시여, 니간타 나타뿟따가 빠와에서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Tassa kālaṅkiriyāya bhinnā nigaṇṭhā dvedhikajātā…pe… bhinnathūpe appaṭisaraṇe’’ti.
그가 죽자 니간타들은 갈라져 둘로 나뉘었고, 다툼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논쟁에 빠져, 서로를 입의 창으로 찌르며 지냅니다 — ‘너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네가 어떻게 이 법과 율을 알겠는가? 너는 그릇되게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내 말은 조리 있고, 네 말은 조리 없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을 너는 나중에 말했고, 나중에 말해야 할 것을 너는 먼저 말했다. 네가 익혀 온 것은 뒤집혔고, 네 주장은 논박당했고, 너는 제압당했다. 네 주장을 구해 내려거든 돌아다녀라, 아니면 할 수 있거든 풀어 보아라.’ 생각건대 나타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 사이에서는 오직 살육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니간타 나타뿟따의 제자들 가운데 흰옷 입은 재가자들까지도 나타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에게 넌더리를 내고 마음이 떠나고 등을 돌렸으니,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고 탑이 무너지고 의지할 곳 없는 법과 율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64.5 ~ PN:dn29/164.12에서 되살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난다 존자가 사미 춘다에게 말했다. “벗 춘다여, 이것은 세존을 뵙고 전할 만한 이야기일세. 세존께 가세. 가서 이 일을 말씀드리세.”
Evaṃ vutte, āyasmā ānando cundaṃ samaṇuddesaṃ etadavoca –
이렇게 말하자, 아난다 존자가 사미 쭌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
‘‘atthi kho idaṃ, āvuso cunda, kathāpābhataṃ bhagavantaṃ dassanāya.
“벗 쭌다여, 이것은 세존을 뵈러 갈 만한 이야깃거리다.
Āyāmāvuso cunda,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ssāma;
벗 쭌다여, 가자, 세존께로 다가가자.
upasaṅkamitvā etamatthaṃ bhagavato ārocessāmā’’ti.
다가가서 이 일을 세존께 아뢰자.”
사미 춘다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님.”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함께 세존을 찾아갔다.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자, 아난다 존자가 말씀드렸다.[불확실]
‘‘Evaṃ, bhante’’ti kho cundo samaṇuddeso āyasmato ānandassa paccassosi.
“예, 존자시여” 하고 사미 쭌다는 아난다 존자께 대답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tha kho āyasmā ca ānando cundo ca samaṇuddes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su;
그때 아난다 존자와 사미 쭌다는 세존께로 다가갔다.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ṃsu.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
한쪽에 앉은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여기 사미 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님, 니간타 나따뿟따가 얼마 전 빠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자 니간타들은 둘로 갈라져 다투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탑이 무너진 듯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ayaṃ, bhante, cundo samaṇuddeso evamāha, ‘nigaṇṭho, bhante, nāṭaputto pāvāyaṃ adhunākālaṅkato, tassa kālaṅkiriyāya bhinnā nigaṇṭhā…pe… bhinnathūpe appaṭisaraṇe’’’ti.
“세존이시여, 여기 이 사미 쭌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시여, 니간타 나타뿟따가 빠와에서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니간타들은 갈라져 둘로 나뉘었고, 다툼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논쟁에 빠져, 서로를 입의 창으로 찌르며 지냅니다 — 「너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네가 어떻게 이 법과 율을 알겠는가? 너는 그릇되게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내 말은 조리 있고, 네 말은 조리 없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을 너는 나중에 말했고, 나중에 말해야 할 것을 너는 먼저 말했다. 네가 익혀 온 것은 뒤집혔고, 네 주장은 논박당했고, 너는 제압당했다. 네 주장을 구해 내려거든 돌아다녀라, 아니면 할 수 있거든 풀어 보아라.」 생각건대 나타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 사이에서는 오직 살육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니간타 나타뿟따의 제자들 가운데 흰옷 입은 재가자들까지도 나타뿟따를 따르는 니간타들에게 넌더리를 내고 마음이 떠나고 등을 돌렸으니,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고 탑이 무너지고 의지할 곳 없는 법과 율에 대해서 그러하듯이.’”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64.5 ~ PN:dn29/164.12에서 되살렸습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닌 법과 율Asammāsambuddhappaveditadhammavin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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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다야, 법과 율이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진 경우가 있다. 그 법과 율이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닐 때에는 으레 이렇게 된다.
‘‘Evaṃ hetaṃ, cunda, hoti durakkhāte dhammavinaye duppavedite aniyyānike anupasamasaṃvattanike asammāsambuddhappavedite.
“쭌다여,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닌 법과 율에서는 참으로 그러하다.
춘다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아니다. 그 법도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한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제자가 그 법에서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걷지 않는다. 그는 그 법에서 벗어나 살아간다. 이런 제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Idha, cunda, satthā ca hoti asammāsambuddho, dhammo ca durakkhāto duppavedito aniyyāniko anupasamasaṃvattaniko asammāsambuddhappavedito, sāvako ca tasmiṃ dhamme na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ti na sāmīcippaṭipanno na anudhammacārī, vokkamma ca tamhā dhammā vattati.
쭌다여, 여기 스승은 바르게 깨닫지 못한 자이고, 법은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며, 제자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지 않고, 법을 따라 살지 않으며, 그 법에서 벗어나 지낸다.
So evamassa vacanīyo –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벗이여, 그대에게는 손해이고 그대는 얻은 것이 없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아니다. 그 법도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한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대는 그 법에서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걷지 않고 벗어나 살아간다.’
‘tassa te, āvuso, lābhā, tassa te suladdhaṃ, satthā ca te asammāsambuddho, dhammo ca durakkhāto duppavedito aniyyāniko anupasamasaṃvattaniko asammāsambuddhappavedito.
‘벗이여, 그대에게는 이득이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닫지 못한 자이고, 법은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다.
Tvañca tasmiṃ dhamme na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si, na sāmīcippaṭipanno, na anudhammacārī, vokkamma ca tamhā dhammā vattasī’ti.
그런데 그대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지 않고, 법을 따라 살지 않으며, 그 법에서 벗어나 지낸다.’
춘다야, 이 경우 스승도 비난받을 만하고 법도 비난받을 만하다. 제자는 이렇게 칭찬받을 만하다. 춘다야, 이런 제자에게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존자는 스승이 가르치고 정해 준 법대로 실천하시오.’
Iti kho, cunda, satthāpi tattha gārayho, dhammopi tattha gārayho, sāvako ca tattha evaṃ pāsaṃso.
쭌다여, 이렇게 해서 거기서는 스승도 비난받을 만하고, 법도 비난받을 만하지만, 제자는 그렇게 칭찬받을 만하다.
Yo kho, cunda, evarūpaṃ sāvakaṃ evaṃ vadeyya –
쭌다여, 그런 제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
‘etāyasmā tathā paṭipajjatu, yathā te satthārā dhammo desito paññatto’ti.
‘존자는 그대의 스승이 법을 설하고 정해 놓은 그대로 실천하기를.’
이렇게 권하는 사람, 권함을 받는 사람, 권함을 받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모두 많은 허물을 쌓는다.
Yo ca samādapeti, yañca samādapeti, yo ca samādapito tathattāya paṭipajjati.
그리고 그렇게 권하는 자, 권함을 받는 자, 권함을 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자,
Sabbe te bahuṃ apuññaṃ pasavanti.
그들 모두는 많은 악덕을 쌓는다.
왜 그런가? 춘다야, 법과 율이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법과 율은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다. 이런 때에는 으레 이렇게 된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ṃ hetaṃ, cunda, hoti durakkhāte dhammavinaye duppavedite aniyyānike anupasamasaṃvattanike asammāsambuddhappavedite.
쭌다여,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닌 법과 율에서는 참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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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춘다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아니다. 그 법도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한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제자는 그 법에서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걸으며 그 법을 받아 지니고 살아간다. 이런 제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Idha pana, cunda, satthā ca hoti asammāsambuddho, dhammo ca durakkhāto duppavedito aniyyāniko anupasamasaṃvattaniko asammāsambuddhappavedito, sāvako ca tasmiṃ dhamme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ti sāmīcippaṭipanno anudhammacārī, samādāya taṃ dhammaṃ vattati.
“쭌다여, 그런데 여기 스승은 바르게 깨닫지 못한 자이고, 법은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지만, 제자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고, 올바로 실천하고, 법을 따라 살며, 그 법을 받아 지녀 지낸다.
So evamassa vacanīyo –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벗이여, 그대에게는 손해이고 그대는 얻은 것이 없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아니다. 그 법도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한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다. 그런 법에서 그대는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걸으며 그 법을 받아 지니고 살아간다.’
‘tassa te, āvuso, alābhā, tassa te dulladdhaṃ, satthā ca te asammāsambuddho, dhammo ca durakkhāto duppavedito aniyyāniko anupasamasaṃvattaniko asammāsambuddhappavedito.
‘벗이여, 그대에게는 손해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닫지 못한 자이고, 법은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니다.
Tvañca tasmiṃ dhamme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si sāmīcippaṭipanno anudhammacārī, samādāya taṃ dhammaṃ vattasī’ti.
그런데 그대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고, 올바로 실천하고, 법을 따라 살며, 그 법을 받아 지녀 지낸다.’
춘다야, 이 경우 스승도 비난받을 만하고 법도 비난받을 만하다. 제자도 이렇게 비난받을 만하다. 춘다야, 이런 제자에게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존자는 바른 도리를 따라 걷고 있으니 틀림없이 바른 도리를 이룰 것이오.’
Iti kho, cunda, satthāpi tattha gārayho, dhammopi tattha gārayho, sāvakopi tattha evaṃ gārayho.
쭌다여, 이렇게 해서 거기서는 스승도 비난받을 만하고, 법도 비난받을 만하고, 제자도 그렇게 비난받을 만하다.
Yo kho, cunda, evarūpaṃ sāvakaṃ evaṃ vadeyya –
쭌다여, 그런 제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
‘addhāyasmā ñāyappaṭipanno ñāyamārādhessatī’ti.
‘존자는 참으로 바른 방법을 따라 실천하니 그 방법을 이루어 낼 것이다.’
이렇게 칭찬하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 칭찬을 받고 더욱 힘써 정진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모두 많은 허물을 쌓는다.
Yo ca pasaṃsati, yañca pasaṃsati, yo ca pasaṃsito bhiyyoso mattāya vīriyaṃ ārabhati.
그리고 그렇게 칭찬하는 자, 칭찬을 받는 자, 칭찬을 받아 더욱더 정진에 힘쓰는 자,
Sabbe te bahuṃ apuññaṃ pasavanti.
그들 모두는 많은 악덕을 쌓는다.
왜 그런가? 춘다야, 법과 율이 잘못 설명되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법과 율은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도 아니다. 이런 때에는 으레 이렇게 된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etaṃ, cunda, hoti durakkhāte dhammavinaye duppavedite aniyyānike anupasamasaṃvattanike asammāsambuddhappavedite.
쭌다여, 잘못 설해지고 잘못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이끌지 못하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 아닌 법과 율에서는 참으로 그러하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법과 율Sammāsambuddhappaveditadhammavin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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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춘다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자가 그 법에서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걷지 않는다. 그는 그 법에서 벗어나 살아간다. 이런 제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Idha pana, cunda, satthā ca hoti sammāsambuddho,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sāvako ca tasmiṃ dhamme na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ti, na sāmīcippaṭipanno, na anudhammacārī, vokkamma ca tamhā dhammā vattati.
“쭌다여, 그런데 여기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지만, 제자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지 않고, 법을 따라 살지 않으며, 그 법에서 벗어나 지낸다.
So evamassa vacanīyo –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벗이여, 그대에게는 손해이고 그대는 얻은 것이 없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대는 그 법에서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걷지 않고 벗어나 살아간다.’
‘tassa te, āvuso, alābhā, tassa te dulladdhaṃ, satthā ca te sammāsambuddho,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벗이여, 그대에게는 손해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안된 일이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다.
Tvañca tasmiṃ dhamme na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si, na sāmīcippaṭipanno, na anudhammacārī, vokkamma ca tamhā dhammā vattasī’ti.
그런데 그대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지 않고, 올바로 실천하지 않고, 법을 따라 살지 않으며, 그 법에서 벗어나 지낸다.’
춘다야, 이 경우 스승도 칭찬받을 만하고 법도 칭찬받을 만하다. 제자는 이렇게 비난받을 만하다. 춘다야, 이런 제자에게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존자는 스승이 가르치고 정해 준 법대로 실천하시오.’
Iti kho, cunda, satthāpi tattha pāsaṃso, dhammopi tattha pāsaṃso, sāvako ca tattha evaṃ gārayho.
쭌다여, 이렇게 해서 거기서는 스승도 칭찬받을 만하고, 법도 칭찬받을 만하지만, 제자는 그렇게 비난받을 만하다.
Yo kho, cunda, evarūpaṃ sāvakaṃ evaṃ vadeyya –
쭌다여, 그런 제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
‘etāyasmā tathā paṭipajjatu yathā te satthārā dhammo desito paññatto’ti.
‘존자는 그대의 스승이 법을 설하고 정해 놓은 그대로 실천하기를.’
이렇게 권하는 사람, 권함을 받는 사람, 권함을 받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모두 많은 공덕을 쌓는다.
Yo ca samādapeti, yañca samādapeti, yo ca samādapito tathattāya paṭipajjati.
그리고 그렇게 권하는 자, 권함을 받는 자, 권함을 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자,
Sabbe te bahuṃ puññaṃ pasavanti.
그들 모두는 많은 공덕을 쌓는다.
