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 12.51
두루 살핌 경
Parivīmaṃsanasuttaṃ
교차 검사
1. Parivīmaṃsanasuttaṃ
1. 두루 살핌 경
5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비구들이여." "존자시여." 비구들이 대답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Evaṃ me sutaṃ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제따 숲, 아나타삔디까 원림에 머무셨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을 부르셨다.
‘‘bhikkhavo’’ti.
“비구들이여.”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디까지 따져 살펴야 하느냐? 괴로움이 남김없이 바르게 다하는 데로 가려면, 그 살핌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느냐?"[불확실]
‘‘Kittāvatā nu kho, bhikkhave, bhikkhū parivīmaṃsamāno parivīmaṃseyya sabbaso sammā dukkhakkhayāyā’’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느 만큼 두루 살피면서 두루 살펴야 온전히 바르게 괴로움이 다하겠는가?”[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존자시여, 저희에게 가르침은 세존을 뿌리로 삼습니다. 세존을 길잡이로 삼고, 세존을 기댈 곳으로 삼습니다. 부디 세존께서 이 말씀의 뜻을 직접 밝혀 주십시오. 세존께 듣고서 저희가 그것을 간직하겠습니다."
‘‘Bhagavaṃmūlakā no, bhante, dhammā bhagavaṃnettikā bhagavaṃpaṭisaraṇā.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인도자로 하며, 세존을 의지처로 합니다.
Sādhu vata, bhante, bhagavantaṃyeva paṭibhātu etassa bhāsitassa attho.
세존이시여, 부디 이 말씀의 뜻이 세존께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Bhagavato sutvā bhikkhū dhāressantī’’ti.
세존께 듣고서 비구들이 지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들어라. 잘 마음에 새겨라. 내가 말하겠다." "예, 존자시여." 비구들이 대답했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Tena hi, bhikkhave,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그러면 비구들이여, 잘 들어라, 마음을 잘 기울여라. 이제 말하리라.”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예, 세존이시여” 하고 그 비구들이 세존께 대답했다.
Bhagavā etadavoca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비구가 따져 살피면서 이렇게 살핀다. '세상에는 온갖 모양으로 갖가지 괴로움이 일어난다. 곧 늙음과 죽음이다. 이 괴로움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무엇에서 일어나고, 무엇에서 생겨나며,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무엇이 없을 때 늙음과 죽음이 없는가?'[불확실]
‘‘Idha, bhikkhave, bhikkhu parivīmaṃsamāno parivīmaṃsati –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두루 살피면서 두루 살핀다.
‘yaṃ kho idaṃ anekavidhaṃ nānappakārakaṃ dukkhaṃ loke uppajjati jarāmaraṇaṃ;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여러 갈래이고 갖가지 모양인 괴로움, 곧 늙음과 죽음,
idaṃ nu kho dukkhaṃ kiṃnidānaṃ kiṃsamudayaṃ kiṃjātikaṃ kiṃpabhavaṃ?
이 괴로움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Kismiṃ sati jarāmaraṇaṃ hoti, kismiṃ asati jarāmaraṇaṃ na hotī’ti?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늙음과 죽음이 없는가?’[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그는 따져 살피면서 이렇게 안다. '세상에 온갖 모양으로 일어나는 이 괴로움, 곧 늙음과 죽음. 이것은 태어남을 바탕으로 한다. 태어남에서 일어나고, 태어남에서 생겨나며, 태어남에서 비롯된다.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다.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도 없다.'
So parivīmaṃsamāno evaṃ pajānāti –
그는 두루 살피면서 이렇게 분명히 안다.
‘yaṃ kho idaṃ anekavidhaṃ nānappakārakaṃ dukkhaṃ loke uppajjati jarāmaraṇaṃ, idaṃ kho dukkhaṃ jātinidānaṃ jātisamudayaṃ jātijātikaṃ jātippabhavaṃ.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 여러 갈래이고 갖가지 모양인 괴로움, 곧 늙음과 죽음, 이 괴로움은 태어남을 근원으로 하고, 태어남을 일어남으로 하고, 태어남을 태생으로 하고, 태어남을 발생으로 한다.
Jātiyā sati jarāmaraṇaṃ hoti, jātiyā asati jarāmaraṇaṃ na hotī’’’ti.