왜 그런가? 춘다야, 법과 율이 잘 설명되고 잘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법과 율은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다. 이런 때에는 으레 이렇게 된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etaṃ, cunda, hoti svākkhāte dhammavinaye suppavedite niyyānike upasamasaṃvattanike sammāsambuddhappavedite.
쭌다여,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법과 율에서는 참으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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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춘다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자는 그 법에서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걸으며 그 법을 받아 지니고 살아간다. 이런 제자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Idha pana, cunda, satthā ca hoti sammāsambuddho,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sāvako ca tasmiṃ dhamme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ti sāmīcippaṭipanno anudhammacārī, samādāya taṃ dhammaṃ vattati.
“쭌다여, 그런데 여기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며, 제자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고, 올바로 실천하고, 법을 따라 살며, 그 법을 받아 지녀 지낸다.
So evamassa vacanīyo –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벗이여, 그대에게는 이익이고 그대는 잘 얻었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법에서 그대는 법에 맞는 길, 마땅한 길, 법을 따르는 행을 걸으며 그 법을 받아 지니고 살아간다.’
‘tassa te, āvuso, lābhā, tassa te suladdhaṃ, satthā ca te sammāsambuddho,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벗이여, 그대에게는 이득이다, 그대에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다. 그대의 스승은 바르게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다.
Tvañca tasmiṃ dhamme dhammānudhammappaṭipanno viharasi sāmīcippaṭipanno anudhammacārī, samādāya taṃ dhammaṃ vattasī’ti.
그런데 그대는 그 법에서 법을 법답게 따라 실천하며 머물고, 올바로 실천하고, 법을 따라 살며, 그 법을 받아 지녀 지낸다.’
춘다야, 이 경우 스승도 칭찬받을 만하고 법도 칭찬받을 만하다. 제자도 이렇게 칭찬받을 만하다. 춘다야, 이런 제자에게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존자는 바른 도리를 따라 걷고 있으니 틀림없이 바른 도리를 이룰 것이오.’
Iti kho, cunda, satthāpi tattha pāsaṃso, dhammopi tattha pāsaṃso, sāvakopi tattha evaṃ pāsaṃso.
쭌다여, 이렇게 해서 거기서는 스승도 칭찬받을 만하고, 법도 칭찬받을 만하고, 제자도 그렇게 칭찬받을 만하다.
Yo kho, cunda, evarūpaṃ sāvakaṃ evaṃ vadeyya –
쭌다여, 그런 제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
‘addhāyasmā ñāyappaṭipanno ñāyamārādhessatī’ti.
‘존자는 참으로 바른 방법을 따라 실천하니 그 방법을 이루어 낼 것이다.’
이렇게 칭찬하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 칭찬을 받고 더욱 힘써 정진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모두 많은 공덕을 쌓는다.
Yo ca pasaṃsati, yañca pasaṃsati, yo ca pasaṃsito bhiyyoso mattāya vīriyaṃ ārabhati.
그리고 그렇게 칭찬하는 자, 칭찬을 받는 자, 칭찬을 받아 더욱더 정진에 힘쓰는 자,
Sabbe te bahuṃ puññaṃ pasavanti.
그들 모두는 많은 공덕을 쌓는다.
왜 그런가? 춘다야, 법과 율이 잘 설명되고 잘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법과 율은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온전히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다. 이런 때에는 으레 이렇게 된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Evañhetaṃ, cunda, hoti svākkhāte dhammavinaye suppavedite niyyānike upasamasaṃvattanike sammāsambuddhappavedite.
쭌다여,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법과 율에서는 참으로 그러하다.
제자들이 애석해할 스승Sāvakānutappasatthu
170
또 춘다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승이 아라한이자 바르게 깨달은 분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른 법의 뜻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온전하고 완전한 청정한 삶이 그들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환히 밝혀지지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로 정리되지도 않았다. 불가사의한 힘을 갖추어 보이지도, 하늘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스승이 사라진다.[불확실]
‘‘Idha pana, cunda, satthā ca loke udapādi arahaṃ sammāsambuddho,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aviññāpitatthā cassa honti sāvakā saddhamme, na ca tes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āvikataṃ hoti uttānīkataṃ sabbasaṅgāhapadakataṃ sappāṭihīraka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쭌다여, 그런데 여기 스승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아라한이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인데, 그의 제자들은 바른 법에서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에게 온전하고 원만한 청정한 삶이 드러나지도 밝혀지지도 않았고, 모든 요목이 갖추어 모아지지도 않았고, 확실한 근거를 갖추지도 못했으며, 신과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기에 이르지도 못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tha nesaṃ satthuno antaradhānaṃ hoti.
그러고서 그들의 스승이 사라진다.
춘다야, 이런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은 뒤늦게 뉘우치며 괴로워한다. 왜 그런가?
Evarūpo kho, cunda, satthā sāvakānaṃ kālaṅkato anutappo hoti.
쭌다여, 이런 스승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이 애석해할 스승이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이렇게 후회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승은 아라한이자 바르게 깨달은 분으로 세상에 나오셨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바른 법의 뜻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온전하고 완전한 청정한 삶이 우리에게 드러나지도, 환히 밝혀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로 정리되지도, 불가사의한 힘을 갖추어 보이지도 않았다. 하늘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리의 스승께서 사라지셨다.’[불확실]
Satthā ca no loke udapādi arahaṃ sammāsambuddho,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aviññāpitatthā camha saddhamme, na ca no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āvikataṃ hoti uttānīkataṃ sabbasaṅgāhapadakataṃ sappāṭihīraka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우리의 스승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아라한이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인데, 우리는 바른 법에서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우리에게 온전하고 원만한 청정한 삶이 드러나지도 밝혀지지도 않았고, 모든 요목이 갖추어 모아지지도 않았고, 확실한 근거를 갖추지도 못했으며, 신과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기에 이르지도 못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tha no satthuno antaradhānaṃ hotīti.
그러고서 우리의 스승이 사라졌다.’ 하고.
춘다야, 이런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제자들은 이렇게 뒤늦게 뉘우치며 괴로워한다.
Evarūpo kho, cunda, satthā sāvakānaṃ kālaṅkato anutappo hoti.
쭌다여, 이런 스승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이 애석해할 스승이다.
제자들이 애석해하지 않을 스승Sāvakānanutappasatthu
171
그런데 춘다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스승이 아라한이자 바르게 깨달은 분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한 것이기도 하다.
‘‘Idha pana, cunda, satthā ca loke udapādi arahaṃ sammāsambuddho.
“쭌다여, 그런데 여기 스승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아라한이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다.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그리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다.
제자들은 바른 법의 뜻을 깨달았다. 온전하고 완전한 청정한 삶이 그들에게 드러나고 환히 밝혀졌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로 정리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갖추어 보여, 하늘과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 그런데 그들의 스승이 사라진다.[불확실]
Viññāpitatthā cassa honti sāvakā saddhamme, kevalañca tes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āvikataṃ hoti uttānīkataṃ sabbasaṅgāhapadakataṃ sappāṭihīraka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그의 제자들은 바른 법에서 그 뜻을 알아들었고, 그들에게 온전하고 원만한 청정한 삶이 드러나고 밝혀지고, 모든 요목이 갖추어 모아지고, 확실한 근거를 갖추었으며, 신과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기에 이르렀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tha nesaṃ satthuno antaradhānaṃ hoti.
그러고서 그들의 스승이 사라진다.
춘다야, 이런 스승이 세상을 떠나도 제자들은 뉘우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Evarūpo kho, cunda, satthā sāvakānaṃ kālaṅkato ananutappo hoti.
쭌다여, 이런 스승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이 애석해하지 않을 스승이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스승은 아라한이자 바르게 깨달은 분으로 세상에 나오셨다. 그 법도 잘 설명되고 잘 전해져서,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깨달은 분이 선포하신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른 법의 뜻을 깨달았다. 온전하고 완전한 청정한 삶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환히 밝혀졌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로 정리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갖추어 보여, 하늘과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 그런데 우리의 스승께서 사라지셨다.’ 이렇게 생각하여 뉘우치지 않는다.[불확실]
Satthā ca no loke udapādi arahaṃ sammāsambuddho.
‘우리의 스승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아라한이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다.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그리고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알려지고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 알린 것이다.
Viññāpitatthā camha saddhamme, kevalañca no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āvikataṃ hoti uttānīkataṃ sabbasaṅgāhapadakataṃ sappāṭihīraka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우리는 바른 법에서 그 뜻을 알아들었고, 우리에게 온전하고 원만한 청정한 삶이 드러나고 밝혀지고, 모든 요목이 갖추어 모아지고, 확실한 근거를 갖추었으며, 신과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기에 이르렀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Atha no satthuno antaradhānaṃ hotīti.
그러고서 우리의 스승이 사라졌다.’ 하고.
춘다야, 이런 스승이 세상을 떠나도 제자들은 이렇게 뉘우치며 괴로워하지 않는다.
Evarūpo kho, cunda, satthā sāvakānaṃ kālaṅkato ananutappo hoti.
쭌다여, 이런 스승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이 애석해하지 않을 스승이다.
청정한 삶이 원만하지 못함 등에 대한 이야기Brahmacariyaaparipūrādikathā
172
쭌다여, 이런 요소들을 갖춘 청정한 수행이라 해도 스승이 장로가 아닐 수 있다. 오랜 세월의 경험이 없고, 출가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나이도 아직 많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청정한 수행은 그 점에서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쭌다여,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스승도 장로라면 어떠한가. 오랜 세월을 겪었고, 출가한 지 오래되었고, 연륜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자. 그러면 그 청정한 수행은 그 점에서 온전해진다.[불확실]
‘‘Etehi cepi, cunda, aṅgehi samannāgataṃ brahmacariyaṃ hoti, no ca kho satthā hoti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쭌다여, 설령 이러한 요소들을 갖춘 청정한 삶이 있더라도, 스승이 장로이고 오랜 세월을 아는 이이고 출가한 지 오래이고 세월의 길을 걸어온 이이고 노년에 이른 이가 아니라면,
Evaṃ taṃ brahmacariyaṃ aparipūraṃ hoti tenaṅgena.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삶은 그 요소로 인해 원만하지 못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Yato ca kho, cunda, etehi ceva aṅgehi samannāgataṃ brahmacariyaṃ hoti, satthā ca hoti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쭌다여, 그러나 청정한 삶이 바로 이러한 요소들을 갖추고, 또 스승이 장로이고 오랜 세월을 아는 이이고 출가한 지 오래이고 세월의 길을 걸어온 이이고 노년에 이른 이일 때,
Evaṃ taṃ brahmacariyaṃ paripūraṃ hoti tenaṅgena.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삶은 그 요소로 인해 원만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173
쭌다여,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스승도 장로로서 출가한 지 오래되고 연륜이 깊다고 하자. 그래도 제자인 장로 비구들이 능숙하지 못할 수 있다. 잘 다듬어지지 못했고, 자신감이 없고, 안온한 경지도 얻지 못했다고 하자. 이들이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자. 남이 일으킨 주장을 법에 맞게 꺾어 논파하지도 못하고, 그런 뒤에 경이로운 효험이 있는 법을 설하지도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청정한 수행은 그 점에서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불확실]
‘‘Etehi cepi, cunda, aṅgehi samannāgataṃ brahmacariyaṃ hoti, satthā ca hoti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no ca khvassa therā bhikkhū sāvakā honti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pattayogakkhemā.
“쭌다여, 설령 이러한 요소들을 갖춘 청정한 삶이 있고, 또 스승이 장로이고 오랜 세월을 아는 이이고 출가한 지 오래이고 세월의 길을 걸어온 이이고 노년에 이른 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장로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른 이들이 있지 않다면,
Alaṃ samakkhātuṃ saddhammassa, alaṃ uppannaṃ parappavādaṃ sahadhammehi suniggahitaṃ niggahetvā sappāṭihāriyaṃ dhammaṃ desetuṃ.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다.
Evaṃ taṃ brahmacariyaṃ aparipūraṃ hoti tenaṅgena.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삶은 그 요소로 인해 원만하지 못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쭌다여, 이런 요소들을 갖추고 스승도 장로로서 출가한 지 오래되고 연륜이 깊다고 하자. 제자인 장로 비구들도 능숙하고, 잘 다듬어졌고, 자신감이 있고, 안온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자. 이들이 바른 법을 잘 설명한다고 하자. 남이 일으킨 주장을 법에 맞게 꺾어 논파하고, 그런 뒤에 경이로운 효험이 있는 법을 설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청정한 수행은 그 점에서 온전해진다.[불확실]
‘‘Yato ca kho, cunda, etehi ceva aṅgehi samannāgataṃ brahmacariyaṃ hoti, satthā ca hoti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ther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pattayogakkhemā.
“쭌다여, 그러나 청정한 삶이 바로 이러한 요소들을 갖추고, 또 스승이 장로이고 오랜 세월을 아는 이이고 출가한 지 오래이고 세월의 길을 걸어온 이이고 노년에 이른 이이며, 그에게 장로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른 이들이 있을 때,
Alaṃ samakkhātuṃ saddhammassa, alaṃ uppannaṃ parappavādaṃ sahadhammehi suniggahitaṃ niggahetvā sappāṭihāriyaṃ dhammaṃ desetuṃ.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다.
Evaṃ taṃ brahmacariyaṃ paripūraṃ hoti tenaṅgena.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삶은 그 요소로 인해 원만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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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다여, 이런 요소들을 갖추었다고 하자. 스승도 장로로서 출가한 지 오래되고 연륜이 깊다고 하자. 장로 비구 제자들도 능숙하고, 잘 다듬어졌고, 자신감이 있고, 안온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자. 이들이 바른 법을 잘 설명한다고 하자. 남이 일으킨 주장을 법에 맞게 꺾어 논파하고, 그런 뒤에 경이로운 효험이 있는 법을 설할 수 있다고 하자.
‘‘Etehi cepi, cunda, aṅgehi samannāgataṃ brahmacariyaṃ hoti, satthā ca hoti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ther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pattayogakkhemā.
“쭌다여, 설령 이러한 요소들을 갖춘 청정한 삶이 있고, 또 스승이 장로이고 오랜 세월을 아는 이이고 출가한 지 오래이고 세월의 길을 걸어온 이이고 노년에 이른 이이며, 그에게 장로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른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Alaṃ samakkhātuṃ saddhammassa, alaṃ uppannaṃ parappavādaṃ sahadhammehi suniggahitaṃ niggahetvā sappāṭihāriyaṃ dhammaṃ desetuṃ.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다.
그런데도 중견 비구 제자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어떠한가. 이때는 중견 비구 제자들까지 그러하다는 점을 마저 갖추어야 한다. 다음은 새내기 비구 제자들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와 그러한 경우를 같은 식으로 말한다. 장로 비구니 제자들, 중견 비구니 제자들, 새내기 비구니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청정하게 수행하는 흰옷의 재가신자 제자들이 없는 경우와 있는 경우도 말한다.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흰옷의 재가신자 제자들도, 청정하게 수행하는 흰옷의 여성 재가신자 제자들도,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흰옷의 여성 재가신자 제자들도 모두 앞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 청정한 수행에 대해 말한다. 번성하고 널리 퍼져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하늘과 사람들에게까지 잘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와 그러한 경우다. 그러면서 이익과 명성이 정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자.[불확실]
No ca khvassa majjhimā bhikkhū sāvakā honti…pe… majjhim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 no ca khvassa navā bhikkhū sāvakā honti…pe… nav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 no ca khvassa therā bhikkhuniyo sāvikā honti…pe… therā cassa bhikkhuniyo sāvikā honti, no ca khvassa majjhimā bhikkhuniyo sāvikā honti…pe… majjhimā cassa bhikkhuniyo sāvikā honti, no ca khvassa navā bhikkhuniyo sāvikā honti…pe… navā cassa bhikkhuniyo sāvikā honti, no ca khvassa upāsakā sāvakā honti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pe… upāsakā cassa sāvakā honti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no ca khvassa upāsakā sāvakā honti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pe… upāsakā cassa sāvakā honti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 no ca khvassa upāsikā sāvikā honti gihiniyo odātavasanā brahmacāriniyo…pe… upāsikā cassa sāvikā honti gihiniyo odātavasanā brahmacāriniyo, no ca khvassa upāsikā sāvikā honti gihiniyo odātavasanā kāmabhoginiyo…pe… upāsikā cassa sāvikā honti gihiniyo odātavasanā kāmabhoginiyo, no ca khvassa brahmacariyaṃ hoti iddhañceva phītañca vitthārikaṃ bāhujaññaṃ puthubhū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pe… brahmacariyañcassa hoti iddhañceva phītañca vitthārikaṃ bāhujaññaṃ puthubhū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no ca kho lābhaggayasaggappattaṃ.
그런데 그에게 중진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중진 비구 제자들은 있으나 신참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신참 비구 제자들은 있으나 장로 비구니 여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장로 비구니 여제자들은 있으나 중진 비구니 여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중진 비구니 여제자들은 있으나 신참 비구니 여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신참 비구니 여제자들은 있으나 재가신자 제자들이, 재가자로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이들이면서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재가자로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신자 제자들은 있으나 재가신자 제자들이, 재가자로서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이들이면서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재가자로서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재가신자 제자들은 있으나 재가여신자 여제자들이, 재가 여인으로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이들이면서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재가 여인으로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여신자 여제자들은 있으나 재가여신자 여제자들이, 재가 여인으로서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이들이면서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이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청정한 삶이 번성하고 풍성하며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이 알고 두루 퍼져 신들과 인간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것으로 있지 않다면, 또 그에게 청정한 삶이 번성하고 풍성하며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이 알고 두루 퍼져 신들과 인간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것으로 있으나 얻음의 정점과 명성의 정점에는 이르지 못했다면,[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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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청정한 수행은 그 점에서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불확실]
Evaṃ taṃ brahmacariyaṃ aparipūraṃ hoti tenaṅgena.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삶은 그 요소로 인해 원만하지 못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쭌다여, 이런 요소들을 갖추었다고 하자. 스승도 장로로서 출가한 지 오래되고 연륜이 깊다고 하자. 장로 비구 제자들도 능숙하고, 잘 다듬어졌고, 자신감이 있고, 안온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자. 이들이 바른 법을 잘 설명한다고 하자. 남이 일으킨 주장을 법에 맞게 꺾어 논파하고, 그런 뒤에 경이로운 효험이 있는 법을 설할 수 있다고 하자.
‘‘Yato ca kho, cunda, etehi ceva aṅgehi samannāgataṃ brahmacariyaṃ hoti, satthā ca hoti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ther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pattayogakkhemā.
“쭌다여, 그러나 청정한 삶이 바로 이러한 요소들을 갖추고, 또 스승이 장로이고 오랜 세월을 아는 이이고 출가한 지 오래이고 세월의 길을 걸어온 이이고 노년에 이른 이이며, 그에게 장로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른 이들이 있을 때,
Alaṃ samakkhātuṃ saddhammassa, alaṃ uppannaṃ parappavādaṃ sahadhammehi suniggahitaṃ niggahetvā sappāṭihāriyaṃ dhammaṃ desetuṃ.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다.
중견 비구 제자들도, 새내기 비구 제자들도 그러하다고 하자. 장로 비구니 제자들도, 중견 비구니 제자들도, 새내기 비구니 제자들도 그러하다고 하자. 재가신자 제자들도 그러하여, 청정하게 수행하는 흰옷의 재가신자들이 있다고 하자.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흰옷의 재가신자 제자들도 있다고 하자. 청정하게 수행하는 흰옷의 여성 재가신자 제자들도,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흰옷의 여성 재가신자 제자들도 있다고 하자. 그 청정한 수행이 번성하고 널리 퍼져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고 하자. 하늘과 사람들에게까지 잘 드러나 있고, 이익의 정점과 명성의 정점에도 이르렀다고 하자.[불확실]
Majjhim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pe… navā cassa bhikkhū sāvakā honti…pe… therā cassa bhikkhuniyo sāvikā honti…pe… majjhimā cassa bhikkhuniyo sāvikā honti…pe… navā cassa bhikkhuniyo sāvikā honti…pe… upāsakā cassa sāvakā honti…pe…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또 그에게 중진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로 있고, 신참 비구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로 있고, 장로 비구니 여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로 있고, 중진 비구니 여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로 있고, 신참 비구니 여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로 있고, 재가신자 제자들이,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한 이들로 있어, 재가자로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이들이며,[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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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āsakā cassa sāvakā honti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pe… upāsikā cassa sāvikā honti gihiniyo odātavasanā brahmacāriniyo…pe… upāsikā cassa sāvikā honti gihiniyo odātavasanā kāmabhoginiyo…pe… brahmacariyañcassa hoti iddhañceva phītañca vitthārikaṃ bāhujaññaṃ puthubhū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lābhaggappattañca yasaggappattañca.
또 그에게 재가신자 제자들이 재가자로서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이들로 있고,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며, 재가여신자 여제자들이 재가 여인으로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이들로 있고,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며, 재가여신자 여제자들이 재가 여인으로서 흰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누리는 이들로 있고, 능숙하고 잘 배웠고 두려움 없으며 속박에서 벗어난 안온에 이르렀고, 바른 법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넉넉하고, 일어난 남의 주장을 법에 맞는 근거들로 잘 눌러 제압하고서 놀라운 힘을 지닌 법을 설하기에 넉넉하며, 그에게 청정한 삶이 번성하고 풍성하며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이 알고 두루 퍼져 신들과 인간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것으로 있고, 얻음의 정점에 이르고 명성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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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청정한 수행은 그 점에서 온전해진다.[불확실]
Evaṃ taṃ brahmacariyaṃ paripūraṃ hoti tenaṅgena.
이와 같이 그 청정한 삶은 그 요소로 인해 원만하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175
쭌다여, 나는 지금 이 세상에 나온 스승이다. 아라한이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다. 내가 밝힌 법은 잘 설해졌고 잘 드러났다. 그 법은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끈다.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이가 밝힌 법이기 때문이다. 내 제자들은 바른 법을 깨우쳤고, 그들의 청정한 수행은 온전히 갖추어졌다. 그 수행은 드러나고 분명해졌으며 모든 것을 아우른다. 기적의 힘도 갖추어서, 하늘 사람과 인간들에게 널리 잘 알려졌다.[불확실]
‘‘Ahaṃ kho pana, cunda, etarahi satthā loke uppanno arahaṃ sammāsambuddho.
“그런데 쭌다여, 나는 지금 세상에 출현한 스승이니, 아라한이고 바르게 깨달은 이다.
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그리고 법은 잘 설해졌고 잘 알려졌으며, 벗어남으로 이끌고 고요함으로 이끌며, 바르게 깨달은 이가 알린 것이다.
Viññāpitatthā ca me sāvakā saddhamme, kevalañca tes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āvikataṃ uttānīkataṃ sabbasaṅgāhapadakataṃ sappāṭihīraka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그리고 나의 제자들은 바른 법에서 그 뜻을 알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온전히 원만한 청정한 삶이 드러나고 밝혀지고 모든 요긴한 구절이 갖추어지고 설득력 있게 되어, 신과 인간들에게까지 잘 알려졌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쭌다여, 나는 지금 노년의 스승이다. 오래 지켜본 어른이고,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다. 살아갈 길을 많이 지나 나이가 들었다. 그런 나에게 지금 노련한 비구 제자들이 있다. 그들은 영리하고 잘 길들여졌으며, 두려움이 없고 안온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설명할 수 있다. 일어난 다른 이들의 주장도 법에 맞게 잘 꺾는다. 그런 다음 기적의 힘이 깃든 법을 설할 수 있다.
Ahaṃ kho pana, cunda, etarahi satthā thero rattaññū cirapabbajito addhagato vayoanuppatto.
그런데 쭌다여, 나는 지금 스승으로서 장로이고, 연륜이 깊고, 출가한 지 오래되었고, 세월이 흘렀고, 노년에 이르렀다.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therā bhikkhū sāvakā honti viyattā vinītā visāradā pattayogakkhemā.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장로 비구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Alaṃ samakkhātuṃ saddhammassa, alaṃ uppannaṃ parappavādaṃ sahadhammehi suniggahitaṃ niggahetvā sappāṭihāriyaṃ dhammaṃ desetuṃ.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지금 나에게는 중간 연배의 비구 제자들도 있고 젊은 비구 제자들도 있다. 노련한 비구니 제자들, 중간 연배의 비구니 제자들, 젊은 비구니 제자들도 있다. 흰옷의 재가 남자 신자 가운데는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들이 있고,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는 이들도 있다. 흰옷의 재가 여자 신자 가운데도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들이 있고, 욕망의 즐거움을 누리는 이들이 있다. 이들 모두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쭌다여, 지금 나의 청정한 수행은 번영하고 널리 퍼졌다.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고, 하늘 사람과 인간들에게도 널리 잘 알려졌다.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majjhimā bhikkhū sāvakā…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navā bhikkhū sāvakā…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therā bhikkhuniyo sāvikā…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majjhimā bhikkhuniyo sāvikā…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navā bhikkhuniyo sāvikā…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upāsakā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upāsakā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kāmabhogino…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upāsikā sāvikā gihiniyo odātavasanā brahmacāriniyo…pe… santi kho pana me, cunda, etarahi upāsikā sāvikā gihiniyo odātavasanā kāmabhoginiyo…pe… etarahi kho pana me, cunda, brahmacariyaṃ iddhañceva phītañca vitthārikaṃ bāhujaññaṃ puthubhūtaṃ yāva devamanussehi suppakāsitaṃ.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중진 비구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신참 비구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장로 비구니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중진 비구니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신참 비구니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흰옷 입은 재가자로서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신자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흰옷 입은 재가자로서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남자 재가신자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흰옷 입은 재가자로서 청정한 삶을 사는 여자 재가신자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런데 지금 내게는 흰옷 입은 재가자로서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여자 재가신자 제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유능하고 잘 닦였고 두려움 없고 안온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른 법을 제대로 설할 만하고, 일어난 남의 교설을 법에 맞는 말로 잘 논파하고서 설득력 있는 법을 설할 만하다. 쭌다여, 그리고 지금 내게는 청정한 삶이 번성하고 융성하고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두루 퍼져, 신과 인간들에게까지 잘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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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쭌다여, 지금 이 세상에 나온 스승들 가운데, 나만큼 이득과 명성이 으뜸에 이른 스승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또 쭌다여, 지금 이 세상에 생겨난 승가나 무리 가운데, 이 비구 승가만큼 이득과 명성이 으뜸에 이른 곳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Yāvatā kho, cunda, etarahi satthāro loke uppannā, nāhaṃ, cunda, aññaṃ ekasatthārampi samanupassāmi evaṃlābhaggayasaggappattaṃ yatharivāhaṃ.
“쭌다여, 지금 세상에 출현한 스승들이 있는 만큼, 쭌다여, 나는 나만큼 이렇게 이득과 명성의 정점에 이른 스승을 달리 하나도 보지 못한다.