태어남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없을 때 늙음과 죽음이 없다.’
그는 늙음과 죽음을 안다. 늙음과 죽음이 일어남을 알고, 사라짐을 안다. 늙음과 죽음이 사라지는 데로 알맞게 이끄는 길도 안다. 그리고 그 길대로 걸으며 가르침에 맞게 산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두고 길을 걷는 자라고 한다. 괴로움이 남김없이 바르게 다하도록, 늙음과 죽음이 사라지도록 걷는 자다.
‘‘So jarāmaraṇañca pajānāti, jarāmaraṇasamudayañca pajānāti, jarāmaraṇanirodhañca pajānāti, yā ca jarāmaraṇanirodhasāruppagāminī paṭipadā tañca pajānāti, tathā paṭipanno ca hoti anudhammacārī;
“그는 늙음과 죽음을 분명히 알고, 늙음과 죽음의 일어남을 분명히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분명히 알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알맞게 이끄는 길을 분명히 알며, 그렇게 실천하여 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된다.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sabbaso sammā dukkhakkhayāya paṭipanno jarāmaraṇanirodhāya.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온전히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기 위해, 늙음과 죽음의 소멸을 위해 실천하는 비구라고 한다.
그다음 그는 다시 따져 살피면서 이렇게 살핀다. '그러면 이 태어남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무엇에서 일어나고, 무엇에서 생겨나며,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이 있을 때 태어남이 있는가? 무엇이 없을 때 태어남이 없는가?'
‘‘Athāparaṃ parivīmaṃsamāno parivīmaṃsati –
“다시 그는 두루 살피면서 두루 살핀다.
‘jāti panāyaṃ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kismiṃ sati jāti hoti, kismiṃ asati jāti na hotī’ti?
‘그런데 이 태어남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무엇이 있을 때 태어남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태어남이 없는가?’
그는 따져 살피면서 이렇게 안다. '태어남은 존재를 바탕으로 한다. 존재에서 일어나고, 존재에서 생겨나며,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가 있을 때 태어남이 있다.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도 없다.'
So parivīmaṃsamāno evaṃ pajānāti –
그는 두루 살피면서 이렇게 분명히 안다.
‘jāti bhavanidānā bhavasamudayā bhavajātikā bhavappabhavā;
‘태어남은 존재를 근원으로 하고, 존재를 일어남으로 하고, 존재를 태생으로 하고, 존재를 발생으로 한다.
bhave sati jāti hoti, bhave asati jāti na hotī’’’ti.
존재가 있을 때 태어남이 있고, 존재가 없을 때 태어남이 없다.’
그는 태어남을 안다. 태어남이 일어남을 알고, 사라짐을 안다. 태어남이 사라지는 데로 알맞게 이끄는 길도 안다. 그리고 그 길대로 걸으며 가르침에 맞게 산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두고 길을 걷는 자라고 한다. 괴로움이 남김없이 바르게 다하도록, 태어남이 사라지도록 걷는 자다.
‘‘So jātiñca pajānāti, jātisamudayañca pajānāti, jātinirodhañca pajānāti, yā ca jātinirodhasāruppagāminī paṭipadā tañca pajānāti, tathā paṭipanno ca hoti anudhammacārī;
“그는 태어남을 분명히 알고, 태어남의 일어남을 분명히 알고, 태어남의 소멸을 분명히 알고, 태어남의 소멸로 알맞게 이끄는 길을 분명히 알며, 그렇게 실천하여 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된다.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sabbaso sammā dukkhakkhayāya paṭipanno jātinirodhāya.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온전히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기 위해, 태어남의 소멸을 위해 실천하는 비구라고 한다.
그다음 그는 다시 따져 살피면서 이렇게 살핀다. '그러면 이 존재는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이 붙잡음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갈애와 느낌과 닿음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여섯 감각 영역과 이름과 형태와 의식은 또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그러면 이 지음들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가? 무엇에서 일어나고, 무엇에서 생겨나며,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이 있을 때 지음들이 있는가? 무엇이 없을 때 지음들이 없는가?'
‘‘Athāparaṃ parivīmaṃsamāno parivīmaṃsati –
“다시 그는 두루 살피면서 두루 살핀다.