Yāvatā kho pana, cunda, etarahi saṅgho vā gaṇo vā loke uppanno;
쭌다여, 그런데 지금 세상에 출현한 승가나 무리가 있는 만큼 —
nāhaṃ, cunda, aññaṃ ekaṃ saṃghampi samanupassāmi evaṃlābhaggayasaggappattaṃ yatharivāyaṃ, cunda, bhikkhusaṅgho.
쭌다여, 나는 이 비구 승가만큼 이렇게 이득과 명성의 정점에 이른 승가를 달리 하나도 보지 못한다.
쭌다여, 누군가 바르게 말하려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면을 갖추었고 모든 면에서 온전하며,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잘 설해졌다. 청정한 수행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잘 드러났다.’ 바르게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모든 면을 갖추었고…잘 드러났다.’
Yaṃ kho taṃ, cunda, sammā vadamāno vadeyya –
쭌다여, 바르게 말하는 이가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sabbākārasampannaṃ sabbākāraparipūraṃ anūnamanadhikaṃ svākkhāt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모든 면에서 갖추어졌고 모든 면에서 원만하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졌으며, 온전히 원만한 청정한 삶이 잘 알려졌다’고.
Idameva t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
바로 이것을 두고 바르게 말하는 이가 말할 것이다 —
‘sabbākārasampannaṃ…pe… suppakāsita’nti.
‘모든 면에서 갖추어졌고 모든 면에서 원만하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졌으며, 온전히 원만한 청정한 삶이 잘 알려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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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다여, 라마의 아들 우다까는 이렇게 말했다.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니, 무엇을 말하는가? 잘 갈린 면도날의 평평한 면은 보지만 그 날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한다. 쭌다여, 우다까의 이 말은 천하고 속되며 범부의 것이다.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도 없다. 게다가 그는 면도날만을 두고 한 말이었다.
‘‘Udako sudaṃ, cunda, rāmaputto evaṃ vācaṃ bhāsati –
“쭌다여, 라마의 아들 웃다까는 이런 말을 했다 —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Kiñca passaṃ na passatīti?
그러면 무엇을 보면서 보지 못하는가?
Khurassa sādhunisitassa talamassa passati, dhārañca khvassa na passati.
잘 갈린 면도칼의 몸통은 보아도, 그 날은 보지 못한다.
Idaṃ vuccati –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Yaṃ kho panetaṃ, cunda, udakena rāmaputtena bhāsitaṃ hīnaṃ gammaṃ pothujjanikaṃ anariyaṃ anatthasaṃhitaṃ khurameva sandhāya.
그런데 쭌다여, 라마의 아들 웃다까가 한 이 말은 오직 면도칼을 두고 한 것이어서, 저열하고 속되고 범부의 것이며 성스럽지 않고 이익과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쭌다여, 누군가 바르게 말하려 한다면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바르게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니,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면을 갖추었고 모든 면에서 온전하며,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잘 설해졌다. 청정한 수행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잘 드러났다.’ 이렇게 말하는 것, 이것은 본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을 덜어내면 더 깨끗해질 텐데’ 하는 것, 이것은 보지 못한다. ‘여기에 이것을 보태면 더 온전해질 텐데’ 하는 것, 이것도 보지 못한다.
Yañca taṃ, cunda, sammā vadamāno vadeyya –
그런데 쭌다여, 바르게 말하는 이가 말한다면 —
‘passaṃ na passatī’ti, idameva t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바로 이것을 두고 바르게 말하는 이가 말할 것이다 —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Kiñca passaṃ na passatīti?
그러면 무엇을 보면서 보지 못하는가?
Evaṃ sabbākārasampannaṃ sabbākāraparipūraṃ anūnamanadhikaṃ svākkhāt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iti hetaṃ passati.
‘이렇게 모든 면에서 갖추어졌고 모든 면에서 원만하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졌으며, 온전히 원만한 청정한 삶이 잘 알려졌다’고, 그는 이것을 이렇게 본다.
Idamettha apakaḍḍheyya, evaṃ taṃ parisuddhataraṃ assāti, iti hetaṃ na passati.
‘여기서 이것을 덜어내면 그것이 더 깨끗해지리라’고, 그는 이것을 이렇게 보지는 못한다.
Idamettha upakaḍḍheyya, evaṃ taṃ paripūraṃ assāti, iti hetaṃ na passati.
‘여기서 이것을 보태면 그것이 원만해지리라’고, 그는 이것을 이렇게 보지는 못한다.
쭌다여, 이것을 두고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한다. 쭌다여, 누군가 바르게 말하려 한다면 ‘모든 면을 갖추었고…청정한 수행이 잘 드러났다’고 말할 것이다. 바르게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이다. ‘모든 면을 갖추었고 모든 면에서 온전하며,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잘 설해졌다. 청정한 수행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잘 드러났다.’
Idaṃ vuccati cunda –
쭌다여,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고.
Yaṃ kho taṃ, cunda, sammā vadamāno vadeyya –
쭌다여, 바르게 말하는 이가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sabbākārasampannaṃ…pe…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모든 면에서 갖추어졌고 모든 면에서 원만하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졌으며, 온전히 원만한 청정한 삶이 잘 알려졌다’고.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76.27에서 되살렸습니다.
Idameva t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
바로 이것을 두고 바르게 말하는 이가 말할 것이다 —
‘sabbākārasampannaṃ sabbākāraparipūraṃ anūnamanadhikaṃ svākkhāt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모든 면에서 갖추어졌고 모든 면에서 원만하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졌으며, 온전히 원만한 청정한 삶이 잘 알려졌다’고.
함께 합송해야 할 법Saṅgāyitabbadhammo
177
그러므로 쭌다여, 내가 직접 알고 너희에게 설한 법들이 있다. 이 법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께 모여, 뜻은 뜻대로 표현은 표현대로 함께 외워야 한다. 다투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이 청정한 수행이 오래 이어지고 오래 머문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 된다.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하늘 사람과 인간들의 이로움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 된다. 쭌다여, 내가 직접 알고 설한 그 법들은 무엇인가? 모두가 함께 모여 뜻은 뜻대로 표현은 표현대로 외우고, 다투지 말아야 하는 법들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야 이 청정한 수행이 오래 이어지고 오래 머문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 되고,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하늘 사람과 인간들의 이로움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 된다. 그 법들은 다음과 같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네 가지 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바탕, 다섯 가지 기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 그리고 성스러운 여덟 갈래의 길이다. 쭌다여, 이것이 내가 직접 알고 설한 법들이다. 모두가 함께 모여 뜻은 뜻대로 표현은 표현대로 함께 외우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이 청정한 수행이 오래 이어지고 오래 머문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 되고,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하늘 사람과 인간들의 이로움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일이 된다.
Tasmātiha, cunda, ye vo mayā dhammā abhiññā desitā, tattha sabbeheva saṅgamma samāgamma atthena atthaṃ byañjanena byañjanaṃ saṅgāyitabbaṃ na vivaditabbaṃ,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쭌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완전히 알아 그대들에게 설한 법들에 대해서는, 거기서 모두가 함께 모이고 함께 만나 뜻은 뜻대로 표현은 표현대로 합송해야 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청정한 삶이 오래 가고 길이 이어지며, 그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며, 세상을 가엾이 여겨 신과 인간들의 목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 되도록.
Katame ca te, cunda, dhammā mayā abhiññā desitā, yattha sabbeheva saṅgamma samāgamma atthena atthaṃ byañjanena byañjanaṃ saṅgāyitabbaṃ na vivaditabbaṃ,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쭌다여, 그러면 내가 완전히 알아 설한 그 법들, 곧 거기서 모두가 함께 모이고 함께 만나 뜻은 뜻대로 표현은 표현대로 합송해야 하며 다투지 말아야 하고, 그리하여 이 청정한 삶이 오래 가고 길이 이어지며, 그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며, 세상을 가엾이 여겨 신과 인간들의 목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 되도록 하는 그 법들이란 무엇인가?
Seyyathidaṃ –
곧 이러하다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 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네 가지 바른 노력, 네 가지 성취수단, 다섯 기능, 다섯 힘, 일곱 깨달음의 요소, 성스러운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춘 길이다.
Ime kho te, cunda, dhammā mayā abhiññā desitā.
쭌다여, 이것들이 내가 완전히 알아 설한 그 법들이다.
Yattha sabbeheva saṅgamma samāgamma atthena atthaṃ byañjanena byañjanaṃ saṅgāyitabbaṃ na vivaditabbaṃ,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거기서 모두가 함께 모이고 함께 만나 뜻은 뜻대로 표현은 표현대로 합송해야 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청정한 삶이 오래 가고 길이 이어지며, 그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며, 세상을 가엾이 여겨 신과 인간들의 목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 되도록.
납득시켜야 할 방식Saññāpetabbavidhi
178
쭌다여, 너희가 화합하고 기뻐하며 다투지 않고 배우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했다. 그때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존자는 뜻을 잘못 이해하고 표현도 잘못 쓰고 있다.’ 그의 말을 기뻐하지도, 반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기뻐하지도 반박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벗이여, 이 뜻에는 이 표현들과 저 표현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알맞은가? 또 이 표현들에는 이 뜻과 저 뜻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알맞은가?’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하자. ‘벗이여, 이 뜻에는 바로 이 표현들이 더 알맞습니다. 저 표현들이 아닙니다. 또 이 표현들에는 바로 이 뜻이 더 알맞습니다. 저 뜻이 아닙니다.’ 그를 치켜세워서도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치켜세우지도 깎아내리지도 말고, 그 뜻과 그 표현들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 사람 스스로 잘 납득하게 해야 한다.[불확실]
‘‘Tesañca vo, cunda, samaggānaṃ sammodamānānaṃ avivadamānānaṃ sikkhataṃ aññataro sabrahmacārī saṅghe dhammaṃ bhāseyya.
“쭌다여, 그리고 그대들이 화합하고 서로 기뻐하며 다투지 않고 배우고 있을 때, 어떤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할 수 있다.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면 —
‘ayaṃ kho āyasmā atthañceva micchā gaṇhāti, byañjanāni ca micchā ropetī’ti.
‘이 존자는 뜻도 잘못 잡고 표현도 잘못 세운다’고.
Tassa neva abhinanditabbaṃ na paṭikkositabbaṃ, anabhinanditvā appaṭikkositvā so evamassa vacanīyo –
그에 대해 기뻐해서도 안 되고 배척해서도 안 된다. 기뻐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
‘imassa nu kho, āvuso, atthassa imāni vā byañjanāni etāni vā byañjanāni katamāni opāyikatarāni, imesañca byañjanānaṃ ayaṃ vā attho eso vā attho katamo opāyikataro’ti?
‘벗이여, 이 뜻에는 이 표현들과 저 표현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알맞습니까? 또 이 표현들에는 이 뜻과 저 뜻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알맞습니까?’라고.
So ce evaṃ vadeyya –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
‘imassa kho, āvuso, atthassa imāneva byañjanāni opāyikatarāni, yā ceva etāni;
‘벗이여, 이 뜻에는 저 표현들보다 바로 이 표현들이 더 알맞습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imesañca byañjanānaṃ ayameva attho opāyikataro, yā ceva eso’ti.
또 이 표현들에는 저 뜻보다 바로 이 뜻이 더 알맞습니다’라고.[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o neva ussādetabbo na apasādetabbo, anussādetvā anapasādetvā sveva sādhukaṃ saññāpetabbo tassa ca atthassa tesañca byañjanānaṃ nisantiyā.
그를 치켜세워서도 안 되고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치켜세우지도 깎아내리지도 않고서, 바로 그에게 그 뜻과 그 표현들을 자세히 살피도록 잘 납득시켜야 한다.
179
쭌다여, 또 다른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했다고 하자. 그때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존자는 뜻은 잘못 이해하고 있지만 표현은 바르게 쓰고 있다.’ 그의 말을 기뻐하지도, 반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기뻐하지도 반박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벗이여, 이 표현들에는 이 뜻과 저 뜻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알맞은가?’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하자. ‘벗이여, 이 표현들에는 바로 이 뜻이 더 알맞습니다. 저 뜻이 아닙니다.’ 그를 치켜세워서도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치켜세우지도 깎아내리지도 말고, 바로 그 뜻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 사람 스스로 잘 납득하게 해야 한다.[불확실]
‘‘Aparopi ce, cunda, sabrahmacārī saṅghe dhammaṃ bhāseyya.
“쭌다여, 또 다른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할 수 있다.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면 —
‘ayaṃ kho āyasmā atthañhi kho micchā gaṇhāti byañjanāni sammā ropetī’ti.
‘이 존자는 뜻은 잘못 잡지만 표현은 바르게 세운다’고.
Tassa neva abhinanditabbaṃ na paṭikkositabbaṃ, anabhinanditvā appaṭikkositvā so evamassa vacanīyo –
그에 대해 기뻐해서도 안 되고 배척해서도 안 된다. 기뻐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
‘imesaṃ nu kho, āvuso, byañjanānaṃ ayaṃ vā attho eso vā attho katamo opāyikataro’ti?
‘벗이여, 이 표현들에는 이 뜻과 저 뜻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알맞습니까?’라고.
So ce evaṃ vadeyya –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
‘imesaṃ kho, āvuso, byañjanānaṃ ayameva attho opāyikataro, yā ceva eso’ti.
‘벗이여, 이 표현들에는 저 뜻보다 바로 이 뜻이 더 알맞습니다’라고.[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o neva ussādetabbo na apasādetabbo, anussādetvā anapasādetvā sveva sādhukaṃ saññāpetabbo tasseva atthassa nisantiyā.
그를 치켜세워서도 안 되고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치켜세우지도 깎아내리지도 않고서, 바로 그에게 바로 그 뜻을 자세히 살피도록 잘 납득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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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다여, 또 다른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했다고 하자. 그때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존자는 뜻은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만 표현은 잘못 쓰고 있다.’ 그의 말을 기뻐하지도, 반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기뻐하지도 반박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벗이여, 이 뜻에는 이 표현들과 저 표현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알맞은가?’ 그가 이렇게 대답한다고 하자. ‘벗이여, 이 뜻에는 바로 이 표현들이 더 알맞습니다. 저 표현들이 아닙니다.’ 그를 치켜세워서도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치켜세우지도 깎아내리지도 말고, 바로 그 표현들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 사람 스스로 잘 납득하게 해야 한다.
‘‘Aparopi ce, cunda, sabrahmacārī saṅghe dhammaṃ bhāseyya.
“쭌다여, 또 다른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할 수 있다.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면 —
‘ayaṃ kho āyasmā atthañhi kho sammā gaṇhāti byañjanāni micchā ropetī’ti.
‘이 존자는 뜻은 바르게 잡지만 표현은 잘못 세운다’고.
Tassa neva abhinanditabbaṃ na paṭikkositabbaṃ;
그에 대해 기뻐해서도 안 되고 배척해서도 안 된다.
anabhinanditvā appaṭikkositvā so evamassa vacanīyo –
기뻐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
‘imassa nu kho, āvuso, atthassa imāni vā byañjanāni etāni vā byañjanāni katamāni opāyikatarānī’ti?
‘벗이여, 이 뜻에는 이 표현들과 저 표현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알맞습니까?’라고.
So ce evaṃ vadeyya –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
‘imassa kho, āvuso, atthassa imāneva byañjanāni opayikatarāni, yāni ceva etānī’ti.
‘벗이여, 이 뜻에는 저 표현들보다 바로 이 표현들이 더 알맞습니다’라고.
So neva ussādetabbo na apasādetabbo;
그를 치켜세워서도 안 되고 깎아내려서도 안 된다.
anussādetvā anapasādetvā sveva sādhukaṃ saññāpetabbo tesaññeva byañjanānaṃ nisantiyā.
치켜세우지도 깎아내리지도 않고서, 바로 그에게 바로 그 표현들을 자세히 살피도록 잘 납득시켜야 한다.
181
쭌다여, 또 다른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했다고 하자. 그때 너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존자는 뜻도 바르게 이해하고 표현도 바르게 쓰고 있다.’ 그가 말한 것에 대해서는 ‘훌륭합니다’ 하고 기뻐해야 한다.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기뻐한 뒤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벗이여, 우리에게는 이득이고 큰 복입니다. 뜻과 표현을 두루 갖춘 존자와 같은 동료 수행자를 우리가 만났으니 말입니다.’
‘‘Aparopi ce, cunda, sabrahmacārī saṅghe dhammaṃ bhāseyya.
“쭌다여, 또 다른 동료 수행자가 승가에서 법을 말할 수 있다.
Tatra ce tumhākaṃ evamassa –
거기서 그대들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면 —
‘ayaṃ kho āyasmā atthañceva sammā gaṇhāti byañjanāni ca sammā ropetī’ti.
‘이 존자는 뜻도 바르게 잡고 표현도 바르게 세운다’고.
Tassa ‘sādhū’ti bhāsitaṃ abhinanditabbaṃ anumoditabbaṃ;
그가 말한 것에 대해 ‘훌륭합니다’ 하고 기뻐하고 함께 기뻐해야 한다.
tassa ‘sādhū’ti bhāsitaṃ abhinanditvā anumoditvā so evamassa vacanīyo –
그가 말한 것에 대해 ‘훌륭합니다’ 하고 기뻐하고 함께 기뻐하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
‘lābhā no āvuso, suladdhaṃ no āvuso, ye mayaṃ āyasmantaṃ tādisaṃ sabrahmacāriṃ passāma evaṃ atthupetaṃ byañjanupeta’nti.
‘벗이여, 우리에게는 이득입니다. 벗이여, 우리는 참으로 잘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뜻을 갖추고 표현을 갖춘 그런 동료 수행자 존자를 뵙게 되었으니’라고.
필수품을 허락한 이유
Paccayānuññātakāraṇaṃ
필수품을 허락한 까닭
182
쭌다여, 나는 법을 설하지만, 너희가 지금 이 생에서 생기는 번뇌를 막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또 쭌다여, 다음 생에서 생길 번뇌를 없애게 하려는 것만으로 법을 설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이 생에서 생기는 번뇌를 막기 위해서도 법을 설한다. 다음 생에서 생길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도 법을 설한다.
‘‘Na vo ahaṃ, cunda, diṭṭhadhammikānaṃyeva āsavānaṃ saṃvarāya dhammaṃ desemi.
“쭌다여, 나는 그대들에게 지금 여기의 번뇌를 단속하기 위해서만 법을 설하지 않는다.
Na panāhaṃ, cunda, samparāyikānaṃyeva āsavānaṃ paṭighātāya dhammaṃ desemi.
쭌다여, 또 나는 그대들에게 다음 생의 번뇌를 물리치기 위해서만 법을 설하지 않는다.
Diṭṭhadhammikānaṃ cevāhaṃ, cunda, āsavānaṃ saṃvarāya dhammaṃ desemi;
쭌다여, 나는 지금 여기의 번뇌를 단속하기 위해서도 법을 설하고,
samparāyikānañca āsavānaṃ paṭighātāya.
다음 생의 번뇌를 물리치기 위해서도 설한다.
그러므로 쭌다여,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옷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고, 쇠파리와 모기와 바람과 햇볕과 기어 다니는 것들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탁발 음식도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며, 해침을 그치고, 청정한 수행을 돕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묵은 느낌은 없애고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겠다. 나는 몸을 이어 가고 허물없이 편안하게 지내겠다.’ 하는 뜻이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거처도 이것으로 충분하다. 추위를 막고, 더위를 막고, 쇠파리와 모기와 바람과 햇볕과 기어 다니는 것들에 닿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계절의 위험을 덜어 내어, 홀로 고요히 앉아 지내는 즐거움을 위한 것일 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한 병자를 위한 약과 필수품도 이것으로 충분하다. 생겨난 병으로 인한 느낌을 막고, 병이 없는 것을 으뜸으로 삼기 위한 것일 뿐이다.
Tasmātiha, cunda, yaṃ vo mayā cīvaraṃ anuññātaṃ, alaṃ vo taṃ –
쭌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그대들에게 허락한 가사, 그것은 그대들에게 이만하면 된다 —
yāvadeva sītassa paṭighātāya, uṇhassa paṭighātāya, ḍaṃsamakasavātātapasarīsapa samphassānaṃ paṭighātāya, yāvadeva hirikopīnapaṭicchādanatthaṃ.
오직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등에와 모기와 바람과 햇볕과 기어다니는 것들의 닿음을 물리치기 위해, 오직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Yo vo mayā piṇḍapāto anuññāto, alaṃ vo so yāvadeva imassa kāyassa ṭhitiyā yāpanāya vihiṃsūparatiyā brahmacariyānuggahāya, iti purāṇañca vedanaṃ paṭihaṅkhāmi, navañca vedanaṃ na uppādessāmi, yātrā ca me bhavissati anavajjatā ca phāsuvihāro ca.
내가 그대들에게 허락한 탁발 음식, 그것은 그대들에게 이만하면 된다 — 오직 이 몸을 지탱하고 이어가기 위해, 해침을 그치기 위해, 청정한 삶을 돕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렇게 나는 예전의 느낌을 물리치고 새로운 느낌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내게 살아감이 있고 허물없음이 있고 편안한 머묾이 있으리라’고.
Yaṃ vo mayā senāsanaṃ anuññātaṃ, alaṃ vo taṃ yāvadeva sītassa paṭighātāya, uṇhassa paṭighātāya, ḍaṃsamakasavātātapasarīsapasamphassānaṃ paṭighātāya, yāvadeva utuparissayavinodana paṭisallānārāmatthaṃ.
내가 그대들에게 허락한 거처, 그것은 그대들에게 이만하면 된다 — 오직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등에와 모기와 바람과 햇볕과 기어다니는 것들의 닿음을 물리치기 위해, 오직 철 따라 닥치는 위험을 없애고 홀로 앉기를 즐기기 위해서일 뿐이다.
Yo vo mayā gilānapaccayabhesajja parikkhāro anuññāto, alaṃ vo so yāvadeva uppannānaṃ veyyābādhikānaṃ vedanānaṃ paṭighātāya abyāpajjaparamatāya.
내가 그대들에게 허락한 병자를 위한 약과 필수품, 그것은 그대들에게 이만하면 된다 — 오직 이미 생긴 괴롭히는 느낌들을 물리치기 위해, 괴롭힘 없음을 지극히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즐거움에 몰두함Sukhallikānuyogo
183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캬의 아들을 따르는 사문들은 안락함에 빠져 지낸다.’ 그렇게 말하는 유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벗이여, 안락함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안락함에 빠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갖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파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sukhallikānuyogamanuyuttā samaṇā sakyaputtiyā viharantī’ti.
‘사꺄의 아들인 사문들은 즐거움에 몰두하며 지낸다’고.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파의 유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katamo so, āvuso, sukhallikānuyogo?
‘벗이여, 그 즐거움에 몰두함이란 어떤 것인가?
Sukhallikānuyogā hi bahū anekavihitā nānappakārakā’ti.
즐거움에 몰두함은 많고 여러 가지이며 갖가지이기 때문이다’라고.
쭌다여, 안락함에 빠지는 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것들은 천하고 속되며, 범부의 것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로움이 없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남으로도, 욕망이 빛을 잃음으로도, 소멸로도, 고요함으로도 이끌지 못한다. 직접 앎으로도, 깨달음으로도, 열반으로도 이끌지 못한다. 그 네 가지는 무엇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어리석은 이는 생명을 거듭 죽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이것이 안락함에 빠지는 첫째 길이다. 쭌다여, 또 어떤 이는 주지 않은 것을 거듭 가지면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이것이 안락함에 빠지는 둘째 길이다. 쭌다여, 또 어떤 이는 거짓말을 거듭 하면서 스스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이것이 안락함에 빠지는 셋째 길이다. 쭌다여, 또 어떤 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푹 잠겨 그것을 갖추고 즐긴다. 이것이 안락함에 빠지는 넷째 길이다. 쭌다여, 이 네 가지 안락함에 빠지는 길은 천하고 속되며, 범부의 것이고 성스럽지 못하며 이로움이 없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남으로도, 욕망이 빛을 잃음으로도, 소멸로도, 고요함으로도 이끌지 못한다. 직접 앎으로도, 깨달음으로도, 열반으로도 이끌지 못한다.
‘‘Cattārome, cunda, sukhallikānuyogā hīnā gammā pothujjanikā anariyā anatthasaṃhitā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nti.
“쭌다여, 이 네 가지 즐거움에 몰두함은 저열하고 속되고 범부의 것이며 성스럽지 않고 이익과 이어지지 않아, 싫어하여 떠남으로도, 탐욕이 사라짐으로도, 소멸로도, 고요함으로도, 완전한 앎으로도, 깨달음으로도, 열반으로도 이끌지 못한다.
Katame cattāro?
무엇이 넷인가?
‘‘Idha, cunda, ekacco bālo pāṇe vadhitvā vadhitvā attānaṃ sukheti pīṇeti.
“쭌다여, 여기 어떤 미련한 자는 생명들을 거듭 죽여 자기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한다.
Ayaṃ paṭham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Puna caparaṃ, cunda, idhekacco adinnaṃ ādiyitvā ādiyitvā attānaṃ sukheti pīṇeti.
“쭌다여, 또 여기 어떤 이는 주지 않은 것을 거듭 취하여 자기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한다.
Ayaṃ dutiy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Puna caparaṃ, cunda, idhekacco musā bhaṇitvā bhaṇitvā attānaṃ sukheti pīṇeti.
“쭌다여, 또 여기 어떤 이는 거듭 거짓을 말하여 자기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한다.
Ayaṃ tatiy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Puna caparaṃ, cunda, idhekacco pañcahi kāmaguṇehi samappito samaṅgībhūto paricāreti.
“쭌다여, 또 여기 어떤 이는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의 대상을 갖추고 지니고서 즐긴다.
Ayaṃ catutth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네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Ime kho, cunda, cattāro sukhallikānuyogā hīnā gammā pothujjanikā anariyā anatthasaṃhitā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nti.
“쭌다여, 이것들이 네 가지 즐거움에 몰두함이니, 저열하고 속되고 범부의 것이며 성스럽지 않고 이익과 이어지지 않아, 싫어하여 떠남으로도, 탐욕이 사라짐으로도, 소멸로도, 고요함으로도, 완전한 앎으로도, 깨달음으로도, 열반으로도 이끌지 못한다.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캬의 아들을 따르는 사문들은 이 네 가지 안락함에 빠지는 길에 몰두하며 지낸다.’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바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있지도 않고 사실도 아닌 것으로 너희를 헐뜯는 것이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파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ime cattāro sukhallikānuyoge anuyuttā samaṇā sakyaputtiyā viharantī’ti.
‘사꺄의 아들인 사문들은 이 네 가지 즐거움에 몰두함에 몰두하며 지낸다’고.
Te vo ‘māhevaṃ’ tissu vacanīyā.
그들에게 그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Na te vo sammā vadamānā vadeyyuṃ, abbhācikkheyyuṃ asatā abhūtena.
그들은 그대들을 두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며, 있지도 않고 사실도 아닌 것으로 헐뜯는 것이다.