‘bhavo panāyaṃ kiṃnidāno…pe… upādānaṃ panidaṃ kiṃnidānaṃ… taṇhā panāyaṃ kiṃnidānā… vedanā… phasso… saḷāyatanaṃ panidaṃ kiṃnidānaṃ… nāmarūpaṃ panidaṃ… viññāṇaṃ panidaṃ… saṅkhārā panime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그런데 이 존재는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취착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갈애는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느낌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접촉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여섯 감각장소는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정신과 물질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의식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는가? 그런데 이 형성들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엇을 태생으로 하고, 무엇을 발생으로 하며,
생략 복원 원문의 …pe…를 SN 12.51:51.24에서 되살렸습니다.
kismiṃ sati saṅkhārā honti, kismiṃ asati saṅkhārā na hontī’ti?
무엇이 있을 때 형성들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형성들이 없는가?’
그는 따져 살피면서 이렇게 안다. '지음들은 무명을 바탕으로 한다. 무명에서 일어나고, 무명에서 생겨나며, 무명에서 비롯된다. 무명이 있을 때 지음들이 있다. 무명이 없으면 지음들도 없다.'
So parivīmaṃsamāno evaṃ pajānāti –
그는 두루 살피면서 이렇게 분명히 안다.
‘saṅkhārā avijjānidānā avijjāsamudayā avijjājātikā avijjāpabhavā;
‘형성들은 무명을 근원으로 하고, 무명을 일어남으로 하고, 무명을 태생으로 하고, 무명을 발생으로 한다.
avijjāya sati saṅkhārā honti, avijjāya asati saṅkhārā na hontī’’’ti.
무명이 있을 때 형성들이 있고, 무명이 없을 때 형성들이 없다.’
그는 지음들을 안다. 지음들이 일어남을 알고, 사라짐을 안다. 지음들이 사라지는 데로 알맞게 이끄는 길도 안다. 그리고 그 길대로 걸으며 가르침에 맞게 산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두고 길을 걷는 자라고 한다. 괴로움이 남김없이 바르게 다하도록, 지음들이 사라지도록 걷는 자다.
‘‘So saṅkhāre ca pajānāti, saṅkhārasamudayañca pajānāti, saṅkhāranirodhañca pajānāti, yā ca saṅkhāranirodhasāruppagāminī paṭipadā tañca pajānāti, tathā paṭipanno ca hoti anudhammacārī;
“그는 형성들을 분명히 알고, 형성의 일어남을 분명히 알고, 형성의 소멸을 분명히 알고, 형성의 소멸로 알맞게 이끄는 길을 분명히 알며, 그렇게 실천하여 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된다.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sabbaso sammā dukkhakkhayāya paṭipanno saṅkhāranirodhāya.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를 온전히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기 위해, 형성의 소멸을 위해 실천하는 비구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싸인 사람이 좋은 결과를 부르는 지음을 지어낸다고 하자. 그러면 그의 의식은 그 좋은 결과 쪽으로 간다. 나쁜 결과를 부르는 지음을 지어내면, 그의 의식은 그 나쁜 결과 쪽으로 간다. 흔들림 없는 지음을 지어내면, 그의 의식은 그 흔들림 없는 쪽으로 간다.
‘‘Avijjāgato yaṃ, bhikkhave, purisapuggalo puññaṃ ce 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puññūpagaṃ hoti viññāṇaṃ.
“비구들이여, 무명에 빠진 사람이 공덕이 되는 형성을 지어내면 의식은 공덕으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Apuññaṃ ce 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apuññūpagaṃ hoti viññāṇaṃ.
공덕이 되지 않는 형성을 지어내면 의식은 공덕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Āneñjaṃ ce 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āneñjūpagaṃ hoti viññāṇaṃ.
흔들림 없는 형성을 지어내면 의식은 흔들림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에게서 무명이 버려지고 밝음이 일어났다고 하자. 무명이 걷히고 밝음이 생겨났으므로 그는 이제 아무 지음도 지어내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부르는 지음도, 나쁜 결과를 부르는 지음도, 흔들림 없는 지음도 지어내지 않는다. 지어내지 않고 마음으로 꾸미지도 않으니,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붙잡지 않으므로 애태우지 않는다. 애태우지 않으므로 스스로 그 자리에서 완전히 꺼진다. 그리고 이렇게 안다. '태어남은 다했고 맑은 삶은 다 살았다. 할 일은 다 마쳤다. 이제 이런 상태로 다시 오는 일은 없다.'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avijjā pahīnā hoti vijjā uppannā, so avijjāvirāgā vijjuppādā neva 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a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āneñj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무명이 버려지고 밝은 앎이 일어나면, 그는 무명이 사라지고 밝은 앎이 생겼으므로 공덕이 되는 형성도 지어내지 않고, 공덕이 되지 않는 형성도 지어내지 않고, 흔들림 없는 형성도 지어내지 않는다.
Anabhisaṅkharonto anabhisañcetayanto na kiñci loke upādiyati;
지어내지 않고 의도하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취착하지 않는다.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취착하지 않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든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다 살았으며, 할 일은 마쳤고, 다시 이런 상태로 오는 일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그는 그것이 덧없음을 안다. 거기 들러붙지 않으며 그것을 반기지도 않음을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도 그것이 덧없음을 안다. 거기 들러붙지 않으며 반기지도 않음을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마찬가지다. 덧없음을 알고, 들러붙지 않고 반기지 않음을 안다.[불확실]
‘‘So 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분명히 알고, 달라붙을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알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안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Dukkhaṃ 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분명히 알고, 달라붙을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알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안다.
Adukkhama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sā aniccāti pajānāti, anajjhositāti pajānāti, anabhinanditāti pajānā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그것은 무상하다고 분명히 알고, 달라붙을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알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안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그는 거기 매이지 않은 채로 느낀다. 괴로운 느낌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그렇게 느낀다.
So 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visaṃyutto naṃ vedayati.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매이지 않은 채 그것을 느낀다.
Dukkhaṃ ce vedanaṃ vedayati, visaṃyutto naṃ vedayati.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매이지 않은 채 그것을 느낀다.
Adukkhamasukhaṃ ce vedanaṃ vedayati, visaṃyutto naṃ vedayati.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매이지 않은 채 그것을 느낀다.
그는 몸이 다하는 데까지 가는 느낌을 느낄 때 이렇게 안다. '나는 몸이 다하는 데까지 가는 느낌을 느낀다.' 목숨이 다하는 데까지 가는 느낌을 느낄 때도 이렇게 안다. '나는 목숨이 다하는 데까지 가는 느낌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안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기지 않은 이 느낌들이 바로 여기서 식어 버린다. 남는 것은 몸뚱이뿐이다.'
‘‘S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그는 몸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몸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알고, 목숨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목숨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idheva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i, sarīrāni avasissantīti pajānāti.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바로 여기서 느껴진 모든 것이 기뻐할 것이 아니어서 식을 것이고, 유해만 남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옹기 가마에서 뜨거운 항아리를 꺼낸다고 하자. 그것을 평평한 땅에 내려놓으면 열기는 거기서 가라앉는다. 남는 것은 질그릇 조각뿐이다. 비구들이여, 바로 그와 같다. 비구는 몸이 다하는 데까지 가는 느낌을 느낄 때 그것을 그대로 안다. 목숨이 다하는 데까지 가는 느낌을 느낄 때도 그것을 그대로 안다. 그리고 이렇게 안다.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기지 않은 이 느낌들이 바로 여기서 식어 버린다. 남는 것은 몸뚱이뿐이다.'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kumbhakārapākā uṇhaṃ kumbhaṃ uddharitvā same bhūmibhāge paṭisisseyya.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옹기장이의 가마에서 뜨거운 항아리를 꺼내어 평평한 땅에 놓아둔다고 하자.
Tatra yāyaṃ usmā sā tattheva vūpasameyya, kapallāni avasisseyyuṃ.
그러면 거기에 있던 열기는 바로 거기서 가라앉고, 깨진 조각들만 남을 것이다.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kāy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amāno jīvitapariyantikaṃ vedanaṃ vedayāmīti pajānāti.