184
쭌다여, 안락함을 누리는 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이것들은 오롯이 싫어하여 떠남으로, 욕망이 빛을 잃음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이끈다. 직접 앎으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그 네 가지는 무엇인가? 쭌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에서 멀리 떠나고 해로운 상태들에서 멀리 떠난다. 그리하여 거친 생각과 미세한 살핌이 있고, 떠남에서 생긴 기쁨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안락함을 누리는 첫째 길이다. 쭌다여, 또 비구는 거친 생각과 미세한 살핌이 가라앉아…두 번째 선정을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안락함을 누리는 둘째 길이다. 쭌다여, 또 비구는 기쁨이 빛을 잃어…세 번째 선정을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안락함을 누리는 셋째 길이다. 쭌다여, 또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려…네 번째 선정을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안락함을 누리는 넷째 길이다. 쭌다여, 이 네 가지 안락함을 누리는 길은 오롯이 싫어하여 떠남으로, 욕망이 빛을 잃음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이끈다. 직접 앎으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불확실]
‘‘Cattārome, cunda, sukhallikānuyogā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nti.
“쭌다여, 이 네 가지 즐거움에 몰두함은 오로지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욕이 사라짐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앎으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Katame cattāro?
무엇이 넷인가?
‘‘Idha, cunda,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쭌다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나쁘고 해로운 법들을 떠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침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1선에 들어 머문다.
Ayaṃ paṭham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Puna caparaṃ, cunda,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pe…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쭌다여, 또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하고 마음이 한곳으로 모이며, 일으킨 생각이 없고 지속적 고찰이 없으며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에 들어 머문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84.3에서 되살렸습니다.
Ayaṃ dutiy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Puna caparaṃ, cunda, bhikkhu pītiyā ca virāgā…pe…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쭌다여, 또 비구는 희열이 엷어져 평온에 머물며, 마음을 챙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느끼는 제3선에 들어 머문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84.3에서 되살렸습니다.
Ayaṃ tatiy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Puna caparaṃ, cunda,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pe…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쭌다여, 또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려, 이전에 이미 기쁨과 불만이 사라졌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 평온으로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에 들어 머문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84.3에서 되살렸습니다.
Ayaṃ catuttho sukhallikānuyogo.
이것이 네 번째 즐거움에 몰두함이다.
‘‘Ime kho, cunda, cattāro sukhallikānuyogā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nti.
“쭌다여, 이것들이 네 가지 즐거움에 몰두함이니, 오로지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욕이 사라짐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앎으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캬의 아들을 따르는 사문들은 이 네 가지 안락함을 누리는 길에 몰두하며 지낸다.’ 그들에게는 ‘그렇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바르게 말하는 것이다. 있지도 않고 사실도 아닌 것으로 너희를 헐뜯는 것이 아니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파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ime cattāro sukhallikānuyoge anuyuttā samaṇā sakyaputtiyā viharantī’ti.
‘사꺄의 아들인 사문들은 이 네 가지 즐거움에 몰두함에 몰두하며 지낸다’고.
Te vo ‘evaṃ’ tissu vacanīyā.
그들에게 그대들은 ‘그렇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Sammā te vo vadamānā vadeyyuṃ, na te vo abbhācikkheyyuṃ asatā abhūtena.
그들은 그대들을 두고 바르게 말하는 것이며, 있지도 않고 사실도 아닌 것으로 그대들을 헐뜯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을 좇는 닦음의 이로움Sukhallikānuyogānisaṃso
185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벗들이여, 안락을 좇는 이 네 가지 수행에 몰두하며 사는 이들은 어떤 결실과 어떤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들이여, 이들은 네 가지 결실과 네 가지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 넷은 이러하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ime panāvuso, cattāro sukhallikānuyoge anuyuttānaṃ viharataṃ kati phalāni katānisaṃsā pāṭikaṅkhā’ti?
‘그런데 벗들이여, 이 네 가지 즐거움을 좇는 닦음에 전념하며 머무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 결실과 몇 가지 이로움이 기대되는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ime kho, āvuso, cattāro sukhallikānuyoge anuyuttānaṃ viharataṃ cattāri phalāni cattāro ānisaṃsā pāṭikaṅkhā.
‘벗들이여, 이 네 가지 즐거움을 좇는 닦음에 전념하며 머무는 이들에게는 네 가지 결실과 네 가지 이로움이 기대된다.
Katame cattāro?
무엇이 넷인가?
벗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결박이 완전히 끊어져 수다원이 된다. 그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지니고, 깨달음을 향해 확고히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것이 첫째 결실이고 첫째 이익이다.
Idhāvuso, bhikkhu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ho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
벗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가 다하여 흐름에 든 이가 된다 —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깨달음으로 정해져 나아가는 이다.
Idaṃ paṭhamaṃ phalaṃ, paṭhamo ānisaṃso.
이것이 첫 번째 결실이요 첫 번째 이로움이다.
또 벗들이여, 비구는 세 가지 결박이 끊어지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 사다함이 된다. 그는 이 세상에 단 한 번만 돌아와서 괴로움을 끝낸다. 이것이 둘째 결실이고 둘째 이익이다.
Puna caparaṃ, āvuso, bhikkhu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rāgadosamohānaṃ tanuttā sakadāgāmī hoti, sakideva imaṃ lokaṃ āgantvā dukkhassantaṃ karoti.
또한 벗들이여, 비구는 세 가지 족쇄가 다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 한 번 돌아오는 이가 되어, 이 세상에 한 번만 와서 괴로움의 끝을 짓는다.
Idaṃ dutiyaṃ phalaṃ, dutiyo ānisaṃso.
이것이 두 번째 결실이요 두 번째 이로움이다.
또 벗들이여, 비구는 낮은 단계의 다섯 가지 결박이 끊어져 화생하는 자가 된다. 그는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고, 그 세상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셋째 결실이고 셋째 이익이다.
Puna caparaṃ, āvuso, bhikkhu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또한 벗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다하여 홀연히 태어나는 이가 되어, 거기서 완전한 열반에 들며 그 세상에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지닌다.
Idaṃ tatiyaṃ phalaṃ, tatiyo ānisaṃso.
이것이 세 번째 결실이요 세 번째 이로움이다.
또 벗들이여, 비구는 번뇌가 다한다. 그는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통찰지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뛰어난 앎으로 직접 체험하고 이루어 머문다. 이것이 넷째 결실이고 넷째 이익이다. 벗들이여, 안락을 좇는 이 네 가지 수행에 몰두하며 사는 이들은 이러한 네 가지 결실과 네 가지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Puna caparaṃ, āvuso,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또한 벗들이여, 비구는 번뇌가 다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지금 여기서 스스로 깨달아 실현하고, 그것을 이루어 머문다.
Idaṃ catutthaṃ phalaṃ catuttho ānisaṃso.
이것이 네 번째 결실이요 네 번째 이로움이다.
Ime kho, āvuso, cattāro sukhallikānuyoge anuyuttānaṃ viharataṃ imāni cattāri phalāni, cattāro ānisaṃsā pāṭikaṅkhā’’ti.
벗들이여, 이 네 가지 즐거움을 좇는 닦음에 전념하며 머무는 이들에게는 이 네 가지 결실과 네 가지 이로움이 기대된다.’
번뇌 다한 이가 범할 수 없는 도리Khīṇāsavaabhabbaṭhānaṃ
186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고따마의 제자인 사문들은 법이 확고하지 못한 채 지낸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들이여, 아시고 보시는 아라한이시며 바르고 두루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생 넘어서서는 안 되는 법들을 가르치시고 정하셨다. 벗들이여, 깊이 박혀 단단히 묻힌 경계 기둥이나 쇠기둥은 흔들리지도 요동하지도 않는다. 그와 같이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생 넘어서서는 안 되는 법들을 가르치시고 정하셨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aṭṭhitadhammā samaṇā sakyaputtiyā viharantī’ti.
‘사꺄의 아들을 따르는 사문들은 굳게 선 법 없이 머문다.’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atthi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sāvakānaṃ dhammā desitā paññattā yāvajīvaṃ anatikkamanīyā.
‘벗들이여,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설하시고 정해 놓으신 법들이 있으니, 목숨이 다하도록 어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Seyyathāpi, āvuso, indakhīlo vā ayokhīlo vā gambhīranemo sunikhāto acalo asampavedhī.
벗들이여, 마치 깊이 뿌리박아 잘 묻혀서 흔들리지 않고 떨리지 않는 인다 기둥이나 쇠기둥과 같다.
Evameva kho, āvus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sāvakānaṃ dhammā desitā paññattā yāvajīvaṃ anatikkamanīyā.
벗들이여, 꼭 이와 같이, 아시고 보시는 분, 아라한,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설하시고 정해 놓으신 법들이 있으니, 목숨이 다하도록 어겨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벗들이여, 번뇌가 다한 아라한 비구는 아홉 가지 일을 저지를 수 없다. 이 비구는 수행을 마치고 할 일을 다 했다.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목적에 이르렀으며, 존재의 결박이 모두 끊어지고 바른 앎으로 해탈했다. 그런 비구는 일부러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주지 않은 것을 도둑질할 마음으로 가질 수도 없다. 성행위를 할 수 없고, 알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욕망의 대상을 쌓아 두고 누릴 수도 없다. 좋아함이나 성냄, 어리석음, 두려움에 치우쳐 행동할 수도 없다. 벗들이여, 번뇌가 다한 아라한 비구는 이 아홉 가지 일을 저지를 수 없다.’
Yo so, āvuso,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abhabbo so nava ṭhānāni ajjhācarituṃ.
벗들이여, 아라한이며 번뇌가 다하고, 삶을 다 살았고, 할 일을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자신의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르게 알아 해탈한 그 비구, 그는 아홉 가지 도리를 범할 수 없다.
Abhabbo, āvuso, khīṇāsavo bhikkhu sañcicca pāṇaṃ jīvitā voropetuṃ;
벗들이여, 번뇌 다한 비구는 고의로 산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adinnaṃ theyyasaṅkhātaṃ ādiyi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마음으로 가질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methunaṃ dhammaṃ paṭisevi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음행을 행할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mpajānamusā bhāsi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알면서 거짓을 말할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sannidhikārakaṃ kāme paribhuñjituṃ seyyathāpi pubbe āgārikabhūto;
번뇌 다한 비구는 예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 두고 감각적 욕망을 누릴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chandāgatiṃ gan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욕심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갈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dosāgatiṃ gan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미움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갈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mohāgatiṃ gan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어리석음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갈 수 없다.
abhabbo khīṇāsavo bhikkhu bhayāgatiṃ gantuṃ.
번뇌 다한 비구는 두려움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갈 수 없다.
Yo so, āvuso,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abhabbo so imāni nava ṭhānāni ajjhācaritu’’nti.
벗들이여, 아라한이며 번뇌가 다하고, 삶을 다 살았고, 할 일을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자신의 참된 이익에 이르렀고, 존재의 족쇄를 남김없이 없앴고, 바르게 알아 해탈한 그 비구, 그는 이 아홉 가지 도리를 범할 수 없다.’”
물음에 답함Pañhābyākaraṇaṃ
187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고따마 사문은 과거에 관해서는 한계 없는 앎과 봄을 말하면서, 미래에 관해서는 그런 앎과 봄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 유행자들은 어리석고 분별이 없어서, 한 가지 앎과 봄을 다른 종류의 앎과 봄으로 밝혀야 한다고 여긴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atītaṃ kho addhānaṃ ārabbha samaṇo gotamo atīrakaṃ ñāṇadassanaṃ paññapeti, no ca kho anāgataṃ addhānaṃ ārabbha atīrakaṃ ñāṇadassanaṃ paññapeti, tayidaṃ kiṃsu tayidaṃ kathaṃsū’ti?
‘사문 고따마는 과거에 대해서는 끝없는 앎과 봄을 드러내 보이면서, 미래에 대해서는 끝없는 앎과 봄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째서인가?’
Te c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aññavihitakena ñāṇadassanena aññavihitakaṃ ñāṇadassanaṃ paññapetabbaṃ maññanti yathariva bālā abyattā.
그런데 그 다른 교단 유행승들은, 마치 미련하고 서툰 자들처럼, 다른 것에 매인 앎과 봄으로 다른 것에 매인 앎과 봄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여긴다.
쭌다여, 과거에 관해서는 여래에게 기억을 따라가는 앎이 있다. 여래는 원하는 만큼 기억해 낸다. 미래에 관해서는 깨달음에서 생긴 앎이 일어난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tītaṃ kho, cunda, addhānaṃ ārabbha tathāgatassa satānusāri ñāṇaṃ hoti;
쭌다여, 과거에 대해서는 여래에게 기억을 따르는 앎이 있다.
so yāvatakaṃ ākaṅkhati tāvatakaṃ anussarati.
그는 원하는 만큼 그만큼 기억해 낸다.
Anāgatañca kho addhānaṃ ārabbha tathāgatassa bodhijaṃ ñāṇaṃ uppajjati –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여래에게 깨달음에서 생긴 앎이 일어난다 —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쭌다여, 과거의 일이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며 이익이 없다면, 여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이고 진실이어도 이익이 없다면 역시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이고 진실이며 이익이 있다면, 여래는 그 질문에 답할 때를 아는 분이다.
‘Atītaṃ cepi, cunda, hoti abhūtaṃ atacchaṃ anatthasaṃhitaṃ, na taṃ tathāgato byākaroti.
‘쭌다여, 과거의 일이 사실이 아니고 참되지 않으며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면, 여래는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Atītaṃ cepi, cund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tthasaṃhitaṃ, tampi tathāgato na byākaroti.
쭌다여, 과거의 일이 사실이고 참되지만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면, 여래는 그것도 밝히지 않는다.
Atītaṃ cepi cunda, hoti bhūtaṃ tacchaṃ atthasaṃhitaṃ, tatra kālaññū tathāgato hoti tassa pañhassa veyyākaraṇāya.
쭌다여, 과거의 일이 사실이고 참되며 이익을 주는 것이면, 여래는 그 물음에 답할 때를 안다.
쭌다여, 미래의 일이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며 이익이 없다면, 여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이고 진실이어도 이익이 없다면 같다. 사실이고 진실이며 이익이 있다면, 여래는 그 질문에 답할 때를 아는 분이다.
Anāgataṃ cepi, cunda, hoti abhūtaṃ atacchaṃ anatthasaṃhitaṃ, na taṃ tathāgato byākaroti…pe… tassa pañhassa veyyākaraṇāya.
쭌다여, 미래의 일이 사실이 아니고 참되지 않으며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면, 여래는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쭌다여, 미래의 일이 사실이고 참되지만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면, 여래는 그것도 밝히지 않는다. 쭌다여, 미래의 일이 사실이고 참되며 이익을 주는 것이면, 여래는 그 물음에 답할 때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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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다여, 현재의 일이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며 이익이 없다면, 여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이고 진실이어도 이익이 없다면 역시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이고 진실이며 이익이 있다면, 여래는 그 질문에 답할 때를 아는 분이다.
Paccuppannaṃ cepi, cunda, hoti abhūtaṃ atacchaṃ anatthasaṃhitaṃ, na taṃ tathāgato byākaroti.
쭌다여, 현재의 일이 사실이 아니고 참되지 않으며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면, 여래는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Paccuppannaṃ cepi, cund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tthasaṃhitaṃ, tampi tathāgato na byākaroti.
쭌다여, 현재의 일이 사실이고 참되지만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면, 여래는 그것도 밝히지 않는다.
Paccuppannaṃ cepi, cunda, hoti bhūtaṃ tacchaṃ atthasaṃhitaṃ, tatra kālaññū tathāgato hoti tassa pañhassa veyyākaraṇāya.
쭌다여, 현재의 일이 사실이고 참되며 이익을 주는 것이면, 여래는 그 물음에 답할 때를 안다.
188
이처럼 쭌다여, 여래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들에 대해 때에 맞게, 사실대로, 이익이 되게, 법대로, 율대로 말한다. 그래서 ‘여래’라고 불린다. 쭌다여, 신들과 마라와 범천이 있는 이 세상에는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의 무리가 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얻고 찾고 마음으로 살핀 모든 것을 여래는 온전히 깨달았다. 그래서 ‘여래’라고 불린다.
‘‘Iti kho, cunda, atītānāgatapaccuppannesu dhammesu tathāgato kālavādī bhūtavādī atthavādī dhammavādī vinayavādī, tasmā ‘tathāgato’ti vuccati.
“쭌다여, 이와 같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들에 대해 여래는 때를 아는 말을 하고, 사실을 말하고, 이익을 말하고, 법을 말하고, 율을 말한다. 그래서 ‘여래’라 불린다.
Yañca kho, cunda, sadevakassa lokassa samārakassa sabrahmakassa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sabbaṃ tathāgatena abhisambuddhaṃ, tasmā ‘tathāgato’ti vuccati.
쭌다여,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무리에서 본 것, 들은 것, 겪은 것, 안 것, 이른 것, 찾은 것, 마음으로 헤아린 것, 그 모두를 여래는 온전히 깨달았다. 그래서 ‘여래’라 불린다.
쭌다여,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닫는 밤이 있다. 또 남음 없는 열반의 영역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밤이 있다. 이 두 밤 사이에 여래가 말하고 이야기하고 가르친 것은 모두 그대로이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여래’라고 불린다.
Yañca, cunda, rattiṃ tathāgato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jjhati, yañca rattiṃ anupādisesāya nibbānadhātuyā parinibbāyati, yaṃ etasmiṃ antare bhāsati lapati niddisati.
쭌다여,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온전히 깨닫는 그 밤부터, 남김 없는 열반의 요소로 완전한 열반에 드는 그 밤까지, 그 사이에 말하고 이야기하고 가리켜 보인 것,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 tasmā ‘tathāgato’ti vuccati.
그 모두는 그대로일 뿐 다르지 않다. 그래서 ‘여래’라 불린다.
쭌다여, 여래는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이처럼 말과 행동이 같으므로 ‘여래’라고 불린다.
Yathāvādī, cunda, tathāgato tathākārī, yathākārī tathāvādī.
쭌다여, 여래는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Iti yathāvādī tathākārī, yathākārī tathāvādī, tasmā ‘tathāgato’ti vuccati.
이렇게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그래서 ‘여래’라 불린다.
쭌다여, 신들과 마라와 범천이 있는 세상의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의 무리 가운데서, 여래는 이기는 사람이요 지지 않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요 자재한 사람이다. 그래서 ‘여래’라고 불린다.
Sadevake loke, cunda,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tathāgato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tasmā ‘tathāgato’ti vuccati.
쭌다여,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 신과 인간을 포함한 이 무리 가운데서 여래는 이겨 내는 이요, 정복되지 않는 이요, 모든 것을 보는 이요, 자재한 이다. 그래서 ‘여래’라 불린다.
밝히지 않으신 도리Abyākataṭṭhānaṃ
189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벗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는 주장을 말이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iṃ nu kho, āvuso,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그런데 벗들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도 있는가,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된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abyākataṃ kho, āvuso, bhagavatā –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밝히지 않으셨다 —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여래는 죽은 뒤에도 있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라고.’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벗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이여, 이것도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는 주장을 말이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iṃ panāvuso,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그런데 벗들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는 없는가,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된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etampi kho, āvuso, bhagavatā abyākataṃ –
‘벗들이여, 이것도 세존께서는 밝히지 않으셨다 —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여래는 죽은 뒤에는 없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라고.’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벗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이여, 이것도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는 주장을 말이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iṃ panāvuso,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그런데 벗들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된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abyākataṃ kho etaṃ, āvuso, bhagavatā –
‘벗들이여, 이것도 세존께서는 밝히지 않으셨다 —
‘‘hoti ca na c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여래는 죽은 뒤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라고.’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벗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이여, 이것도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다. “여래는 죽은 뒤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는 주장을 말이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iṃ panāvuso,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그런데 벗들이여, 여래는 죽은 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된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etampi kho, āvuso, bhagavatā abyākataṃ –
‘벗들이여, 이것도 세존께서는 밝히지 않으셨다 —
‘‘neva hoti na na hoti tathāgat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여래는 죽은 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라고.’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벗이여, 고따마 사문은 어째서 이것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들이여, 이것은 이익과 관계되지 않고 법과 관계되지 않는다. 청정한 수행의 바탕도 되지 않는다. 싫어해 떠남으로도, 탐욕을 떠남으로도, 소멸로도, 고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뛰어난 앎으로도, 깨달음으로도, 열반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asmā panetaṃ, āvuso, samaṇena gotamena abyākata’nti?
‘그런데 벗들이여, 어째서 사문 고따마는 이것을 밝히지 않았는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na hetaṃ, āvuso, atthasaṃhitaṃ na dhammasaṃhitaṃ na ādibrahmacariyakaṃ na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ti, tasmā taṃ bhagavatā abyākata’nti.
‘벗들이여, 이것은 이익을 주지 않고, 법에 맞지 않으며, 청정한 삶의 근본이 되지 않고, 싫어하여 떠남으로도, 탐욕이 사라짐으로도, 소멸로도, 고요함으로도, 최상의 지혜로도, 깨달음으로도, 열반으로도 이끌지 않는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밝히지 않으셨다.’
밝히신 도리Byākataṭṭhānaṃ
190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벗이여, 고따마 사문은 무엇을 설명했는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설명하셨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iṃ panāvuso, samaṇena gotamena byākata’nti?
‘그런데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무엇을 밝혔는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idaṃ dukkhanti kho, āvuso, bhagavatā byākataṃ, ayaṃ dukkhasamudayoti kho, āvuso, bhagavatā byākataṃ, ayaṃ dukkhanirodhoti kho, āvuso, bhagavatā byākataṃ,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kho, āvuso, bhagavatā byākata’nti.
‘벗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세존께서 밝히셨고, 벗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세존께서 밝히셨고, 벗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세존께서 밝히셨고, 벗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닦음이다」라고 세존께서 밝히셨다.’
쭌다여, 다른 교단의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벗이여, 고따마 사문은 어째서 이것을 설명했는가?’ 그러면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벗들이여, 이것은 이익과 관계되고 법과 관계되며, 청정한 수행의 바탕이 된다. 오로지 싫어해 떠남과 탐욕을 떠남, 소멸과 고요, 뛰어난 앎과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것을 설명하셨다.’
‘‘Ṭhānaṃ kho panetaṃ, cunda, vijjati, yaṃ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ṃ vadeyyuṃ –
“쭌다여, 그런데 다른 교단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할 도리가 있다 —
‘kasmā panetaṃ, āvuso, samaṇena gotamena byākata’nti?
‘그런데 벗들이여, 어째서 사문 고따마는 이것을 밝혔는가?’
Evaṃvādino, cund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evamassu vacanīyā –
쭌다여, 그렇게 말하는 다른 교단 유행승들에게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
‘etañhi, āvuso, atthasaṃhitaṃ, etaṃ dhammasaṃhitaṃ, etaṃ ādibrahmacariyakaṃ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벗들이여, 이것은 이익을 주고, 이것은 법에 맞으며, 이것은 청정한 삶의 근본이 되고, 오로지 싫어하여 떠남으로, 탐욕이 사라짐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최상의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Tasmā taṃ bhagavatā byākata’nti.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것을 밝히셨다.’
과거와 관련된 견해의 의지처들Pubbantasahagatadiṭṭhinissayā
191
쭌다여, 과거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도 설명해야 하는 방식대로 내가 너희에게 설명하였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어찌 설명하겠는가? 미래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도 설명해야 하는 방식대로 설명하였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어찌 설명하겠는가? 쭌다여, 내가 설명해야 하는 방식대로 설명한 과거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이란 무엇인가?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어찌 설명하겠는가?
‘‘Yepi te, cunda, pubb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tepi vo mayā byākatā, yathā te byākātabbā.
“쭌다여, 과거와 관련된 그 견해의 의지처들, 그것들도 밝혀야 할 대로 내가 그대들에게 밝혔다.
Yathā ca te na byākātabbā, kiṃ vo ahaṃ te tathā byākarissāmi?
그런데 밝히지 않아야 할 대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그것들을 그렇게 밝히겠는가?
Yepi te, cunda, apar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tepi vo mayā byākatā, yathā te byākātabbā.
쭌다여, 미래와 관련된 그 견해의 의지처들, 그것들도 밝혀야 할 대로 내가 그대들에게 밝혔다.
Yathā ca te na byākātabbā, kiṃ vo ahaṃ te tathā byākarissāmi?
그런데 밝히지 않아야 할 대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그것들을 그렇게 밝히겠는가?
Katame ca te, cunda, pubb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ye vo mayā byākatā, yathā te byākātabbā.
쭌다여, 그러면 내가 그대들에게 밝혀야 할 대로 밝힌, 과거와 관련된 그 견해의 의지처들이란 무엇인가?
(Yathā ca te na byākātabbā, kiṃ vo ahaṃ te tathā byākarissāmi)?
(그런데 밝히지 않아야 할 대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그것들을 그렇게 밝히겠는가?)
쭌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Santi kho, cund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쭌다여,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다 —
‘sassato attā ca loko ca,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또 쭌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지은 것이다.’ ‘자아와 세계는 남이 지은 것이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지은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생겨났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Santi pana, cund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그런데 쭌다여,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다 —
‘asassato attā ca loko ca…pe… sassato ca asassato ca attā ca loko ca… neva sassato nāsassato attā ca loko ca… sayaṃkato attā ca loko ca… paraṃkato attā ca loko ca… sayaṃkato ca paraṃkato ca attā ca loko ca… asayaṃkāro aparaṃkāro adhiccasamuppanno attā ca loko ca,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지 않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기도 하고 항상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남이 지은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91.8에서 되살렸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한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지은 것이다.’ ‘남이 지은 것이다.’ ‘스스로 지은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생겨났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Sassataṃ sukhadukkhaṃ… asassataṃ sukhadukkhaṃ… sassatañca asassatañca sukhadukkhaṃ… nevasassataṃ nāsassataṃ sukhadukkhaṃ…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raṃkataṃ sukhadukkhaṃ… sayaṃkatañca paraṃkatañca sukhadukkhaṃ…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하지 않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하기도 하고 항상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지은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91.8에서 되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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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다여, 그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나는 그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벗들이여, 정말로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고 말하는가?’ 그들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쭌다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중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쭌다여, 나는 이렇게 가르침을 세우는 일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물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겠는가. 오히려 그 점에서는 내가 더 뛰어나니, 더 높은 가르침을 세운다는 점이다.
‘‘Tatra, cunda,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쭌다여, 거기서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그 사문과 바라문들 —
‘sassato attā ca loko ca,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하는 이들,
Tyāhaṃ upasaṅkamitvā evaṃ vadāmi –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
‘atthi nu kho idaṃ, āvuso, vuccati –
‘벗들이여, 이런 말이 정말 있는가 —
‘‘sassato attā ca loko cā’’ti?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다”고?’
Yañca kho te evamāhaṃsu –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한 것,
Taṃ tesaṃ nānujānāmi.