비구들이여, 꼭 이와 같이 비구는 몸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몸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알고, 목숨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목숨을 한계로 하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Kāyassa bhedā uddhaṃ jīvitapariyādānā idheva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ībhavissanti, sarīrāni avasissantīti pajānāti.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바로 여기서 느껴진 모든 것이 기뻐할 것이 아니어서 식을 것이고, 유해만 남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번뇌가 다한 비구가 좋은 결과를 부르는 지음을 지어내겠느냐? 나쁜 결과를 부르는 지음이나 흔들림 없는 지음을 지어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kho khīṇāsavo bhikkhu puññābhisaṅkhāraṃ vā abhisaṅkhareyya apuññābhisaṅkhāraṃ vā abhisaṅkhareyya āneñjābhisaṅkhāraṃ vā abhisaṅkhareyyā’’ti?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번뇌 다한 비구가 공덕이 되는 형성을 지어내거나, 공덕이 되지 않는 형성을 지어내거나, 흔들림 없는 형성을 지어내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지음들이 아예 없고 지음들이 사라졌는데 의식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의식이 아예 없고 의식이 사라졌는데 이름과 형태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Sabbaso vā pana saṅkhāresu asati, saṅkhāranirodhā api nu kho viññāṇaṃ paññāyethā’’ti?
“또 형성들이 전혀 없을 때, 형성이 소멸하였는데 의식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abbaso vā pana viññāṇe asati, viññāṇanirodhā api nu kho nāmarūpaṃ paññāyethā’’ti?
“또 의식이 전혀 없을 때, 의식이 소멸하였는데 정신과 물질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름과 형태가 아예 없고 이름과 형태가 사라졌는데 여섯 감각 영역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여섯 감각 영역이 아예 없고 여섯 감각 영역이 사라졌는데 닿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Sabbaso vā pana nāmarūpe asati, nāmarūpanirodhā api nu kho saḷāyatanaṃ paññāyethā’’ti?
“또 정신과 물질이 전혀 없을 때, 정신과 물질이 소멸하였는데 여섯 감각장소가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abbaso vā pana saḷāyatane asati, saḷāyatananirodhā api nu kho phasso paññāyethā’’ti?
“또 여섯 감각장소가 전혀 없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였는데 접촉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닿음이 아예 없고 닿음이 사라졌는데 느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느낌이 아예 없고 느낌이 사라졌는데 갈애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Sabbaso vā pana phasse asati, phassanirodhā api nu kho vedanā paññāyethā’’ti?
“또 접촉이 전혀 없을 때, 접촉이 소멸하였는데 느낌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abbaso vā pana vedanāya asati, vedanānirodhā api nu kho taṇhā paññāyethā’’ti?
“또 느낌이 전혀 없을 때, 느낌이 소멸하였는데 갈애가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갈애가 아예 없고 갈애가 사라졌는데 붙잡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붙잡음이 아예 없고 붙잡음이 사라졌는데 존재가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Sabbaso vā pana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upādānaṃ paññāyethā’’ti?
“또 갈애가 전혀 없을 때, 갈애가 소멸하였는데 취착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abbaso vā pana upādāne asati, upādānanirodhā api nu kho bhavo paññāyethā’’ti.
“또 취착이 전혀 없을 때, 취착이 소멸하였는데 존재가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존재가 아예 없고 존재가 사라졌는데 태어남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태어남이 아예 없고 태어남이 사라졌는데 늙음과 죽음이 드러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Sabbaso vā pana bhave asati, bhavanirodhā api nu kho jāti paññāyethā’’ti?
“또 존재가 전혀 없을 때, 존재가 소멸하였는데 태어남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Sabbaso vā pana jātiyā asati, jātinirodhā api nu kho jarāmaraṇaṃ paññāyethā’’ti?
“또 태어남이 전혀 없을 때, 태어남이 소멸하였는데 늙음과 죽음이 드러나겠는가?”
‘‘No hetaṃ, bhante’’.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다,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러하며 달리 될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이 점에서 나를 믿고 마음을 굳혀라. 여기에는 흔들림도 의심도 두지 마라.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불확실]
‘‘Sādhu sādhu, bhikkhave, evametaṃ, bhikkhave, netaṃ aññathā.
“훌륭하다, 훌륭하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러하며, 달리 되지 않는다.[불확실]
불확실 판단 근거가 부족한 자리입니다.
Saddahatha me taṃ, bhikkhave, adhimuccatha, nikkaṅkhā ettha hotha nibbicikicchā.
비구들이여, 그것을 나에게서 믿고 확신하라. 여기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의혹을 품지 마라.
Esevanto dukkhassā’’ti.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
Paṭhamaṃ.
첫째.