그것을 나는 그들에게 인정하지 않는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ññathāsaññinopi hettha, cunda, santeke sattā.
쭌다여, 여기에는 달리 여기는 중생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Imāyapi kho ahaṃ, cunda, paññattiyā neva attanā samasamaṃ samanupassāmi kuto bhiyyo.
쭌다여, 이 드러내 보임에서도 나는 나와 똑같은 이를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더 나은 이겠는가.
Atha kho ahameva tattha bhiyyo yadidaṃ adhipaññatti.
오히려 거기서 내가 더 나으니, 곧 더 높은 드러내 보임이다.
193
쭌다여, 그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지은 것이다. 남이 지은 것이다. 스스로 지은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생겨났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지은 것이다. 남이 지은 것이다. 스스로 지은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생겨났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Tatra, cunda,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쭌다여, 거기서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그 사문과 바라문들 —
‘asassato attā ca loko ca…pe… sassato ca asassato ca attā ca loko ca… nevasassato nāsassato attā ca loko ca… sayaṃkato attā ca loko ca… paraṃkato attā ca loko ca… sayaṃkato ca paraṃkato ca attā ca loko ca… asayaṃkāro aparaṃkāro adhiccasamuppanno attā ca loko ca… sassataṃ sukhadukkhaṃ… asassataṃ sukhadukkhaṃ… sassatañca asassatañca sukhadukkhaṃ… nevasassataṃ nāsassataṃ sukhadukkhaṃ…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raṃkataṃ sukhadukkhaṃ… sayaṃkatañca paraṃkatañca sukhadukkhaṃ…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지 않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항상하기도 하고 항상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남이 지은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와 세상은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하지 않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하기도 하고 항상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항상한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지은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진 것이기도 하고 남이 지은 것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하는 이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92.2에서 되살렸습니다.
나는 그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벗들이여, 정말로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원인 없이 생겨났다”라고 말하는가?’ 그들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쭌다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중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쭌다여, 나는 이렇게 가르침을 세우는 일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물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겠는가. 오히려 그 점에서는 내가 더 뛰어나니, 더 높은 가르침을 세운다는 점이다. 쭌다여, 내가 너희에게 설명해야 하는 방식대로 설명한 과거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어찌 설명하겠는가?
Tyāhaṃ upasaṅkamitvā evaṃ vadāmi –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
‘atthi nu kho idaṃ, āvuso, vuccati –
‘벗들이여, 이런 말이 정말 있는가 —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nti?
“즐거움과 괴로움은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고 남이 지은 것도 아니며 우연히 생겨난 것이다”고?’
Yañca kho te evamāhaṃsu –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한 것,
Taṃ tesaṃ nānujānāmi.
그것을 나는 그들에게 인정하지 않는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ññathāsaññinopi hettha, cunda, santeke sattā.
쭌다여, 여기에는 달리 여기는 중생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Imāyapi kho ahaṃ, cunda, paññattiyā neva attanā samasamaṃ samanupassāmi kuto bhiyyo.
쭌다여, 이 드러내 보임에서도 나는 나와 똑같은 이를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더 나은 이겠는가.
Atha kho ahameva tattha bhiyyo yadidaṃ adhipaññatti.
오히려 거기서 내가 더 나으니, 곧 더 높은 드러내 보임이다.
Ime kho te, cunda, pubb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ye vo mayā byākatā, yathā te byākātabbā.
쭌다여, 이것들이 내가 그대들에게 밝혀야 할 대로 밝힌, 과거와 관련된 그 견해의 의지처들이다.
Yathā ca te na byākātabbā, kiṃ vo ahaṃ te tathā byākarissāmīti?
그런데 밝히지 않아야 할 대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그것들을 그렇게 밝히겠는가?”
미래와 관련된 견해의 의지처들Aparantasahagatadiṭṭhinissayā
194
쭌다여, 내가 너희에게 설명해야 하는 방식대로 설명한 미래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이란 무엇인가?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어찌 설명하겠는가?
‘‘Katame ca te, cunda, apar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ye vo mayā byākatā, yathā te byākātabbā.
“쭌다여, 그러면 내가 그대들에게 밝혀야 할 대로 밝힌, 미래와 관련된 그 견해의 의지처들이란 무엇인가?
(Yathā ca te na byākātabbā, kiṃ vo ahaṃ te tathā byākarissāmī)?
(그런데 밝히지 않아야 할 대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그것들을 그렇게 밝히겠는가?)
쭌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다. ‘자아는 형상이 있고 병이 없으며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Santi, cund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쭌다여,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다 —
‘rūpī attā hoti arog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는 물질을 지니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또 쭌다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다. ‘자아는 형상이 없다.’ ‘자아는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자아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자아는 생각이 있다.’ ‘자아는 생각이 없다.’ ‘자아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자아는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Santi pana, cund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그런데 쭌다여,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있다 —
‘arūpī attā hoti…pe… rūpī ca arūpī ca attā hoti… nevarūpī nārūpī attā hoti… saññī attā hoti… asaññī attā hoti… nevasaññīnāsaññī attā hoti… att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물질을 지니기도 하고 지니지 않기도 하며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물질을 지닌 것도 아니고 지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인식을 지니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인식을 지니지 않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인식을 지닌 것도 아니고 지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끊어지고 무너져 죽은 뒤에는 있지 않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94.4에서 되살렸습니다.
쭌다여, 그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자아는 형상이 있고 병이 없으며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나는 그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벗들이여, 정말로 “자아는 형상이 있고 병이 없으며 죽은 뒤에도 존재한다”라고 말하는가?’ 그들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쭌다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중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쭌다여, 나는 이렇게 가르침을 세우는 일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물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겠는가. 오히려 그 점에서는 내가 더 뛰어나니, 더 높은 가르침을 세운다는 점이다.
Tatra, cunda,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쭌다여, 거기서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그 사문과 바라문들 —
‘rūpī attā hoti arogo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는 물질을 지니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하는 이들,
Tyāhaṃ upasaṅkamitvā evaṃ vadāmi –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
‘atthi nu kho idaṃ, āvuso, vuccati –
‘벗들이여, 이런 말이 정말 있는가 —
‘‘rūpī attā hoti arogo paraṃ maraṇā’’’ti?
“자아는 물질을 지니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고?’
Yañca kho te evamāhaṃsu –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한 것,
Taṃ tesaṃ nānujānāmi.
그것을 나는 그들에게 인정하지 않는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ññathāsaññinopi hettha, cunda, santeke sattā.
쭌다여, 여기에는 달리 여기는 중생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Imāyapi kho ahaṃ, cunda, paññattiyā neva attanā samasamaṃ samanupassāmi kuto bhiyyo.
쭌다여, 이 드러내 보임에서도 나는 나와 똑같은 이를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더 나은 이겠는가.
Atha kho ahameva tattha bhiyyo yadidaṃ adhipaññatti.
오히려 거기서 내가 더 나으니, 곧 더 높은 드러내 보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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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다여, 그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이 있다. ‘자아는 형상이 없다.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있다. 생각이 없다.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자아는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Tatra, cunda, ye t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쭌다여, 거기서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지닌 그 사문과 바라문들 —
‘arūpī attā hoti…pe… rūpī ca arūpī ca attā hoti… nevarūpīnārūpī attā hoti… saññī attā hoti… asaññī attā hoti… nevasaññīnāsaññī attā hoti… att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ṃ 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자아는 물질을 지니지 않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물질을 지니기도 하고 지니지 않기도 하며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물질을 지닌 것도 아니고 지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인식을 지니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인식을 지니지 않고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인식을 지닌 것도 아니고 지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병들지 않는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 ‘자아는 끊어지고 무너져 죽은 뒤에는 있지 않다,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하는 이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9:194.4에서 되살렸습니다.
나는 그들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벗들이여, 정말로 “자아는 끊어지고 사라져 죽은 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가?’ 쭌다여, 그들은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어리석은 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쭌다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중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쭌다여, 나는 이렇게 가르침을 세우는 일에서도 나와 같은 사람을 보지 못한다. 하물며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겠는가. 오히려 그 점에서는 내가 더 뛰어나니, 더 높은 가르침을 세운다는 점이다. 쭌다여, 내가 너희에게 설명해야 하는 방식대로 설명한 미래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어찌 설명하겠는가?
Tyāhaṃ upasaṅkamitvā evaṃ vadāmi –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
‘atthi nu kho idaṃ, āvuso, vuccati –
‘벗들이여, 이런 말이 정말 있는가 —
‘‘att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ṃ maraṇā’’’ti?
“자아는 끊어지고 무너져 죽은 뒤에는 있지 않다”고?’
Yañca kho te, cunda, evamāhaṃsu –
그런데 쭌다여,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이것만이 진리요 다른 것은 헛되다’고 한 것,
Taṃ tesaṃ nānujānāmi.
그것을 나는 그들에게 인정하지 않는다.
Taṃ kissa hetu?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Aññathāsaññinopi hettha, cunda, santeke sattā.
쭌다여, 여기에는 달리 여기는 중생들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Imāyapi kho ahaṃ, cunda, paññattiyā neva attanā samasamaṃ samanupassāmi, kuto bhiyyo.
쭌다여, 이 드러내 보임에서도 나는 나와 똑같은 이를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더 나은 이겠는가.
Atha kho ahameva tattha bhiyyo yadidaṃ adhipaññatti.
오히려 거기서 내가 더 나으니, 곧 더 높은 드러내 보임이다.
Ime kho te, cunda, apar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ye vo mayā byākatā, yathā te byākātabbā.
쭌다여, 이것들이 내가 그대들에게 밝혀야 할 대로 밝힌, 미래와 관련된 그 견해의 의지처들이다.
Yathā ca te na byākātabbā, kiṃ vo ahaṃ te tathā byākarissāmīti?
그런데 밝히지 않아야 할 대로, 내가 어찌 그대들에게 그것들을 그렇게 밝히겠는가?”
196
쭌다여, 과거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과 미래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을 버리고 넘어서야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이처럼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가르치고 정하였다. 그 넷이란 무엇인가?
‘‘Imesañca, cunda, pubbantasahagatānaṃ diṭṭhinissayānaṃ imesañca aparantasahagatānaṃ diṭṭhinissayānaṃ pahānāya samatikkamāya evaṃ mayā cattāro satipaṭṭhānā desitā paññattā.
“쭌다여, 과거와 관련된 이 견해의 의지처들과 미래와 관련된 이 견해의 의지처들을 버리고 뛰어넘도록, 나는 이와 같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설하고 정해 놓았다.
Katame cattāro?
무엇이 넷인가?
쭌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살피며 머문다. 열심히 노력하고 분명히 알고 마음챙겨,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다스린다. 느낌들에서 느낌을, 마음에서 마음을, 법들에서 법을 따라 살피며 머문다. 이때에도 열심히 노력하고 분명히 알고 마음챙겨,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다스린다.
Idha, cunda,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쭌다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거듭 살피며 머문다. 부지런히 힘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마음을 챙기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다스린다.
Vedanāsu vedanānupassī…pe… citte cittānupassī…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느낌들에서 느낌을 거듭 살피며 머문다. 부지런히 힘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마음을 챙기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다스린다. 마음에서 마음을 거듭 살피며 머문다. 부지런히 힘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마음을 챙기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다스린다. 법들에서 법을 거듭 살피며 머문다. 부지런히 힘쓰고, 또렷이 알아차리며 마음을 챙기고,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다스린다.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DN 22:373.3에서 되살렸습니다.
쭌다여, 과거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과 미래에 매인 견해의 근거들을 버리고 넘어서도록, 나는 이처럼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가르치고 정하였다.
Imesañca cunda, pubbantasahagatānaṃ diṭṭhinissayānaṃ imesañca aparantasahagatānaṃ diṭṭhinissayānaṃ pahānāya samatikkamāya.
쭌다여, 과거와 관련된 이 견해의 의지처들과 미래와 관련된 이 견해의 의지처들을 버리고 뛰어넘도록,
Evaṃ mayā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desitā paññattā’’ti.
나는 이와 같이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설하고 정해 놓았다.”
197
그때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의 뒤에 서서 세존께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Tena kho pana samayena āyasmā upavāṇo bhagavato piṭṭhito ṭhito hoti bhagavantaṃ bījayamāno.
그때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 뒤에 서서 세존께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Atha kho āyasmā upavāṇo bhagavantaṃ etadavoca –
그때 우빠와나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신기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은 참으로 믿음이 우러나게 합니다. 깊이 믿음이 우러나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acchariyaṃ, bhante, abbhutaṃ, bhante!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Pāsādiko vatāyaṃ, bhante, dhammapariyāyo;
세존이시여, 이 법문은 참으로 마음을 맑힙니다.
supāsādiko vatāyaṃ bhante, dhammapariyāyo, ko nāmāyaṃ bhante dhammapariyāyo’’ti?
세존이시여, 이 법문은 참으로 마음을 잘 맑힙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빠와나여, 그렇다면 너는 이 법문을 ‘믿음이 우러나는 법문’이라고 기억하라.”
‘‘Tasmātiha tvaṃ, upavāṇa, imaṃ dhammapariyāyaṃ ‘pāsādiko’ tveva naṃ dhārehī’’ti.
“그러니 우빠와나여, 그대는 이 법문을 ‘빠사디까’라고 지녀라.”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빠와나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빠사디까 경이 끝났다. 여섯째이다.
Idamavoca bhagavā.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Attamano āyasmā upavāṇo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īti.
우빠와나 존자는 마음이 흡족하여,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며 받들었다.
Pāsādikasuttaṃ niṭṭhitaṃ chaṭṭhaṃ.
빠사디까 경이 끝났다. 여섯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